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감격 스런 탄생

가장 감격스런 탄성(누가복음 2장 25절~33절)|……──성탄 자료
 
가장 감격스런 탄성
(누가복음 2장 25절~33절)

■ 누가복음 2장 25절~33절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절) 내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절) 이는 만민앞에 예배하신 것이요
(32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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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發) 금융위기는 지구촌 곳곳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한결같이 무겁기만 하고, 언제 목젖이 보이도록 박장대소(拍掌大笑)했었는지 기억조차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더 어둡고 캄캄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B.C와 A.D가 교차되던 시대입니다.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라틴어, ‘그리스도의 해’)의 중심이신 그분이 탄생하던 그 시대는 칠흙같은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핍박을 당하던 백성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고, 가는 곳마다 냉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조차 저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침묵(沈黙)하셨습니다. 세속적 어두움과 영적 흑암이 무려 400여 년간이나 온 땅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이 같은 상황에 던져진 한 사람, 시므온이 등장합니다. 그의 별명은 ‘하늘의 위로(慰勞)를 기다리는 자’입니다(눅2:25). 그만큼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므온의 입에서 탄성(歎聲)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이 탄성은 감탄문 형태로, 사중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지금 지금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를 보고 주체할 수 없는 들뜬 음성으로 탄성을 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은 사람의 숫자에 칠 가치도 없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막10:13; 요6:9; 마14:21). 당시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예외 없이 율법(律法)을 쫓아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割禮)를 행하고(눅2:21; 레12:3), 아이를 낳은 산모는 성전에 나아와 제물(祭物)을 바쳤습니다(레12:6). 그런데 정결예식에는 원래 어린양을 드려야 하지만 부모가 너무 가난하면 비둘기를 대신 바쳐도 하나님께서 양해하시겠다는 예외규정이 있었습니다(레12:8).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부모는 비둘기를 가지고 나아왔습니다(눅2:24). 어린양 한 마리를 마련할 여력이 없어 비둘기를 들고 오는 이 부모의 사정이 얼마나 딱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새나 풍기는 분위기, 투박한 나사렛 사투리, 한마디로 부모나 그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나 촌티가 뚝뚝 흐릅니다.

말 그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아이였습니다(사53:1). 그런데 그런 아이를 보고 시므온이 환호하며 최고의 찬사(讚辭)를 보냅니다. 아이를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눅2:29-32). 그 아이가 ‘주의 구원’,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시 저들은 ‘팍스 로마(Pax Romana)’를 구현하던 로마의 황제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어떤 구원자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를 배신하고 은 삼십에 팔았던 이유는 자신이 기대하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도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왕을 찾은 이유는 왕은 왕궁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마2:1-2). 베들레헴 들녘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어느 날 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 이상한 징조(徵兆)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눅2:8-14)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했습니다(눅2:15-17).

그러나 이 시므온에게는 이런 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초라한 부모의 품에 안겨있는 그 아이를 보자마자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고 고백(告白)할 수 있었을까요?

시므온은 평소에 꾸준히 성전을 사모(思慕)하는 사람이었습니다(눅2;27).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니 그의 심령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었습니다(눅2:25; 마5:8). 이런 그에게 성령(聖靈)께서 임하셨습니다(눅2:25-27). 그리고 아기 예수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요1:29). 그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요1:31-32). 이렇게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니 메시야를 만나고 탄성(歎聲)을 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고전12:3).

예수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그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열두 살 되셨을 때에 성전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노(老) 율법학자들의 입에서(눅2:47), 산상승훈의 가르침을 듣던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마7:28-29), 갈릴리바다에서 풍랑으로 죽을 고생을 하던 제자들의 입에서(마8:27), 누워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마9:8), 성전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본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습니다(눅4:35-36).

이 탄성은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 사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 앞에서(막15;39), 부활 예수를 만난 여인들, 베드로, 방 속에 있던 제자들, 다메섹 도상의 사울, 이들은 한결같이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탄성을 자아냈다는 것은 내 삶의 현장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눈물과 고통과 한숨뿐인 이 땅에 ‘탄성(歎聲)’을 자아내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내 능력으로 불가능했던 일들이 현실화(現實化)됩니다. 그러니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약한 모습으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계십니다. 이 주님을 알아보고 만나는 귀한 은혜(恩惠)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내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나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참으로 어둡고 답답합니다. 막막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수금(竪琴)을 버드나무에 걸어놓은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시137:2). 눈물이 그치지 않고, 웃음지어본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입에서 ‘탄성(歎聲)’을 자아내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야말로 꿈꾸는 것 같은 일들이 우리 삼의 현장에 일어날 것입니다(시126:1).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감격스럽고, 멋진 탄성을 발하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