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따라 행하라

본문 내용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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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따라 행하라” (롬 14:19-23)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 마지막 절에서 우리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하시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 말씀은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게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원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소극적인 의미의 죄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렇게 ‘하지 말라’한 것을 범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바로 이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같이 읽은 바와 같이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 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하고도 깊은 의미를 가진 실제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의를 추상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다――말하자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의요, 살인하지 않는 것이 의요, 도적질 하지 않는 것이 의요, 간음하지 않는 것이 의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 보세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까?!!

   또 살인하지 않는 것도 그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셨는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살인’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살인’인 것입니까?  실컷 때려주고 상처를 입혀도, 죽지만 않으면 살인이 아닌 것입니까?
   우리는 ‘죽일 살’자와 ‘사람 인’자를 써서 살인(殺人)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성경 히브리어 원문대로는 ‘죽이지 말라’입니다.  그러니까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살생하지 말라, 생명을 사랑하라!――그러면서도 소를 잡아먹고 양을 잡아먹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이 법일진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듯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나, 율법에 대해서나, 의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설명할 때에는 아주 쉽고 이해도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생활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에 부딪힐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의가 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하고 결혼할까요?” 하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결혼은 신앙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 사람을 섬기고 수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기도할 줄도 알고, 교회 봉사도 하는 그런 사람하고 하면 좋겠다”―아마도 우리는 이와 비슷하게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Mr. 김하고 결혼할까요?  아니면 Mr. 박하고 결혼할까요?”―이렇게 물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이처럼 추상적 진리를 우리의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진리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이해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의를 이루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의인가?’ ―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그것이 의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그것이 의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우리 믿는 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표준을 가지게 됩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의 양심에 있어서 의로워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의로워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온전하게 합쳐져야 온전한 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양심으로는 이것이 옳은 일이에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를 않아요. 그러면 의로울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과연 어떠할 것입니까?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옳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단코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로 보시는가?’ 하는 이것은 다른 두 가지 표준에 대해 우선하는 절대적 표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원하신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시는 결과’를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께서 이렇게 원하신다’ 하면서, 죄 많은 우리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또 자기의 의를 스스로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 우리 죄 많은 인간들은 흔히 궁여지책으로서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다’하고 강하게 항변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방어의 수단으로써 하나님을 둘러대는 경우들이 많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우리 사람의 입으로 말하는 이 같은 주장을 절대적 표준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옳고, 나 자신의 양심을 보아서도 옳고, 이웃에게도 옳다고 인정을 받는 이 세 가지가 다 온전히 합쳐져야만 온전한 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의인가?  무엇으로 우리가 죄에서부터 구원받는 것인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21절에 “아름다우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22절에 보면 “복이 있도다”―복되도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23절 끝에 가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믿음으로 해야 한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교훈을 우리가 본문에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실제적 행위의 규범’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아름다우니라’하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아름다운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21절에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성경원어로는 ‘칼로스’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선하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우리는 아름다운 일, 선한 일을 찾아가야 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고민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옷차림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옷차림에 대해 우리는 나의 취향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상가(喪家)에 갈 때에는 복장을 어떻게 하십니까?  또 왜 그렇게 하십니까?
   결국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아름다우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 만약 어떤 분이 깃털과 요란한 꽃장식이 달린 휏션(fashion) 모자를 쓰고 왔다고 해보십시오.  물론 자신이야 아무런 관계가 없겠지만, 뒤에 앉으신 분들의 시야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남의 눈에 거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특별히 먹는 문제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든가, 포도주를 마시든가,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우상에게 드렸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우선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우상에게 제사 드렸다고 해서 그 제물에 우상의 이빨자국이 났나?  우상이 어디 있어, 헛것일 뿐이야.  고기는 그저 고기일 뿐이고, 음식은 음식일 뿐이야.  아멘, 하고 먹으면 되잖아?” ― 이런 사람은 아주 자유롭고 거리낌이 없이, 자신의 믿음 강함과 담대함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상에게 제사 드린 제물을 먹는 것은 바로 우상의 제사에 참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볼 때는 “아니, 저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구먼.  어쩌자고 예수 믿는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나?”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있은 일입니다.  이제 갓 예수 믿게 된 청년하나가 어느 장로님 댁에 심부름을 갔는데,  마침 거기에 목사님과 장로님 몇 분이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 장로님께서 중국에서 최상급의 보이차를 구해왔다고 하면서 이 차를 권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잔 더 드세요, 한 잔 더 드세요’ 하고 말이지요.
   이 청년이 그 말을 저만치서 들으면서 ‘아, 목사님이나 장로님도 자기들끼리 모일 때에는 서로들 술 한 잔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무얼 마시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장에서 회식하면서 자기들끼리 늘 하던 대로 서로들 한 잔 더 드시라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그래서 큰 시험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거리끼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요 선한 일인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무슨 돈을 꼭 줘야만 구제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분명히 죄이지만, 그러나 결혼잔치에 참예했을 때에 신부가 예쁘지 않아도 신부가 너무나 예쁘다고 말하는 그런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런데도 보면, 나는 솔직하고 사실대로 말하는 성격이라고 하면서 “아유, 신부가 왜 저모양이지? 나이가 얼마야? 이게 두 번째 결혼은 아니야? 보아하니 늙었구먼!”――뭐 이런 얘가 하는 것이 다 선이 못되는 거예요.  결혼식에 가서는 무조건 신부가 예쁘다고 하는 것예요.  다른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음식을 먹을 때에, 남들이 맛있다고 하면 나도 같이 맛있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남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데, “김치가 이상해”하면서 꼭 그것을 지적해내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선이 아닙니다.  거리끼게 하는 것 아닙니까?  좋은 분위기에다가 돌을 던지는 거예요!

   따라서 좋은 분위기에다가 돌을 던지는 것 같은 행동, 다른 사람에게 거리끼게 하는 말은 하지 말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부담이나 걱정이나 오해나 근심을 줄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이야기는 하지 말 것입니다! ― 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형제로 거리끼게 함이 마땅치 않다, 거리끼지 않도록 하라!
   거리끼게 하는 일이 형제로 죄짓게 하는 것이 되고, 형제로 오해하게 하는 것이 되고, 형제로 실족케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남의 믿음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런고로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지 모릅니다!

   여러분,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한다고 하면 먼저 무엇보다도 그 영혼을 사랑해야 되고, 그 인격을 사랑해야 되고, 그 사람의 세계관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깊이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를 좋아하면―그를 사랑하면―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좋아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얼굴도 좋고, 그의 말하는 것도 좋고, 그의 옷 입는 것도 좋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헤어스타일도 좋고, 그 사람의 목소리도 좋아요.  또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옷 입는 것도 좋고, 넥타이도 좋아요.  다 좋아 보이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존경하게 되고 좋아지면 ‘거리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일부러 거리끼는 일만 골라가면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일 없이 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이것이 선이요, 이것이 아름다움이다!――이렇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웃과의 바른 관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기서 ‘만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라는 단어입니다.  가정법에서 이 말은 ‘사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아니해서 다른 사람이 실족하지 않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먹지 않을 것이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얼마든지 먹어도 되지만―그러나 그까짓 거 가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손해를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안 먹을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 이 얼마나 강한 표현입니까?

   정말 다른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무엇이든지 참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끊겠습니다!!’―이러한 높은 결단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복되다’ 하고 말씀합니다.  22절에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것이 복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하지마는 그렇다고 자기의 믿음을 무작정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을 저버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성경적으로 옳고, 논리적으로 옳고, 체계적으로 옳다. 합리적이고 신학적이다!―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확신을 먼저 가지고 있고서야, 양보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희생하기도 하고 한걸음 물러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양보도 아니고 희생도 아닙니다.  그저 비겁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옳다. 이것이 옳은 일이다.’―이 같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사도 바울처럼 그들을 위해서 내가 한 걸음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확신이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대적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한테도 거리낄 수가 없어요!!  누가 비난하든 말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확실하니까요!  ―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는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바!―이것은 확신입니다.  그런데 당장은 이것이 오해를 받을 수 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
   우리가 때때로 어린아이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모를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그러나 언젠가는 너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실히 믿고 있다.” ― 이와 같은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왕좌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무엇인고 하면, 우리는 결단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양보할 수 없는 것과, 반면에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 바로 이 양자에 대해서, 그 차이점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양자를 결단코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경건의 내용과 경건의 형식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경건의 내용!―이것은 결단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어떤 경우, 어떤 형편에서도 결단코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건의 형식! ― 이것은 얼마든지 변하는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변하고 문화에 따라서 변하고….  그런데 변할 수 있는 형식 이것에 집착하며, 마치 그것이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라도 되는 양 고집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쉬운 예를 들어서, 이것이 좋은 예가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제가 어렸을 때에는 예배당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서 들어갔습니다.  우리 한국이나 일본 같은 문화에서는 집안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서 들어가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신발을 신고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하기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지금 신발을 신고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집안에 들어갈 때는 아직도 신발을 그대로 벗으면서 말이지요.

   또 어떤 교회에 가보니까 예배당에는 모두가 신발을 신고서 들어가는데, 유독 이 강단에는 신발을 벗고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대신 슬리퍼들을 갖다 놓고는 그것을 신으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저도 만성이 되어서 그냥 신발을 벗고 슬리퍼도 신습니다만, 제가 처음 한국에 나왔을 때는 하도 이상해서 그 목사님께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 강단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하나같이 대답하는 말씀이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하였지요.  “그러면 이곳 강단은 거룩한 곳이고, 저기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곳은 거룩한 곳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신발을 벗고, 저기서는 신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시더군요.
   더더욱 이상한 것은 슬리퍼를 신는 것입니다.  슬리퍼는 신발이 아닌 것입니까?  거룩한 곳이라고 하면서 신발을 벗으려면 다 벗을 것이지, 슬리퍼는 왜 신습니까?  게다가 그 슬리퍼는 제가 심방 다니면서 보니까 모두가 집안의 화장실에서나 신고 계셨습니다.  보세요. 화장실에서 신는 것을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하면서 신고 있다면,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을 보니까 구두를 신고는 그 위에 천으로 만든 덧신을 신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정쩡한 거예요.  여기에 확실한 신학적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기는 벗어야겠고, 그게 좀 이상하니까 슬리퍼를 신고, 구두를 신고는 그 위에 덧신을 신고…… 확실하지 못한 까닭인 것입니다.

   자고로 모양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도 있고, 서서 기도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달라지는 거예요.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도 있고, 손을 위로 들고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형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세운 기준에서 책망을 받지 않아야지요.  기준이 없어서도 안 되고, 우왕좌왕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 분명한 진리! ― 이에 비하여 그 형식! ― 이 둘의 차이를 우리는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믿음을 따라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믿음은 율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가 구원받았어요!  그 거룩한 은혜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며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 우리의 수고, 우리의 희생! ― 이 모든 것이 다 은혜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와 같은 것들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한다면, 사실 그 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입니까? ― 이것으로 충분할까? 혹 조금 모자라는 것은 아닐까? ― 그래서, 한다고 하면서도 또한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도 고귀한 보혈을 흘려주셨다!  나를 위해서 그 모진 고초를 다 받으셨다!  그래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 이 같이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찬송가에서 늘 부르는 것과 같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 하고도 더하고,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한 것뿐인 것입니다!!

   구속받은 자의 감격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오늘도 그 은혜로 살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 내가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의가 되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이렇게 삼가고, 이렇게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이렇게 정직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공로가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죄인이에요. 언제나 부족해요, 언제나 완전하지 못해요 ― 그런 가운데서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이 같은 믿음에서 떠나면, 다 죄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먹고, 이 믿음으로 삼가고, 이 믿음으로 사랑하고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를 위해 내가 봉사하면서도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감사하지요.
   희생을 할 때에도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가 있고, 이런 시간이 있고, 이런 계기를 주님께서 만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무릇 희생도 특권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순교도 특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순교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이런 간절한 마음, 아주 겸손한 충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 행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봉사하기도 합니다.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베푸신 그 은혜를 깨달아, 그 은혜가 동기가 되어, 그래서 믿음을 따라 하는 것만이 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행하시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