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의미

문 내용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문 내용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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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의미” (갈 1:1-10)


   오늘은 10월 마지막 주일로서, 492주년을 맞이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바로 우리 기독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새 출발을 시작한 날이  바로 오늘 이 종교개혁 주일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서 흔히 ‘개신교’ 혹은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Protestant 또는 Reformed Church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로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이 말! ― 그 당시는 로마 천주교회의 권위를 반대하고 저항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라고, ‘반대하는 자, 저항하는 자’라고 하는 좋지 않은 의미로 불렀던 이름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추종하던 사람들은 그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받아들여서, 스스로도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게 된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에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크리스티아노이―크리스찬’이라고 처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말! ― 좋은 의미로서 불렸던 명칭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제 동무들이 저를 ‘예수쟁이’라고 놀리곤 하였는데, ‘크리스찬’이란 바로 그런 의미로서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듯 불렀던 명칭인 것입니다.
   그 때 동무들이 ‘예수쟁이’라고 놀렸지만, 교회에 다니던 우리들은 그 같은 놀림에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였습니다.  “그래, 우린 예수쟁이야”하고 말이지요.  그러면 놀리던 애들이 금방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쟁이인 우리들이 공부도 훨씬 잘 했고, 음악이든 미술이든 모든 면에서 우리가 훨씬 더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고 있었고 또 그렇게 불리는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하는 것! ― 또 초대교회 당시에 ‘크리스찬’이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것은,  제가 어렸을 시절 ‘예수쟁이’라고 놀림을 받던 그런 정도의 상황에서 불림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놀림’ 정도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교’의 상황―‘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에서 불린 이름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무도 저를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제게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가서 유치장에 갇히거나, 매를 맞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파문’을 받는 것이며,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였던 것입니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들이 가슴에 노란별을 달고 ‘유대인’이라고 불리던 것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이라고 불리고 노란별을 단 후에는, 강제수용을 당하고 아우쉬비치 같은 곳에 끌려가서 무참히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인이 되는 것은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생적인 것으로서,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 ‘크리스찬’이라고 불리는 것!  또한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것은 완전히 자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믿지 않을 수도 있었고, 또 부인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부인만 하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부인해버려라’ 하는 회유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찬’들은 그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신앙을 지키며――불에 타 죽고,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매달리면서도 ‘나는 크리스찬’이라고, 크리스찬이란 그 이름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도 “오직 믿음으로”라고 외치며, 종교적 특권을 반대하고, 로마 카톨릭교의 전통이나 낡은 유전과 권위의식에 대하여 정면으로 항거하며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자랑스럽게 갔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당시 생사권을 가지고 행사하던 권력의 중심인 교황청을 향하여 이처럼 항거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몇 해 전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 때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하던 그 현장에 서서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그 위대한 저항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힘을 믿었기에, 이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가?  하고 말이지요.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그 힘의 근원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이었던가?

   먼저는 ‘철저한 믿음에서 나온 힘’이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와 또한 그들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처럼 거짓과 불의에 대해 항거함에 있어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떤 돈의 힘이나 무력의 힘이나 권력의 힘을 의지하였던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 안에서 그처럼 힘 있게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으며, 그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있는 자아의식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요즈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단어중의 하나가 바로 ‘개혁’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또 모든 정파에서 저마다 ‘개혁’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개혁’이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저 ‘개혁’이라고 하는 것을 ‘바꾸는 것, 변화시키는 것, 옛것을 치워버리는 것’―이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가 쉽다는 말씀입니다.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 의미는 ‘원래의 것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Re-formation!!
   사실 그렇습니다.  ‘종교개혁!’하면 로마 천주교회에서부터 갈라져 나와서 새로운 교파를 만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살펴보면,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거기에 보면 사도들에 의해서 드려지던 예배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 의해서 드려지던 예배! 사도 요한에 의해서, 야고보에 의해서 드려지던 예배!  사도 바울에 의해서 드려지던 예배의 원형을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어디 카톨릭교의 ‘미사’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까?
   거기에 어디 ‘향’을 담아 흔들고 ‘성수’라고 하면서 뿌리는 모습이 나타납니까?
   성경을 보세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성찬과 세례를 행하며,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되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나 직접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하고 있지;  어디에 사제에게 고하여서 대신 기도하고, 예수님께 직접 기도하기가 어려워서 그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대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해주는 원래의 교회는, 성경이 말해주는 원래의 신앙은, 성경이 말해주는 원래의 예배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서적 이 본래적인인 것이 중세의 교권주의를 거치면서 너무나도 잘못된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기에, 이것을 본래의 신앙으로—본래의 교회로—본래의 예배로 되돌린 것이 바로 종교개혁인 것입니다.
   만약 ‘변하는 것, 바꾸는 것’ ― 이런 것이 ‘개혁’이라고 한다면, 사실 요즈음의 세상처럼 빨리 변하는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즈음 변하고 있는 것을 한번 보세요. 세상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사람도 변합니다.  그래서 ‘세대차’란 것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오고 있지 않습니까?
   대학생이 고등학생과 세대차를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좀 우스운 말로 요즈음은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차가 있다고 그러더군요.

   이렇게 급변하는 세대에서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급변하는 속에서 ‘진실을 지키고, 자기 위치를 지키고, 인간됨을 지키며, 특히 바른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이것일 것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그래서 아는 중 모르는 중에 벌써 의미가 바뀌어졌고, 본래의 목적에서 떠났습니다.  그런고로 첫 사랑으로, 첫 마음으로, 첫 동기로,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 re-formation인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개혁한다고 해서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 복음에는 둘이 있을 수 없고, 복음은 영원히 오직 하나입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복음을 변화시켜서 다른 복음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나와서 이 복음을 혼란시키며 미혹케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원래적인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그 변화에 휩쓸려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성서적, 본래적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철저한 믿음에서 나온 힘이 그들로 하여금 본래적 신앙으로 되돌리는 일을 확실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성서적 ‘본래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 누가 이렇더라 누가 저렇더라 할 때마다 갈대처럼 이단 사설로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이 확실할 때, 그 신앙에서 무한한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개혁자들은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보장이 되신다고 믿었으며, 동시에 자기들이 하나님께 확실히 서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를 때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분명히 서 있다고 확신한다면,  여기서 무서운 힘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개혁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그 힘! ― 그것은 바로 ‘자유의 힘’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구원을 해방이요 자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과 진노에서부터 해방되며,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직 구원 받은 자, 다시 말해서 자유인만이 위대한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내가 그 일의 주인이 되어서 자유롭게 일하는 것과,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저 마지못해서 해야만 하는 종의 경우에서 일하는 것! ― 이 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분명히 있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언제나 종 된 자는 힘이 없습니다.  종 된 자는 비능률적이요 비창의적이며, 아무 일에든지 무능하고 무지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이지요.  그런즉 죄를 지어서 양심의 가책에 눌려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겉으로는 그럴듯한 소리를 내며 큰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혹 내가 한 일들이 언론에, 혹은 무슨 청문회니 하면서 들어나게 될지 몰라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부정과 불의와 거짓에 쌓여서 ‘이래서는 안 되지’라고 스스로의 가책에 매이면서 짐짓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비겁하며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리석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사함을 받는다는 것!  죄에서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용서의 확신’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루터는 한번은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교통이 편리할 때가 아닙니다.  로마에 한 번 간다고 하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큰 순례의 길입니다.
   이 ‘스칼라 산타’라고 하는 성당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에 올라가셨다고 전해지는 계단이 있습니다.  스물여덟 칸으로 된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입니다.
   이 계단은 기독교를 국교로 공포하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그분은 믿음이 아주 좋은 분이셨는데,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동안에 이것을 뜯어다가 로마에 가져와서는 이 스칼라 산타 성당 안에다가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가보면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이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예배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건물을 지어 놓고는 한 가운데에 그 계단이 놓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기도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  심지어는 연옥에 있는 죄인까지도 여기서 그를 위해 대신 기도해주면 구원을 받는다고 그렇게 당시에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터가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추면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올라갑니다.  자기의 모든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말이지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다 올라와 보았는데, 그러나 그 마음속에 확신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몇 번이고 오르내려 보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 때에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어떤 전광과 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무릎으로 기어오른다고 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오직 은혜로!―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바로 그것만이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고, 그것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복음에 대해 이 같은 확신이 없는 경우, 결단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루터가 가지게 된 이 같은 확신은, 후에 그가 종교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협박과 위험 속에 있었지만, 참된 진리의 길에 서 있는 믿음이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용감히 개혁의 길을 계속하여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브롬스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을 때에도 “여기 이 브롬스 거리의 모든 지붕에 있는 기왓장의 수보다도 더 많은 원수마귀들이 나를 에워싼다고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다!  오,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래서 그가 지어 부른 찬송에 그 내용이 나타납니다.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죄 사함을 얻은 확신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그 깊은 사랑만을 믿는 신앙에서, 개혁자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자유란 곧 ‘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의롭다함을 얻은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고, 의인의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용기도 지혜도 없는 것입니다.  죄인의 용기라고 하는 것은 그저 헛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있어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오직 거짓된 것이고, 간사한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오직 의인만이 그 의로 인한 창조적인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의 힘이었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바울은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기적인 노력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할 때는 언제나 비겁해지고 초라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를 위한다고 할 때에는 무서울 힘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세요.  여자는 약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육체로서의 여인은 확실히 약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불타서 자녀들을 위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인은 매우 강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기만을 위할 때에는 자기의 양심도 그를 후원하지 아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겁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한편 남을 위한다는 이것도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솔직히 바로 그 대상 때문에, 때로는 무척 피곤해지며 실망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기도 하며, 어제는 그렇게도 죽자 살자 하면서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든 사람과 다투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관계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남을 위한다는 그것도 사실은 큰 힘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확실한 긍지를 가지게 될 때, 우리 인간은 최대의 능력을 타나내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내 걸었던 슬로건을 보세요.  그들의 목표는 “오직 믿음으로”―“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살면서,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믿고 일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힘과 용기를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이 많고, 또 하나님을 등지며 원수 되는 일들도 많고, 혹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분명치 못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을 그저 막연히 그대로 따라가며 살게 되면, 그 일들로 피곤하며, 만사에 좌절과 공포가 따르며, 무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러한 일을 내가 하고 있다면, 그는 무서운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설혹 죽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확실하다면, 어찌 그 죽음인들 슬퍼하며 주저하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이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으며, 그들의 수고와 희생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명확하게 알고, 또 믿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는 용기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초대 교회의 그 신앙의 기초 바로 그 위에서, 그리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간 개혁자들의 그 전통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자들의 그 신앙과 그 믿음의 용기를 다시금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혁자들은 내 편에 서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진리와 의가 주는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써 그 모든 불의와 거짓을 항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그 개혁자의 뒤를 잇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 개혁자들의 그 믿음을 이어받아서 오늘과 이 시대를 승리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