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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은혜의 날이로다” (고후 6:1-2)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 ―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은혜라는 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또 특별히 은혜 받기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은혜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은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하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은혜에 대하여 먼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은혜란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받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하여 얻거나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랑을 강제로 얻고자 해서 그게 쉽게 얻어집니까? 사랑은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얻는다거나 빼앗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소유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사실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 이것은 ‘이미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받고 있다!’ 하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은혜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혹 받은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이것부터가 어디 보통 은혜입니까? 사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자라온 모든 것들이 다 은혜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삭이 된 소를 그 집 아들이 학교에 다녀와서는 멋모르고 들에 풀을 뜯게하려고 몰고 나온 것인데, 그만 들에서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낳자마자 송아지가 비틀비틀하다가 바로 일어섭니다. 일어 설뿐만 아니라 어미 소가 집으로 들어가니까 쭐렁쭐렁 따라서 들어옵니다.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어떻습니까? 제 발로 걸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려야 됩니까? 또 제가 제 힘으로 제 밥 먹고 제대로 서려면, 요즈음 같으면 한 30세 까지는 부모가 거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도대체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나는 받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 사랑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은혜를 부인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교도소를 출소한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 가운데, 자신은 지금껏 사랑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항변을 하더랍니다. 그 사람은 고아였고, 고아원에서 자라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범죄도 하고, 그래서 교도소에서 복무를 하고 지금 출소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없지요,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란 사람조차도 나를 낳아서 내버렸는데, 세상에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 이 목사님께서 조용히 듣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여 주었습니다. “아니, 내가 보기에 너는 남보다도 더 사랑을 많이 받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자식이니까 그래서 사랑하고, 젖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하면서 키운다고 하자. 그런데 너는 네 말대로 부모도 없는데, 그럼 네가 네 기저귀를 갈아 찼었느냐? 네가 우유병 챙겨서 먹었느냐? 네 스스로가 혼자서 자랐느냐? 봐라. 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너를 사랑해서 먹이고 입혀서 오늘이 있은 것이다! 또. 네가 언제 농사한 일이 있느냐? 그런데 지금까지 무얼 먹고 살았느냐? 그러고 보면 너는 남보다도 사랑을 더 많이 받은 것이지 않느냐?!!” 이 말이 이해가 되었든지 한참 울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그래요. 제가 자랐던 고아원의 원장님은 장로님이셨는데, 참 좋은 분이셨어요.” 그리고는 그 원장님께 우선 감사부터 하러 가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일어서더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세상에 사랑 안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사랑을 모르고 있고, 사랑을 부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받아들이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는 주도적으로―일방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고, 우리 쪽에서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을 비교해 말한다면, 율법은 내가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은혜는 하나님께서 내게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열어주신 길이 있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길―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다 지킴으로 우리의 의로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다가오시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고, 나는 오직 가슴을 열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바로 이와 같은 이해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은혜는 처음부터 거저 주시는 것이지, 내 공로나 내 의나 내 율법적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그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요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은혜를 받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은혜를 이렇게 받는 것이라고 할 때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바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그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사랑을 받는 자세!―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랑을 사랑으로 모르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사랑을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립니까?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을 하고, 그 깨달음이 그 다음에는 기쁨으로, 그 다음에는 감사하고, 그리고는 만족하여야 됩니다. 행복하여야 됩니다. 사랑에 대한 최고의 반응은 바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최고의 반응은 바로 기쁨인 것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은혜 받은 자의 생활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놓고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고, 그리고 자식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기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부디 행복해다오!―그것입니다. 행복한 것이 보답이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은혜에 대한 자세,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대하면서 수용적 자세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깊이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너무도 감사한 것입니다. 또 깨닫고 또 감사하고 또 만족하고 또 행복하고…… 바로 그것이 은혜를 받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은혜란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이것’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대게 처음에는 소중히 여기다가 마지막에 가서 교만해지고,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평생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니까요. 처음부터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내가 마땅히—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귀한 줄을 모르고, 소중히 할 줄을 모릅니다.
어떤 분이 자녀가 없었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마흔 셋이 되었는데, 기도의 응답인지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스물세 살에 낳은 것하고 마흔세 살에 낳은 것하고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같은 자식이지만 같지가 않습니다! 좀 안된 얘기입니다만, 자식은 한 마흔쯤 되어서 낳아야 정말로 귀한 줄을 압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자녀를 ‘낳는 것 자체’가 은혜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자식을 얻는다는 것’ 이것부터가 은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거저 주어진 것처럼―혹은 자기가 잘해서 된 것처럼―그저 자연스럽게 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과연 그런 것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은혜로 받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 있으니까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사실 무엇이든지 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이든지 재물이든지 자식이든지. 또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얻고 사는 것!…… 무엇이든지 깊이 생각하고 보면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은혜로 된 것이라고요. 나의 나 됨이―이것이 은혜라고 그는 알고 있습니다. 건강도, 우리 공부하는 것도,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은혜를 먼저 소중히 여길 것이며, 은혜 받는 자세가 좋아야 한다’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은혜를 받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헛되이 받지 말라!’―‘메 에이스 케논’이라는 이 원문의 뜻은 ‘목적 없이 받지 말라’하는 뜻입니다. 은혜를 우리가 사모합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해서도 은혜 주신 분의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지금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거기에도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어느 산에서 하는 부흥회에 가보았더니 철야기도를 하는데, 그저 밤새껏 똑같은 기도를 하더라고 합니다. ‘은혜 충만, 은혜 충만, 은혜 충만……’ 밤새껏 ‘은혜 충만’ 그러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래, 은혜 충만 해가지고 뭘 하자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대답이 이렇더라고 합니다. “돈 벌어야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돈을 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 중에 우리가 물질적으로 받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사람이 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목적 없는, 헛되이 받고자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정말 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 이러한 은혜를 주옵소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을 드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서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더 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지능이 탁월하고 용모가 출중하고, 많은 사람에게 아주 선망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운동신경이 좋아서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게다가 음악성도 아주 좋아서 피아노를 잘 치고, 노래도 잘하고, 그리고 춤도 또한 일류로 잘 추고… 그래서 사교계의 스타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 무엇이냐 하면, 알고 보니 보석도둑이었습니다. 많은 사교계 여자들하고 춤을 추면서 보석을 도둑질했습니다. 그걸 몇 년 동안이나 해왔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꼬리가 길어서 잡혔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 20년 동안을 징역살고 출옥을 하게 됩니다. 출옥하는 날, 기자들이 모여와서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보석을 훔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훔친 것입니다. 나는 부모님, 선생님, 많은 친구들, 많은 명사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재능도 건강도 기술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도둑질밖에 없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지난 일생을 후회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은혜가 목적이 있어서 먼저 내 성품에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내 인격 속에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내 윤리생활 속에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내 가치관 속에 은혜가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은혜에 사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사는 사람에게는 낙심도 없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를 바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요? 은혜 안에 살면서 깨닫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헛되이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사모하면서도, 또 은혜를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아무 것도 하는 일은 없다면――이것은 참으로 큰일인 것입니다. 받은 은혜로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인색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건강—우리의 물질—그 모든 것이 다 그 목적을 위해 바르게 헌신되며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헛되이 받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여러분 마음속에 꼭 새기고 실천하십시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무엇이냐 하면, ‘은혜의 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가 뭐냐 하면 ‘시간’이라고 하는 은혜입니다. ‘기회’라고 하는 은혜인 것이지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돈, 지식, 건강 다 있어도, 자본 다 가져도, 시간이 없으면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은혜 주어진 때다, 은혜 주실 때다!’ ― 여기서 ‘때’라는 말은 성경 원어로 ‘카이로스’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에 보면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하였는데, 여기서 ‘시기’라는 것도 바로 이 ‘카이로스’입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라는 단어와 ‘카이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시계를 보면 거기에 조그마한 글자로 ‘크로노미터’라고 쓰인 것을 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터’라는 것은 ‘측정한다’는 뜻이고, ‘크로노스’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라는 말인 것이지요. 여기서 측정한다는 시간은 ‘객관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고 있는 시계가 지금 재깍재깍 돌아갑니다. 내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멈추어 보아도 시계가 멈추는 것이지 시간이 멎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시간에 맞추어 가려고 하는데, 길이 막히든지 하게 되면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또 보고, 참으로 초조합니다. 이럴 때는 시계를 거꾸로 돌렸으면 좋겠다 싶지마는, 그런데 내가 돌린다고 시간이 돌아갑니까? 그저 시계 바늘만이 돌아갈 뿐인 것이지요. 바로 이 시간에 우리는 매여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끌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객관적으로 흐르는 그런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가 따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비해 ‘카이로스’라는 것은 ‘주어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시간’이라고 하기 보다는 ‘시기’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어느 일정한 기간, 기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돈 얼마를 맡겨주는 것처럼 시간 얼마를 내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앞으로 몇 년이든 간에, 몇 시간이든 간에, 그것은 내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 열려진 시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 내게 선물로 주신 그 시간이 ‘카이로스’입니다. 이 시간에만은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좁은 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문이 닫힌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여,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께서도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하겠지만, 그러나 문이 닫힌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십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내가 회개하지 못했고 은혜로 살지 못한 이상,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셔터가 내려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께서 들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기다려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열어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가능케 하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특별히 봉사하게 하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있을 때, 건강할 때, 알 수 있을 때,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때, 할 수 있을 때! ―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바로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딱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심판밖에 없습니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그런 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그래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면, 생전에 베풀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시간에 쫓기니까요. 참지 못한 것도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런고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것을 큰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심각히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 베풀 때, 내가 너희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하시는 때’―그 때가 언제인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의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로다”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날’이라고 하는 ‘한계적 시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은 그저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시간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카이로스’―이 기간이라는 것은 사실상 변함없이 흘러가버리는 ‘크로노스’들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계속 시간은 흘러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여기에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은혜 베풀 때’를 ‘바로 내게 주어진 은혜의 때’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지금은” 하십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구원이나 은혜를 ‘내일의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일은 은혜이고 오늘은 고통이고, 오늘은 시련이고 내일은 은혜의 날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은혜의 날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때로 우리는 현실이 아닌 미래, 오늘의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다 더 나은 환경이 오면 그때에 열매를 맺자. 그때가 은혜의 날일 것이고, 오늘은 이렇게 어렵지 않으냐? 아직 아닐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세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현실―이대로가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는 ‘바로 지금이 은혜다’ 하는 뜻입니다. 다른 미래의 그 어떤 때―형편이 더 나아지는 그때가 아니라, ‘지금 이것, 오늘 이 자체가 은혜다’ 라는 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오늘은 아니고 내일이다, 나는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이런 불만입니다만, 오늘의 말씀을 보세요. ‘이대로, 오늘 이대로, 현실 이것이’ 은혜의 날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드린다고 하는 이 자체가 바로 은혜의 때요 은혜의 시간이며, 우리가 처한 이 환경이 이대로가 최대의 은혜의 날입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사는 오늘이 최고로 행복한 날입니다. 최고로 크게 열린 은혜의 문입니다. 이 오늘을 우리는 살아가며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에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또한 앞으로 하겠다고 미루지도 마십시오. 문제는 오늘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여건 이대로를 극치적 은혜―최고의 은혜―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큰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간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최고의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오늘이―바로 지금이―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로다!’――항상 현재적으로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계속적으로 최고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오늘 하루―그런 우리의 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에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을 생각할 때 어떻습니까? 사실 오늘이 제일로 행복합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요사이가 제일로 행복한 때입니다. 이같이 감격스럽고, 이같이 은혜스러운 시간! ― 최고로, 오늘이 가장 큰 은혜의 날로 기억될 수 있는 ‘매일매일’!!――그것이 바로 은혜로운 생인 것입니다!!
이 은혜 속에서 기쁘게, 가장 큰 은혜로 주신 오늘임을 깨달으며, 믿음으로 매일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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