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쓴물

영혼의 쓴 물 (출 15:22-26)

[요약]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영혼의 쓴물이 있다. 그 쓴물은 죄악의 쓴물이다.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 하셨다. 죄만큼 사막의 독이 강한 것은 없으니 속히 회개하자. 그 쓴물은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다. 미워하는 자에게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다고 하셨다(요일3:15). 즉 미움과 분노가 사망의 독인 것이다.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있다. 두려움은 아직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좌절과 절망의 쓴물이 있다. 그렇지만 부활의 주님으로 충만할 때 산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 “영혼의 쓴물”이라는 제목입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그래왔지만 우리의 먹거리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먹을 것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몸에 맞지 않는 무분별한 외국 농산물의 수입과 아울러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과 제조과정에서 영양소의 손실 및 유해물질로 인해 음식이 아니라 독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어느 학생이 당뇨병 때문에 고민 중에 있다면서 상담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어른이고 젊은이고 아이고 건강에 큰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리스의 의성으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음식을 당신의 의사나 약으로 삼으라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의사도 고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젠 음식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되었으니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극물도 해독시킬 수 있는 여러 방萱?내셨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상식만 가지면 어떤 독도 중화시킬 수 있는 체질을 우리가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상식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면 우리가 간식만 먹지 않아도 우리 몸의 작용으로 일생을 큰 병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물은 있는데 독물이라 써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원망하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셔서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그 물이 달게 되어 온 백성이 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로 인해 물이 해독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 우리 영혼을 죽이려는 독물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영혼의 쓴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죄악의 쓴물이 있습니다.

겔18:20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했습니다. 이것이 영혼을 죽이는 죄악의 독입니다. 죄에는 사망의 독이 가득합니다. 죄처럼 무서운 독은 없습니다. 혹시 독약을 먹고 살아난 일은 있어도 범죄하고 죽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아담에게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범죄했으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 죄의 쓴물은 어떤 수양과 도덕과 선행과 고행과 어떤 종교로도 달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죄를 담당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화평을 가지시고, 스스로 나서지 말고 주님 안에서 이미 죄를 이긴 자라는 확신에 서시기 바랍니다. 늘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만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죄악의 쓴물은 깨끗이 해결 되는 것입니다.

2.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있습니다.

마5:2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그랬습니다. 마음의 분노도 죄라는 말입니다. 무슨 죄입니까? 살인의 죄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우리 영혼이 독이예요.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죽이는 독입니다. 그래서 요일3: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했습니다. 내가 용서 못하고 내가 사랑 못하면 내 심령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라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분노는 육체의 독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존 헌튼이 말했습니다.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박사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그를 비평하고 비난하자 그만 분을 참지 못하고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일본 오사카에서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개를 묶어놓고 개를 4시간 동안 때리며 괴롭혔습니다. 개가 바짝 독이 올랐을 때 그 개의 피를 뽑아 조사해 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습니다. 이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무려 80마리의 개를 죽일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는 실험결과입니다.

그래서 롬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했습니다. 내가 양보하고 화목했다면 100번 잘한 것입니다. 이 미움과 분노의 쓴 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나의 억만 죄악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 큰 죄를 용서하셨는데 나는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3.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있습니다.

잠7:22에 솔로몬은 말하기를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과 뼈를 마르게 하는 것이 근심 걱정 불안 공포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라고 하는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자기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이요, 넷째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두려움이요, 다섯째는 상상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여섯째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요. 일곱째는 홀로 있음으로 오는 두려움이라 했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경제적인 두려움, 관계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미군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공포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무려 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보이는 총과 대포보다 염려와 불안의 총에 맞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요일4:18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먼저 두려움은 형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맨 먼저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아직까지 형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떨쳐버리지 못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두려움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공포도 이긴 자입니다. 히2:14-15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당할 공포를 대신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서지만 않는다면 나의 미래는 남의 일 구경하듯 공포 없이 지나갈만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어디가 좀 아프면 안절부절 못하고 펄떡펄떡 뛰기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아프면 아픈 자리를 꾹 눌러주며 아픔을 10-20분만 느껴보세요. 그러면 뇌가 그것을 인식하고 모르핀보다 수백 배 강한 호르몬을 보내서 통증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이 앞에 와도 주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감사의 기도만 하시고 가만히 계세요. 중심에서 할렐루야가 나오고 하늘의 소망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4. 좌절과 절망의 쓴물이 있습니다.

습3:16에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실 것이니 좌절과 절망으로 팔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독인의 유명한 신학자인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하는 분입니다. 그가 17세 때 2차 대전 때 독일의 군인으로 징집되어서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서 영국에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완전히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가족들도 폭격에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이 준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 이야기를 읽고 그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몰트만 박사는 그 어둡고 캄캄한 절망이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희망이 온다고 희망의 신학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의 죽음이요, 주님의 사심은 곧 나와 내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승천은 나의 승리요 성공이요 영광이요 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주소는 지금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복음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고 굳게 서면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좌절과 절망은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예수 믿고 더욱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영육 간의 쓴물을 단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