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찬송

본문 내용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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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찬송” (행 16:16-25)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에는 여러 가지 고통과 재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인생을 고해(苦海)와 같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들 가운데서, 그것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대로 참고 견딜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 다른 사람의 악의에 의한 모함이나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배신에 의해 받게 되는 그런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고난을 받는 경우도 많이 있게 마련인데, 이런 경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또 어떻게 그런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꼭 그런 경우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이지요.
   사실 사도 바울은 어디에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순탄하게 교회를 세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핍박과 고난을 당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 25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당했던 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하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그 내용들을 계속하여 열거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하여 받게 된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빌립보에서 받게 된 고난은 어떤 면에서는 좀 다른 이유 때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그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또는 우상숭배 문제라거나 해서 복음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사건이 있어서 핍박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여기 빌립보에서의 핍박은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아주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로 인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바울이 당한 많은 고통 중에서 가장 애매하고 가장 부당한 일로 당하는 고난일 것입니다.  다른 데서 고난당한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무조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고, 차꼬에 채웠다고 합니다.

   차꼬에 채웠다는 것! ――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칼’을 씌운다 해서, 두꺼운 널빤지로 길쭉하게 만들어 죄인의 목만 끼일 만큼 구멍을 뚫어가지고 거기에 죄인의 목을 끼워 고정시키는 형틀이 있었습니다.  이 ‘칼’을 쓰고 옥에 갇히면, 눕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므로 고통이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차꼬’라고 하는 것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구멍이 다섯 개입니다.  거기에 목과 두 팔목과 두 발목을 끼우게 됩니다.  그야말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과 실라를 바로 이 차꼬에 채워서 가두고는 지키라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재판도 없었거든요.  죄목도 메기지 않았어요.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매를 치고, 무슨 죄로 감옥에 가두는지 명분이 없었습니다.  구실을 잡고야 때리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죄목이 들어나지 않았으니 말하자면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는 으름장으로 실토케 하는 그런 취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도대체 매는 왜 맞는 것이냐 하는 이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는데, 점을 침으로 그 주인에게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 준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가 길을 지나갈 때마다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고 말이지요.  여러 날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귀신들린 여자이거든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야 얼마나 좋은 전도이겠습니까?  그러나 정신이 나간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정말이지 이건 복음에 대한 큰 훼방이요 모독인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심히 괴로워합니다.  결국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외치니, 그 즉시 귀신이 내쫓기고 온전한 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귀신들려서 정신병자였던 사람이 온전하여졌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하면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끌고 갑니다.  더는 이 여종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란을 떠는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에 한 인격이, 동물이 아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 하나 미치든 죽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게 돌아오는 이익, 그것만을 생각하며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실 보면 모든 이기주의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물질주의자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질과 이기심에 취하고 말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남편도 안보이고, 아내도 안보입니다.  자식도 안보이고, 친구도 안보입니다.  오로지 돈 벌 생각뿐입니다!  다른 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오직 돈에만 눈이 벌겋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중국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금방(金榜)에 젊은 사람이 하나 들어왔는데, 금덩이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더니 다짜고짜 집어 들고는 달아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러니 금방 붙잡힐 수밖에요.
   사람들이 야단을 칩니다.  “야 이놈아, 벌건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도 훔쳐서 도망가는 놈이 어디 있다더냐? 도대체 너는 어찌된 놈이냐?”    그랬더니 대답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금덩이를 보고 있노라니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있었을 때 거기에는 거기에 따르는 배경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또한 있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여종의 주인들을 보세요.   정말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이었다면, 자기의 여종이 성하게 된 것을 보고는 사도 바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오히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아무 것도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어요!  다만 손해난 것만 가슴 아픕니다.  ‘바울 때문에 손해났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소란을 떠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하는 말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하고 말이지요.  이들이 하는 말은 선교학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일깨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풍속’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또한 남의 풍속을 해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란 문화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선교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들고, ‘어느 문화’에 들어가든지 ‘그 문화의 옷’을 입고 오직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건축양식이나 심지어는 예배의식까지도 그 문화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당시를 회상해 보세요.  파란 눈의 선교사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네 조상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겠습니까?  눈알은 새파랗고, 얼굴은 하얗고, 머리카락은 노랗고, 키는 멀쩡하니 크고, 코는 주먹만큼 크고……
   이런 사람들이 와서는 문화의 장벽을 넘기 위해서 갓을 쓰고, 담뱃대까지 물고 다녔어요.  기다란 담뱃대까지 물고 나귀를 타고 전도하려 다녔어요.  세월이 조금 지나간 다음에는 당나귀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자전거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양귀신 왔다면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이런 판국이니 저들이 얼마나 애를 많이 썼겠습니까?  그래서 예배당도 초가로 기역자도 짓고,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우리의 문화에 어긋나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양학(洋學)이라고, 우리의 풍습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박해를 하였습니다.  정조임금의 그토록 총애를 받던 다산 정약용 선생 같은 분을 ‘양학에 심취한 자’라고 하면서 귀양까지 보내지 않았습니까?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전래된 기간이 우리보다도 100년이나 앞섰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기독교를 서구 문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해도 많이 했지요.  그래서 일본의 교회는 아직도 부흥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저들은 바울이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지 풍속을 전했습니까?  그런데도 풍속이라고 탈바꿈시킵니다.  기독교를 정치적인 문제로 돌립니다.  그래서 핍박을 합니다.
   우리가 늘 걱정하는 북한도 보세요.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유민주주의의 앞잡이라는 것이지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기독교를 복음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무리가 소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고 하면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선동이 되어서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죽여라, 실라 죽여라’ 하고 저들은 소란을 떨었습니다.
   오늘도 선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지 않습니까?  비근한 예로, 소위 광우병 쇠고기 사건을 보세요.  촛불을 켜들고 야단들이었습니다만, 그게 다 거짓 정보를 조작하여서 선동한 결과들이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군중들을 보세요.  바울과 실라를 끌고 가서는 매를 쳤다고 합니다.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군중심리적인 감정의 격함이 항상 이 같은 엄청난 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애매한 고난이 바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있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경우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억울한 고난이요 애매한 고난이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고난입니다.  이런 매도 맞아야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마디의 변명이 없습니다.  ‘왜 때리느냐, 좀 알아보고 때려라, 재판장을 만나자, 시장을 만나자’ 하고 따질만도 한데, 그저 온유하게, 겸손한 가운데 매를 맞습니다.
   사실 날뛰고 있는 그들 앞에서는, 그와 같은 말을 해본들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 보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하고 말씀하십니다.
   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매를 맞을 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그런 경우에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따질 것 다 따지고는 매를 맞으려고 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데 뭐라고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똑똑해가지고 자꾸 따지거든요.  시어머니가 “너, 또박또박 자꾸 그렇게 말대꾸할 거냐?”하면 “말대꾸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합니다.  그러노라니 더욱 악화만 되어가게 마련입니다.
   ‘이치’라고 하지만, 여러분, 이치란 보는대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각도가 달라요.  며느리가 보는 각도와 시어머니가 보는 각도가 다른 것인데도, 그것을 두고 이치를 따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모름지기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각도가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먼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일의 부당함만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바로 거기에서 또 한편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유가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고—부당한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이유가 없는 것입니까?
   바울이 지금 매 맞는 순간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부조리한 매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지나간 다음에 생각해보세요.  어떻습니까?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습니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는 확고한 기틀을 잡게 되지 않습니까?

   내 생각에는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어요!  내 좁은 생각에는 부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우연이지만, 하나님께는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잠시잠깐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해서 따지고…  그래서 말이 많아지는 거예요!!
   따지기로 든다면 나한테만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저쪽은 저쪽대로 얼마든지 할 말이 있어요!  싸움하는 것을 보세요.  양편 중 어느 한 쪽이 말이나 구실이나 논리에 있어서 밀리는 것을 보셨습니까?  똑같이 핏대를 세우며, 똑같이 언성을 높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구실이 다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나만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여기에 더 큰 이유가 하나님 편으로는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이 주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유대사람들은 보통 사람을 때릴 때에 율법에 있는대로 사십에서 하나를 감합니다.  태형 마흔을 넘기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입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매를 많이 맞은 것 같아요.
   사실 매를 맞는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 않습니까?  태형이라는 것이 유대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그런 율법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는 빌립보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율법이 없습니다.  이건 정말 인정사정 없어요.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거예요.  사십에 하나 감하는 것도 없이 50도 좋고 60도 좋아요.
   아마도 바울과 실라는 이 때 매를 아주 많이 맞은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기절했다가 밤중에야 겨우 깨어난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 맞고 혼절해 있다가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몸은 얼마나 쑤시고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바울과 실라는 바로 그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깊은 밤중에 조용히 찬송을 합니다.  그 찬송 소리를 온 죄수들이 듣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바로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정신을 잃은 채 옥에 갇혔다가, 정신이 깨어날 때 몸이 쑤시고 아픈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보세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순간에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였다!―여러분,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는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때린 사람, 그 형편없는 인간들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쪽으로 생각하면 그저 억울하고 분할 뿐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같이 ‘생각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해요!  하나님께로 향해서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 생각나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중에 당하는 고난이거든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그런 사건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생각하기 시작한 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렇게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아마도 바울은 특별히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돌을 들어 쳐서 스데반을 죽일 때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내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는데, 나는 비록 지금 매를 맞았지만 그러나 아직 죽지는 않았어요.  순교하던 스데반의 그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그 때의 길이 환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사도된 다음에 복음을 전하느라고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거기에 가담하고, 그리고 발악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으로 떨어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이 나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강권하여 붙드셔서―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으셔서 내가 사도가 되었고,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고……  그러니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영광된 매를 맞고 이제 죽는다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냐!――감사,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매를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감옥에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이대로 죽는 것도 감사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지금 한밤중에 그 아픈 가운데서도 이렇게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물론 오늘 본문 그 다음에는 이 찬송의 결과로 옥문이 흔들려 활짝 열리고, 차꼬가 다 풀어지는 기적이,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모든 형편을 살피시며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며 깨달아야 할 중요한 점은, 바울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 감옥 밖으로 나가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리라고―그런 기적을 기대하면서 찬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 이 형편 이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이지 무슨 일에든, 어떤 형편에 처하든, 항상 온유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인데, 나는 더 위대해져야 할 사람인데 하면, 매사에 불평과 원망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쓰셨어요.  지금까지 여기저기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만족해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게 됩니다.
   대체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시에 부르던 찬송은 시편입니다.  시편에 곡을 부쳐서 우리 조상들이 시조를 읊듯이 읊조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때 시편 23편을 읊조렸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아마도 이렇게 여러 시편의 찬송을 기억나는 대로 불렀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시련 속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도 미워할 것 없어요.  뿐만 아니라 절망할 것도 없어요.  낙심할 것도 없어요. 좌절할 것도 없어요!  오로지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궁극적 하나님의 심판과 우리에게 주실 그 상급을 바라봅니다.  바로 이 소망으로 인해 이렇게 감사하며, 찬송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아무 것으로도 우리는 참 평화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사선(死線)을 넘어서, 요단강 저편 저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참으로 많은 모함과 누명도 많이 쓰셨지만, 그러나 항상 평안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화를 내겠다, 절망하겠다,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잠을 못잘 것이다 싶은데도 그 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비결을 물어보았더니 그 분이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당신이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성경 마지막 장을 믿으면서 살아갑니다.”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성경 마지막 장―요한계시록 22장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환상이 거기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그 비젼이―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평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바로 이 같은 비젼을―이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본의 어느 아주 작고 가난한 교회의 목사님의 아내가 마흔네 살인데, 악성 폐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44일 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집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혼자 예배드리면서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가 책으로 출판이 되었는데, 거기 죽기 바로 이틀 전에 그녀는 이런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내 신음이여, 내 찬미의 노래가 되어라.
    내 괴로운 숨결이여, 내 신앙의 고백이 되어라.
    내 눈물이여, 내 노래가 되어라.  주님 찬양하는 내 노래가 되어라.
    내 열이여, 땀이여, 내 숨결이여,
    최후까지 내 구원의 주를 찬양할 노래가 되어라.”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고도 그 죽을 지경에서, 그 억울함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생각할 것입니다.
   참으로 한밤중의 찬송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의 찬송입니다.
   형통하는 날이 아침이라면, 이 고난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밤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깊은 밤에서 정말 거룩한, 깨끗한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낮에 멀리 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밤에 멀리 보지 않습니까?  이 세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 가장 멀리 있는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더 밝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참으로 소망적인 찬송을, 바울과 실라처럼 우리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