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구원

본문 내용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Content

“율법과 은혜와 구원” (롬 7:1-6)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우리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면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종교개혁이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부터 이탈하여서 새로운 그 어떤 교회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원래의 교회의 모습이,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하여 변질된 것을 개혁하여서,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본래의 신앙으로―본래의 교회로―본래의 예배로 되돌린 것이 바로 종교개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서 주창된 슬로건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오직’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이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기에, 그 무엇에게도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는 바로 이점에 있어서 아주 철저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당시에 신문 사회면에 크게 보도가 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교 집안의 청년과 기독교 집안의 처녀가 서로 연애를 하고는 결혼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양가에서 종교가 다르다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뜻을 이루지 못한 이 두 남녀가 유서를 써 놓고는 자살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는 계절이었는데, 이 사실이 뉴스로 보도된 직후에 조계사 정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의 기쁨”이라고 하는 커다란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아마도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파장을 계산하여서 그와 같은 현수막을 내 건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월 초파일에, 교회 정문에 ‘부처님이 오심은 어떻고’ 하는 그런 종류의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 기독교는 자고로 ‘너무나 배타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또한 사실 그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진리의 문제’요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바로 이 점에 있어서만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는 것이 결단코 통하지 않는 절대적 신앙관을 갖는 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비로소 주장된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진 바 의나 공적이나 다른 그 어떤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일 뿐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세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원리이며,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그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모두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확실하게 우리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과의 관계로서 설명하여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법적인 관계’로서, 우리로 하여금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적 관계’라는 말을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시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정죄를 한다는 말은 ‘카타크리마’란 말이 성경 원어에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 그리고 증언 등등의 필요한 절차들을 다 거친 다음에, 재판장이 마지막에 선고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재판장이 죄가 있다고 하면 죄가 있는 것이며, 사형이라고 하면 사형으로, 그리고 죄가 없다고 하면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법적 관계’라는 말입니다. ― 재판의 판결!!
   그러므로 ‘정죄함이 없다’라는 말은 ‘법이 죄가 없다’라고 선언했다는 의미입니다.  판결이 나고, 재판장이 선포를 하고, 책상을 두들겼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법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은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율법과 은혜의 부분으로 양분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 ― 이 양자는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율법은 하나님의 왼 손이요, 은혜는 하나님의 바른 손이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실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을 키울 때에도 보면, 너무 엄격하게 율법만 따져도 잘못되고, 그렇다고 너무 은혜만 베풀어도 버릇이 없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은혜와 율법, 이 두 가지가 다 똑같이 균형 있게 적용 되어야, 그 속에서 바른 인격이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율법과 은혜의 중간 상태를 말하거나, 혹은 율법과 은혜 이 양자 간의 조화를 요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 이 둘을 동시에 다 완성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만을 생각하고 은혜만 강조하게 된다면, 이제는 방종하게 됩니다.  사실 아이들도 부모가 그저 오냐오냐만 해 주면 그만 버릇이 없어지고 말지 않습니까?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면 그만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죄라는 것을 별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그로 인해 방종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제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죄를 짓겠느냐는 의미의 물음을 앞에 두고 “그럴 수 없느니라”하는 말이 거듭거듭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반대로 율법을 강조하고 나면, 이제는 절망하게 됩니다.  지켜야할 법을 못 지켰으니 이제는 모르겠다는 심사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며, 그래서 스스로를 포기하게 되는데, 사실은 이것이 더더욱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율법과 은혜의 동시적 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이 다 같이 성취되고 완전히 계시된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율법대로 완전히 충족되면서, 은혜는 은혜대로 완전히 채워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 진리란 참으로 설명하기도, 또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과 은혜! ― 이 양자는 우리가 보기에 서로가 대립이 되는 모순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강조하면 은혜가 죽어버리고, 은혜를 강조하면 율법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둘을 어떻게 동시에 충족되는 것으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런 맥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혼인관계’를 비유로 하여서 ‘율법과 죄와 은혜와 구원’에 관한 이 문제를 설명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내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인 바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법으로 매인 바 된 아내’란 말은 ‘표현된 그대로’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인권적인 면에서 매였다거나, 혹은 어떤 감정으로 매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남편에게 매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남자에게 매인 바 된 아내는, 일반 모든 활동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단 한 가지,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법적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고 하는 노골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또한 남편은 아내에게 철저히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 남자에게 한 여인이, 또 한 여인에게 한 남자가 매인 바 된 것이 결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말썽들입니다.  결혼이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다 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법적으로 붙들려 완전히 자유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대로 매여서 사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매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그래서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매이는 것이 결혼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철저히 매인 바가 되는 것이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매이는 것이 결혼인데, 이 매임을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음녀요 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매여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 매임에서부터 구속받지 않고 자유할 수 있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적나라한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다름 아닌 남편이 죽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단지 옛날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죽으면 결혼서약을 한 것이나 혼인신고 같은 모든 법적인 매임이 풀어지게 되고, 그래서 원한다면 재혼을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자유할 수 있다는 말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인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법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자유로운 것이며,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거나 몸을 허락하면 그것은 간음이며, 간음은 죄이기에 곧 죽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엄한 율법에 의한 것으로서,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을 경우에는 돌로 쳐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변명도 용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엄격한 시대에 남편에게 철저하게 매여 있는 여성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러나 일단 남편이 죽게 되면 그 여자는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남자를 만나도 상관이 없으며,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혼인관계 자체’를 우리에게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바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서, 이 혼인관계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남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한번 짓고나면 그 후로는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감정, 우리의 의지, 나아가서는 우리의 사상까지도 완전히 노예가 되어, 전부가 죄스럽고 병리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벌써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죄에 매여 죄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사실은 죄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라 나를 건져 내랴”(롬 7:24)하시며, 죄에 끌려 다니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이렇게 탄식하시거늘,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간은 철저하게 죄에 매여 있는 것으로, 이는 마치 한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매인 바 된 것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남편’이란 바로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였는데 살인을 했고, 도둑질하지 말라 하였는데 도둑질 했다. 그러므로 너는 죄인이다.’하고 율법이 그대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가책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제 그 결과로 우리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데, 하나는 회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차라리 반항하는 자세로서―반항하고 변명하다가 끝내는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의 관계란,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낙심하고 절망하며, 결국은 자기를 포기해 버리는 타락과, 자기 학대의 무서운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 누가 두렵다 하여도, 양심을 포기하고 자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소위 막가는 인생이라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 되고 맙니까?  양심도 없고 도덕도 없으며, 윗사람 아랫사람, 감옥도 없으며 지옥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한 가책 때문에, 아예 자기를 파국으로 몰고 가면서 되는대로 마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노예로서, 방탕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남편’이란, 율법에 매여서 변질된 죄인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율법주의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노예가 된 결과로서 은혜를 모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향하는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 줄로 알고, 그 외에는 길이라고는 없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의롭게 무엇인가 공로를 좀 세워야지 하는 마음입니다.

   이 율법주의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칫 빠지게 쉬운 함정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뒤에는 율법으로 끝내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되도록 잘 믿어 보려고 성실하게 살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은 물론, 금식기도도 하며 열심히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 부터인가 예수는 없어지고 율법만 남아서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열심을 자랑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의 공로, 자기의 수련 등에 의해 죄 사함을 받겠다고 하는 보상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상까지 받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 은혜와 예수는 멀리 사라진 것이란 말입니다.
   사실 솔직하게 생각해 보면, 믿음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적인 함정으로 빠지게 되는 것! ―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이제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내겠느냐?’하시며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힐책을 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들을 두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는 모두들 주신 바 은혜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잘 믿어 보겠다고 애쓰는 사이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율법주의자가 되어 은혜로부터는 멀어진 채, 지금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대로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조그마한 의를 행했다고 교만해 지는가 하면, 못했다고 하면서 벌벌 떨며 괴로워하는, 절망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에 “그런 네가 무슨 천당 가겠다고 그러느냐?”하며 옆에서 유혹하며 박수치고 있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내겠느냐는 다짐을 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로 시작하여 끝까지 은혜로 나가지 못하고 이와 같은 율법주의에 빠지게 될 때,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남편’이라는 비유에는 ‘죄’와 ‘율법’과 ‘율법주의’라고 하는 세 가지의 ‘남편’이 있겠는데, 문제는 그 ‘남편’으로부터 자유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이 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하려면 그 죄의 값을 지불하는 ‘죽음’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금,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원칙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율법을 다 지키는 길입니다.  다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킬 수가 없다고 하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따라서 다음 두 번째는, 그 율법이 주는 형벌을 다 받는 길입니다.  그 형벌이란 결국 ‘죽음’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야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 전 우리는 직전 대통령이 각종 비리에 연유되어 검찰에 불려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적용되던 모든 기소 내용이 ‘대상 없음’으로서 정지되어 버리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죽을 때에 형은 정지되는 것이며, 율법은 나와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으므로 율법에 매이는 것이며, 또한 율법에 의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할 때에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한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 또한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죽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혹 그 누구처럼 스스로의 죽음을 택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의 법에서는 정지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 심판까지도 정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심판의 정죄 앞에 서게 될 뿐인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그 분은 바로 이 점을 미쳐 깨닫고 있지 못했기에,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대답이 바로 ‘대속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나를 완전히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에 내가 법적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르틴 루터는 기도를 할 때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종 시에까지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가겠느냐?” 하는 마귀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하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죽으신 십자가! ―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내 영혼이 죄에게서 죽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과의 관계에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거기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죄에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므로, 내 죄가 거기 달려서 죽었으므로――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괴로움과 고통이 있으며, 가책과 나약함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여 있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거기에 누가 달려 있습니까?  예수님만 거기에 달려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보세요!  거기에 내 죄가, 나 자신이 달려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까?!!

   진정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죽어 율법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활을 시작했다면, 이제는 꿈을 꾸어도 그리스도의 꿈을 꾸며, 앉으나 서나 그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면서 그 은혜에 충만한 생을 삶으로,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말씀하신 그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었고, 율법과 죄와는 완전히 결별하였으며, 지난날의 모든 것은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낡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의 새로운 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옛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래서 완전한 자유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바울이 표현하시는 대로에 의하면 나를 얽매고 구속하던 옛 남편인 죄와 율법과 율법주의는 모두가 다 죽어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성경에서 표현하시는대로 예수님과 새롭게 혼인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나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매달려 돌아가셨으며, 그 십자가에 나는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 가운데서 더욱 힘차게, 더욱 더 그 은혜에 감사하시면서, 믿음으로 승리의 행진을 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