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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상반절)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행하신 행적과 말씀들을 기록한 것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이 중에 ‘공관복음서’라고 불리는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보면, 오직 일곱 가지만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일곱 가지만을 간추려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이 요한복음을 기술하려는 목적이 단순히 사건들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성경 중에서도 제일 늦게 기록이 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된 배경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중 하나인 요한이 말년에 에베소에서 목회하게 되는데, 그 당시는 예수님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이미 순교를 하든지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따라서 친히 예수님을 대면했던 제자로서, 예수님을 뵙지 못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줄 필요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공관복음서가 오래 전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자가 병이 나아서 이제 건강을 되찾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와 같은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사건 하나 하나를 선별해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나, 5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등등의 일곱 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써,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는 38년 된 환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명절이란 바로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중요한 세 절기를 지키는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로서―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은 이 절기 때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절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절기가 바로 유월절인데,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빈부의 차이가 지금보다도 훨씬 심해서 시골은 원시생활 그대로였고, 도시는 크게 발전을 해서 지금도 당시의 유적들을 보면 그야말로 굉장한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아마도 예루살렘도 굉장히 번성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기 때마다 올라온 시골사람들이 여기저기 들뜬 기분으로 구경들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이런 떠들썩하고 들뜬 잔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한 환자를 만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삶으로 인해 소외된, 영적으로 병든 한 여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일부러 그 곳으로 찾아가서 만나시며 치유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한 이어서 오늘 베데스다 이 연못에,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의 병으로 인해 소외되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든 자를 일부러 찾아가셔서 그를 만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물론 외로운 사람들이 많겠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환자는 가장 외로운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38년 동안을 병으로 인해 이렇게 이 연못가에서 지내고 있는 이 사람의 형편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렇게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을 주님은 조용히 찾으셨고, 만나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베데스다’란 이 연못의 이름은 ‘베스’라는 말과 ‘에스더’라는 말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로서, 히브리어로 ‘베쓰’는 ‘집’이며 ‘에스더’는 ‘자비’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인 ‘벧엘’은 ‘베쓰’와 ‘엘’―‘엘’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고,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이 됩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집’이란 이런 이름을 가진 연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은 특별한 전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하고 그 전설의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여러분이 자세히 보시면, 3절 하반 절부터 시작되는 바로 이 구절은 괄호를 하여서 기록하고 있고, 거기 난외주에 보면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고 밝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그 부근에 살고 있어서 이와 같은 전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왜 여기 환자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지’ 금방 알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전설을 알고 있지 못한 타지의 사람이나 후세의 사람들이 읽을 때에는 이 성경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교부들이 본문의 의미를 잘 전달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설명하는 말을 삽입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사가 내려와 목욕을 하면 물이 동한다는 전설이 있고,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움직인다’는 이 전설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연구해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과거에 이 연못에서 온천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면서 물이 울컥하고 올라오면 물은 빙빙 돌면서 소리를 내게 되는데, 그것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천사가 내려와서 목욕을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드는 환자는 어떤 병이든 나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전설이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물이 움직이는 순간 가장 먼저 뛰어드는 ‘한 사람’에게만 병이 낫는다는 인색한 조건이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병이 잘 낫지를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픈 사람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이런 전설을 가진 연못이기에, 이렇게 수많은 환자들이 연못가에 천막이나 움막을 지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는’하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찾으신 이 환자는 38년 동안이나 앓아 누워있는 장기환자입니다. 이 사람은 가족까지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홀로 외롭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마다 그저 마음뿐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막연히 누구인가 도와 줄 것을 기다리며, 별로 희망도 없이 누워있는 그런 형편입니다.
여기서 이 베데스다 못 가의 실제 형편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적 삶의 형편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매 끼니때마다 식사준비를 하는, 또 생리적 현상을 해결해야 하는, 그 분잡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치열한 생존경쟁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 처음 어떤 병자가 이곳에 오게 되면, 처음 만났으니 서로 인사도 하겠지요.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 느니, 이곳에는 얼마나 오래 계셨느냐 느니, 그 동안 몇 사람이나 나았느냐 느니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서로가 적대하는 경쟁의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혹시’ 하는 생각에 경계하게 되고, 적대관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혹시 그 사이에 하는 생각에 화장실에도 제대로 가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자리에 대한 다툼도 치열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여기 있던 사람이 나았더라’ 하면 그 자리가 바로 명당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가면 곧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가 다투며 야단이었겠지요.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원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고, 반면 차지한 사람은 은근한 자랑과 함께 늦게 온 다른 사람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오만으로 차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 이 38년 된 환자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38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입니다. 명당이란 명당은 다 차지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남이 먼저 뛰어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가 나으면 축하해 주고픈 생각보다도, ‘너 때문에 내가’ 하는 생각에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원통함과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보면 이 질문은 참으로 이상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환자가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일진대, 어이없게도 낫고자 하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환자의 대답도 동문서답입니다.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에는 “네, 낫고 싶습니다.”라든지, 또는 “한 번만 걸어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자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하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넣어줄 사람이 없음을 원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간 사람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하고 질문을 하셨는데, 바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고 있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이 물음이야말로 ‘대단히 의미가 깊은 물음임’을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바로 ‘동화성’이라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별로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우리 모두의 형편이 다 그랬으니 그때를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요즈음도 어쩌다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그 때 처음 들어가면 냄새가 고약하고 눈이 따갑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지 않은 냄새라도 계속 맡으면, 견디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짓기가 무섭고 두려운 것이지, 두세 번 거듭되면 바로 이 ‘동화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나중에는 죄책감도 없이 쉽게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또 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야단을 치면 ‘누구도 그랬고 누구도 그랬는데 왜 나만 그러느냐’고 대뜸 그러지를 않습니까? 또 어른들도, 우리가 청문회 같은 데서 자주 듣는 변명의 말이 있습니다. 소위 그런 일은 하나의 ‘관행’이었다고 말이지요. 이 처럼 동화성이 있어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자꾸 면역이 되고 ‘불감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둔하여져서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얼버무리게 됩니다. 이렇게 불감증이 되면, ‘역사적으로 죄 없는 시절이 있었더냐’고 나의 죄를 일반화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는 이 질문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저 무감각하게 동화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인간의 모습―참된 신앙인의 모습―그것을 늘 새롭게 하도록 만들어 주는 이와 같은 질문을 우리는 늘 마음속에 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환자의 경우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계속 누워있었음으로 인해 이제는 누워있는 것이 습관화되고 체질화 되어버려서, 내가 꼭 일어나야 하겠다는 바로 그 생각마저도 희미해지거나 아예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앓았다고 할지라도 ‘낫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토록 이루지 못했다 해도 소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물음은 진정 그를 다시 일깨우는 귀한 물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항상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가 정말로 낫고자 하느냐?”
이제 다음으로, 예수님의 이 귀한 질문에 대한 환자의 반응을 깊이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환자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환자는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성경 원어그대로 ‘I have not a man.’―‘나는 한 사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도와줄 그 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개 고독한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한사람도 없다”하면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나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내가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38년 된 이 환자의 경우도 보세요. 내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이 환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환자의 대답을 다시금 분석하며 생각해 보세요. 이 환자는 ‘나를 도와주는 그 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들어가려 했으나 저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 동안 소위 명당이라고 하는 자리는 다 차지해 보면서 애써왔지만 ‘그러나 저 사람이 먼저 들어가버렸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환자는 자기 자신의 경우만을 오로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나아야 하는데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낫지 못했다고 하며, 그래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이 사람이 원망하면서 말하는 ‘그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그 사람도 바로 ‘그렇게도 자기 자신이 낫기를 원하고 있는’ 같은 환자이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원하듯이, 그 사람 또한 나처럼 바로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은 지금 나는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자기중심주의’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시고, 다시금 이 환자의 대답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오늘 이 환자는 ‘내가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 없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서 ‘내가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좋은 친구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친구가 없지만, 내가 좋은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친구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구하기에 없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든 고독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이 환자의 대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다’라는 말은 미신적인 신앙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환자에게 직선적으로 “오래 누워있더니 정신까지 돌았구나.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쓸데없는 미신을 이제 버려라”하시며 그의 잘못된 응답에 책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의 잘못된 소원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잘못된 소원과 간구들까지도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이해해 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그 환자의 깊은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여기서 바로 이 장면을 우리는 또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하는 바로 그 환자의 대답에 대하여 “내가 넣어 주겠다”하는 말씀 대신에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38년 동안이나 누워있는 환자에게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말은, 얼핏 잘못 이해하면 조롱하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 환자는 38년 동안이나 걷기는커녕, 일어나지도 못하여 누워만 있는 환자입니다. 평생 동안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다른 아무런 외적 조치도 없이―‘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는데, 과연 그 말씀에 그대로 일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환자의 요청과는 전혀 다르게 응답하신 바로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이 듣는다면 모욕적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누워서 지낸 기간이 38년이나 되는 이 환자가 ‘일어나라’는 말씀을 듣고 그냥 그대로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 그의 위대한 믿음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 불만을 가지고 “나를 정말로 불쌍히 여기시거든 다른 소리 일랑 하지 마시고, 내가 원하는 대로 물이 움직일 때 물 속에나 넣어주십시오”하고 투덜대듯 대꾸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환자가 지금 요구한 것은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물속에 넣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원한 것이고, 이것이 그가 가진 소원이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밀어 넣어주는 것!! 그런데 바로 이 환자가 가지고 있는 이 소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과연 물이 동할 때에 밀어 넣어 주는 것!―이것이 그의 궁극적인 소원인 것입니까? 여러분! 궁극적 소원은 바로 그가 낫는 것입니다!! 그런데 38년 동안이나 이렇게 지나다 보니까, 바로 그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구에 ‘그의 요구대로’ 응하지를 아니하시고, 궁극적인 바로 그 대답을 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어떻게 듣고 있으십니까? 기도하며 소원한 대로 이루어진 것만 응답이며,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응답이 아닌 것입니까?
나는 가지고 싶은데 오히려 주라고 하시며, 나는 가고 싶은데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해도, 그 말씀을 응답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응답에,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이며 응답인 것이기에 이것을 깨달으며, 내 기도와는 전혀 다른 응답에 오히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위대한 신앙인 것입니다!!
나는 평생 예수를 믿었지만 한 번도 기도의 응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했던 방법이 아니라고 해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연못에 들어가는 것이 응답이 아니라, 내가 나아서 일어나 걷는 그것이 궁극적 응답인 것입니다. 낫기를 원하면서도 내가 원했던 방법이 아니라고 해서 ‘일어나라’ 하실 때 일어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을 영영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의 간구―우리의 소원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세요.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25년 동안이나 긴 세월을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년에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시자 그만 ‘픽’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소원은 있었지만, 그 소원을 이루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방식대로의 응답’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네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실 때, 창세기 15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의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충복인 엘리에셀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네 몸에서 난 씨라고 하시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하갈이라고 하는 첩을 두어서 그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네 아네 사라의 몸을 통해서 낳는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사라가 이제 늙어서 전혀 생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서, 하나님의 방식에 의심하는 답답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38년 된 환자는, 비록 자기의 요구와는 너무나도 다른 우리 주님의 응답이었지만, 그러나 일어나라는 말씀에 의심 없이 자리를 들고 일어서는 위대한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주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38년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40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사실 따져보면, 애굽을 떠나는 해와 또한 가나안에 도착한 해를 제외하면, 광야에서의 생활은 38년이라는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38년 동안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매며 지치고, 때로는 포기하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정말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느냐?” ― 오늘 본문의 경우로서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오늘 우리들도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환자의 경우를 나의 경우에 대입하면서, ‘네가 진정으로 낫고자 하느냐?’―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시면서, 항상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지금 소원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주께서 내게 주시는 대답을 바르게 이해하며 깨닫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기도에 주시는 주님의 그 대답에, 이제는 바르게 결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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