열매로 승부하라

열매로 승부하라  /마13:18-23|……──마태복음
 
 

본문: 마태복음 13:16절 /   설교자 권 다니엘 목사

제목: 열매로 승부하라/주일 설교 Cell:1-703-371-4613

 

 

 

주성령교회 (예수교장로회 국제연합총회) UPCA

1185 Red, Barn Rd Ambler, PA 19002 Tel:215-542-5099

 

 
 

할렐루야!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을 너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큰 은혜를 베푸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심는 씨앗들은 지금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10년, 20년, 30년 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많은 열매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씨앗을 심어놓고 빨리 무슨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하거나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심은 씨앗은 때가 되고 조건이 갖추어지면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그 씨들은 각기 다른 토양에 뿌려집니다.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집니다. 굳어있는 길바닥 위에 그대로 노출 되어 있는 씨앗은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새들의 밥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씨앗은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집니다. 씨앗은 곧 싹을 내고 곧 잘 자랍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하여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말라 타 죽고 맙니다.

또 다른 씨앗은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집니다. 가시나무의 강한 뿌리사이로 씨앗은 뿌리를 튼튼히 내리지를 못합니다. 싹은 나지만 약한 뿌리에서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성한 가시나무 가지들 틈바구니 사이로 간신히 자라나는 싹은 꽃이 피어야할 시간에 꽃다운 꽃을 피우지 못하고 결국은 기대할만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가 뿌린 씨앗의 대부분은 아주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 적당히 땅에 묻힌 씨앗은 싹을 내고 잘 자랍니다. 향기로운 꽃을 피워 벌과 나비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사람에게는 맑고 향기로운 공기와 꿀을 제공하고 마침내 튼실한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어떤 것은 100배, 다른 것은 60배, 또 다른 것은 30배를 맺습니다.

이 비유의 뜻을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친절히 설명해 주신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가르침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비유해석의 결론은 23절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되느니라.”

무릇 모든 일에 열정을 쏟아 수고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게임에 참가한 선수들 모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가하는데 뜻을 둔 것은 아닙니다. 금메달10개에 10위를 목표를 하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농업시험장에서 토지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연구하기 위하여 씨앗을 뿌려 그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농부는 단 하나의 목표-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해석은 분명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느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땅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해결해야할 네 가지 사실을 가르칩니다.
“좋은 땅”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19절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실망을 희망과 기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악한 자 곧 사탄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전혀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어떤 말씀을 들었어도 말씀에 대한 어떤 감각도 없습니다.
무관심합니다.

1) 거듭된 실망으로 체념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들에 의하여 실망하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의 어떤 것에도 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욕이 없습니다. 서민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정치인들의 화려한 약속에 하도 많이 속아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는 관심이 없습니다.

 

유명한 폴 틸리히의 이런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 공허감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종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하느라 정신없다가 그 다음엔 연애하느라고 한참 빠졌다가 그 다음엔 결혼을 해가지고 애낳고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애들이 다 결혼해가지고 나가고 그러니까 \"허전합니다. 허망합니다.\" 왜요? 당신의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거든. 정말로 사랑한 일엔 허망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의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 속에는 허망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공허감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이렇게 변명하고 저래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만, 그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I.Q.가 90이하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하면 걱정도 없습니다. 똑똑하니까 생각이 많습니다. 이렇게 변명, 아무리 변명을 해보아도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안에서 회개의 용기를 얻을 때에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이 많은 죄책에서 아무도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술집으로 가고, 그래서 마약을 하고 그래서 폭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죄책감,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또한 공포감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기만 합니다. 옛날에 제가 써놓은 제 학위 논문이 종말론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에 대해서 Futurology에 대해서 제가 책을 비교적 많이 읽는 편입니다. 새로 나온다는 책이 나오면 제가 또 사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래학을 아무리 보아도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담하다, 절망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미래학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무서운 공포, 불확실함, 암담함, 절망이 밀려옵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 믿음 안에서만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그 사람만이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은혜 Sola Glatia! 모든 것은 은혜다. 절대적 은혜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Sola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다시 한 번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하십시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영광! 새로운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2)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 속에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가치관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당시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들의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말해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조용히 듣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차분하게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작년에 출판된 “경청”이라는 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주인공 ‘이토벤’을 통해서 경청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평소에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을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립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독선적인 행동을 뉘우치고, 팀원의 말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또 팀원들은 이런 ‘이토벤’을 보며 서로 마음을 녹이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마음의 소리’로 상대와 의사를 소통하게 됩니다. 공감과 상생을 위한 경청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전옥표 장로님이 쓴 “이기는 습관”에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에 입사하던 첫날, 아버지 故이병철 회장은 마음의 지표를 삼으라고 이 휘호를 주었으며, 이건희 회장은 이 휘호를 벽에 걸어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에게 잘 듣고 있는가를 묻고, 더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영적 교만
영적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 큰 슬픔을 느낀다. 테레사는 이러한 현상을 빛에 비추어진 물이 든 잔에 비교한다. 해가 비치게 되면 해가 비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던 불순물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잔에 담겨 있는 물이 해가 비치지 않을 때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해가 비치게 되면 먼지가 가득함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의의 태양이 그것을 비추어 무수히 많은 불순물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잠 3:7, 사 5:21, 롬 12:3).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바르트가 그가 이제까지 깨달은 가장 위대한 신학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질문받았을 때 그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바르트는 그가 깨달았던 많은 위대한 지식에 대한 자랑을 거부하며 어린아이 같은 지식에 만족했던 것이다. 

 



기대하면 들립니다.
겸손하면 들립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지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을 수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성경 로마서10:17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13:9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편지에서 계속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2:7, 11, 17, 29, 3:6, 13, 22)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둘째, 20,21절입니다.

완악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경청을 잘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남의 말을 잘 들어줌으로 말씀하시는 분의 권위를 세워드리고 기분 좋게 해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내 가슴 속 깊이 새겨서 그 말씀으로 내 삶이 변화를 받고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브룩스의 고민|……──겸손
 

영국의 성경 번역자이며 유명한 설교가였던 필립 부룩스는 참지 못하 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고민하며 하나님깨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어떤 일을 참지 못하여 더욱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곁에 있던 분이 그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룩스 박사님, 오늘 따라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내게 있는 문제도 고민이지만, 더 큰 고민은 나는 급한데 하나님은 도 무지 급하시지 않는 것이요.` 그런 상황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급한 데 하나님은 잠잠히 계신 것만 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참지 못 합니다.

성경은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자기 육 체의 질병을 놓고 하나님깨 기도드렸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그 고난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이 만약 그의 몸까지 건강하였다면 불가능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의 가시로 인하여 겸 손히 주를 의지합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 의 축복임을 바울 사도는 발견하였습니다. 고난 속에서 들여 오는 주 의 음성을 듣습니까?

 서양 속담에 `세계는 인내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내 삶에 그렇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를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 살 것이냐를 결단해야합니다.
이 단계에서 어떤 사람은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습니다.
왜냐하면 결단하기 위해서는 버려야하고 내려놓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2:1-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람을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내가 너로 축복의 큰 민족을 이루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브람 때문에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먼저 아브람의 편에서 결단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온 땅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그 땅을 떠나야 합니다. 우르와 하란을 다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지역입니다. 그 땅은 우상숭배가 가득한 곳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새 백성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 우상숭배의 습관과 삶을 떠나야 합니다.
아브람이 그 곳을 떠나자 그에게 생겨난 새로운 습관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세기12:7, 8)

하나님 앞에 진정한 제단을 쌓기 위하여 모든 우상숭배를 깨끗이 버려야합니다.
여호수아24:14,15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무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끊이지 않는 싸움은 바로 이 싸움이었습니다.
옛날 섬겨오던 그 신과 신앙으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되면 이 결단은 필수입니다.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봉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교회에 다니셨죠?” 그는 약간은 놀라며 말했다. “네, 아이들과 다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자꾸만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아 그만 두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삶에 깊이 뿌리내리려면, 내 마음의 돌들을 거두어 내어야합니다. 버려야합니다.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셋째, 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 자요.”

결실하기 위하여 반드시 극복해야할 두 가지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염려’입니다.
염려를 믿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것입니다.(누가복음12:22)
우선 눈앞의 걱정 때문에 감히 영원의 세계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세상의 걱정이 정말 많은 사람은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기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란 사실입니다.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세상의 염려는 커다란 장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의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며 말씀하시기를 심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지만 굶어 죽지 않는 새와 길삼도 하지 않지만 입을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프리카와 북한에는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더욱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먹을 것이 충분하고 입을 것에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잘 먹고 입기 위하여 주일도 범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려고 할 때 내가 가장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은 혹시 예수 안 믿던 가정에서 예수 믿어서 가족들에게 피해라도 입힌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가 내 마음에 심어 놓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다가오는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 염려는 예수 믿다가 혹시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유혹할 때에 사단이 제시한 유혹은 “하나님처럼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에서 추방한 사람과 사회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시고 위대하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살면 이 모든 것을 은사로 다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원수들은 항상 이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 선 블레셋 군대의 대장군 골리앗이 그렇게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유다를 공격해온 아람나라 군대장관 산헤립이 그렇게 하나님을 모욕하며 유다 시민들에게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골리앗장군은 소년 다윗의 손에 죽었습니다. 산헤립은 하루 밤 사이에 몰살하는 자기부하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으나 결국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히브리서11:6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무디의 믿음|……──믿음

다음은 무디선생의 말이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믿음이
어느 날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뚝 떨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믿음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서 10장 17절을 읽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성서(말씀)에서 온다`는 말씀을 보고 지금까지 내가 성
서를 덮어 놓고 믿음을 위하여 기도했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성서를 공부하는 동안 내 믿음이 줄곧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하나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거룩한 욕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사탄이 다가와서 유혹한 것이 바로 이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4:8,9)
정말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어느 때인가 반드시 극복해야할 장애가 바로 물질적인 문제입니다. 돈의 욕심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면 반드시 무너지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이 장벽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생 도둑질하며 살다가 결국은 은 30냥에 스승 예수님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헌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젊은 부자인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생의 문제를 들고 찾아 나왔다가 결국 재산분제 때문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가서는 지금까지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것이 더 값지고 최선의 것입니까?
십일조헌금을 드리는 것은 모든 물질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어떻게 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믿음의 생활에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까?
그러면 과실을 많이 맺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말씀을 깊이 새기고 묵상하며 그 말씀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기 위하여 힘쓰십시오.
마음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