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내용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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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수 1:7-9)


   얼마 전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만났었는데,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지만, 모처럼 만나서인지 헤어지기가 아쉬워 모두들 술집으로 이차를 가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찬이라서 술을 마시지 않으니 여기서 먼저 헤어지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합니다.  “야, 너 예수 믿는다고 하니 참 따분하겠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하고 말이지요.  오늘과 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지 않고, 또 담배도 피우지 않고 춤추려도 안다니고, 크리스찬이라서 우리들처럼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며 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넌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니 행복하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에 있어서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우리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고  보람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입니까?!!

   어제 신문에 보니까, 폴란드의 바르샤바 동물원에서 남녀 자원 봉사자가 동물 우리 안에 갇혀 전시된 사진을 싣고 있었습니다.  바르샤바 동물원측은 “인간도 동물이며, 동물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런 이벤트를 마련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생물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동물 중에서 척추동물, 포유동물 ― 그 중에서도 ‘영장류’라고 분류를 합니다.  그런데 원숭이와 침판지 같은 동물들도 다 이 영장류에다가 함께 분류를 합니다.
   우리 인간을 이렇게 동물이라고 그런다면, 그러면 다른 동물들과는 어떤 면에서 더 가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의 타고난 모습 때문이겠습니까?  신체적 구조가 우수하기 때문이겠습니까?

   우리나라도 그 동안 국력이 신장하여서 많은 국제경기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를 비롯해서 수많은 대회를 개최하였고, 또 얼마 후면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도 개최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 대학교의 어느 교수님께서 모 일간지의 칼럼에서 이런 자조적인 글을 쓰신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이 ‘우리 사람들끼리만 견주기에 다행이지, 만약 동물들 전체가 모여서 경기를 한다고 하면 과연 우리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일까?’ 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떨 것 같습니까?
   신체적 조건으로 보면, 아마도 동물들 중에서 우리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제일 약한 쪽에 속할 것입니다.

   ‘우사인 볼트’라고 하는 사람이 금년에 열렸던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에서 100미터와 200미터, 그리고 400미터 계주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하늘 말에 의하면, 100미터 달리기를 처음 출발 스타팅과 중간 스퍼트, 그리고 마지막 결승점, 이런 식으로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 지금까지의 가장 기록이 좋은 것들만을 종합해 보았더니, 앞으로 극히 과학적으로 훈련하고 최대의 역량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100미터 달리기를 지금의 기록에서 겨우 0.04초 이상을 줄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얼마나 빠릅니까?  거북이나 늘보 같은 동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동물들이 우리 인간들보다도 빨리 뜁니다.
   높이 뛰는 것도 그렇지요.  세계 신기록이라고 그래보아야 자기키의 두 배를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벼룩 같은 것은 무려 60배를 뛴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수영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물개와 과연 견주기나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싱크로나이즈 같은 물속에서 여럿이서 춤추듯 하는 경기도 있는데, 멸치 떼의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면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어쩌면 지혜의 면에 있어서 우리 인간의 가치를 논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그게 또한 그렇지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가장 머리가 좋다는 사람으로서 영국의 호킹이란 물리학자를 흔히 얘기합니다.  비록 희귀병에 걸려서 전신을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지능만큼은 가장 뛰어나다고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햄버거 값이 얼마인지도, 자기 나라의 수상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가 아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반면에 내가 아는 것을,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그는 천재란 말을 듣습니다.  어떻게 보세요?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모든 것을 다 잘 알면 오히려 바보취급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저 한 두 개만 깊이 알고 다른 것은 잘 몰라야 오히려 천재란 소리를 듣는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들 가운데도, 천재적 소질이 있는 분들이 참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인간의 이 외양이 아름답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동물들을 보면 그저 옷 한 벌로 평생을 지냅니다.  물론 털갈이를 하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기온에 적응하기 위한 것뿐이지,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그저 같은 한 벌 옷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아름다운 동물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시시때때로 바꾸어 입어야 하고, 그러고도 별로 빛이 나지를 않습니다.  TV에서 하는 패션쇼라고 하는 것도 보니까, 제 눈에는 그저 모델들이 딴 동물들의 옷을 벗겨 입고는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갖는 사회성이, 또는 우리 인간의 사랑이나 우애나 신뢰성이 우리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겠습니까?
   사회제도라면 개미나 꿀벌의 사회가 훨씬 더 훌륭합니다.  몇 천 년이 흘러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해방 이후 60년 동안에만도 벌써 몇 번째 공화국입니까?  그러면서도 또 다시 헌법을 바꾸자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우애나 신뢰나 사랑은 어떠합니까? 
   부부간의 사랑만 하더라도, 동물의 세계엔 평생을 한 눈 팔지 않고 해로하는 쌍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거창한 예식에다 서약까지 하고서도, 다투고 헤어지고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엔 불신이 있고 배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적이다’  ‘인간적이다’하는 말을 쓰곤 합니다만, 그러나 실재의 현실을 보세요. 오히려 이 말을 바꾸어 써야 할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세요.  먹이를 위한 것 외에는 살상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깡그리 말살하려고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또 싸움의 양상도 동물의 세계에 비해 훨씬 더 처절합니다.  어느 동물도 두 패로 나누어서, 서로 맞서서 누가 이기나 하고 싸우지를 않습니다.  씨를 말리는 집단학살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무참히 살육하는 전쟁을 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집단학살을 합니다.  베트남에서, 르완다에서, 옛 유고 연방에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십만의 시체가 길바닥에 뒹굽니다…!
   도대체 누가 인간적이고 누가 동물적인 것입니까?  어떤 면에선 우리 인간이 가장 잔인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을 보면 또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건강 면에서 보더라도, 어떤 분을 보면 정말 근육이 대단하고, 배의 복근에 임금 왕자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을 늘 자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그만 맥을 놓고는 침대에 눕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보면 다 무엇인가 모자라는 게 있고 부족한 게 있고, 아픈 데가 있고 약한 데가 있습니다.  저 사람 정도면 아무런 근심도 부족함도 없을 거라고 여겨지는 사람도, 막상 그 사람한테 가보면 여전히 걱정이 있고 부족한 게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사람도 완전치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풍성하지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강하지도 못합니다.  아름답지도 못합니다.  부족합니다.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신뢰할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도 허약하고 부족하기만 한데, 무엇이 인생으로 하여금 가치 있는 것이 되게 해 주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주어져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사야 41장 10절에도 같은 뜻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강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부족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는 결단코 강하지도, 아름답지도, 풍성하지도, 신뢰할만하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약할 수밖에 없고,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지혜! ― 오늘 우리는 소위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낸 그 공포에 떨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제도! ― 그것은 사악한 모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존재일 뿐입니다.  또한 동시에 가장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이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린 강하고, 아름답고, 풍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진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 인간 속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리는 대림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우리는 이같이 대림절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의 의미를 우리 마음속에 깊이 다시금 새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에서 만약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모나리자’라고 하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그냥 벽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방탄유리 속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도 없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 앞에 모여들기 때문에, 몇 십 분씩 기다려야 겨우 그 그림 앞에 서서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 그림은 어떤 여인의 초상을 그린 것입니다만, 그 배경에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배경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서, 그 그림에서 모나리자만 빼버리고 배경의 풍경화만 남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그 그림의 가치는 당장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낙원이 뒤에 있다고 해도, 주인을 잃은 낙원은 더 이상 낙원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에덴’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상향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욕심과 경쟁이 없는 곳, 궁핍과 근심이 없는 곳, 부끄러움과 질투가 없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이 파라다이스도 거기서 주인을 제거한다면, 그 모나리자를 빼버린 그림처럼 삽시간에 삭막한 광야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에덴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름다운 동산과 화초가 있지만, 이 그림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 속에 탄생된 아담도 하와도 ‘주인’은 아닙니다.
   에덴의 주인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그 동산에서 부인되었을 때, 그 동산은 어떻게 되어버리고 말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여러분, 깊이 깨달으셔야 합니다.
   인간인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떠난 나! ― 무엇입니까?  어떤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낙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경 제일 마지막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거기엔 신부같이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의 풍경이 나옵니다. 
   열두 보석으로 건조된 성곽과, 생명수가 흐리는 강!  사망도 애통도 눈물도 없는 곳!  흑암도 밤도 있을 수 없는, 대낮의 햇빛보다도 더 밝은 곳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파라다이스의 주인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속에 있는 곳’이며, 22절에는 ‘하나님 자신이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이 되어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에도 보면, 그 유명한 23편에서 ‘잔잔한 시내가 흐르는 푸른 초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공통되게 말해주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부족함이 없는 행복과 평화를 양들이 누리고 있지만, 누리는 데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그림의 주인공으로서, 목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 조건을 무시한다면, 평화로운 초장도 그 순간에 ‘사망이 음침한 골짜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을 인간에 대한 속박으로 생각들을 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바 있는 그분의 친구들처럼, 그렇게들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지금 믿는 게 아니고, 좀 마음대로 죄도 지으면서 살다가 죽기 얼마쯤 전에 믿으면 될게 아니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면 자유로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귀가 우리에게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지, 우리 인생은 하나님 없이는 결단코 행복하지도 자유스럽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육심리학자인 James Dobson 박사의 유명한 실험보고가 있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운동장 둘레의 울타리를 철거하였다고 합니다.  울타리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이었을 뿐이지, 막상 울타리를 철거하고 났더니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울타리가 있었을 때에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서 자유롭게 뛰어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뒤에는 뛰어놀지를 않고, 그저 운동장 가운데 부분에 모여서는 거기서 웅크리고 앉아서 놀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울타리는 ‘구속의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지요.  울타리가 없으니까 아이들은 그 넓은 운동장에서 오히려 활동범위를 좁혀서 웅크리고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Dobson 박사가 그의 리포트에서 내린 결론이 이것입니다.  “인간에겐 울타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모시면 속박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섭받는 것 같고, 구속당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오해하여 생각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심으로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울타리가 없는 운동장의 아이들처럼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약할 수밖에 없고,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거기!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바로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나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나와 늘 함께 하시니 내게 부족함이―아쉬운 것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미국 뉴욕시의 SoHo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어떤 사람이 큰 그림 앞에 서서 신나게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훌륭해, 내 작품이 이만하면 일류야!” 하고 말이지요.
   마침 그 옆에 기독교 화가인 Robert Henry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는 민망하여서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여보시오, 내 작품, 내 작품 하며 자랑하시는데, 이것은 대 화가인 Sargent씨의 작품이요!”
   그런데도 그 사람은 여전히 신나서 계속 말합니다.  “바로 저 그림의 틀이 내 작품이요.  만들 때는 별 것 아니었는데, 명작 그림을 그 안에다 넣으니 내 그림틀도 제법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말에 Henry씨는 크게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의 감상을 이렇게 수기로 남겼습니다.  “나는 오늘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였다.  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틀이 된다면, 나도 예수와 함께 빛을 발할 것이다!”


   인간의 가치!  인간의 행복!  인간의 소망! ―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아름답지도 못합니다.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합니다.  풍성합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처해 있는 형편이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은 다음입니다.  언제나 위대한 인물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자리가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여리고성을 위시하여서 기골이 장대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그곳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일일이 싸워가며 점령을 해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장비 면이나 수적인 면이나 무엇 하나 우세한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난 40년간 신적인 존재로서 영도해온 모세가 죽은 후라서, 백성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운 형편입니까?  두려움이 있고, 걱정이 있고, 망설임이 있고……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야,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니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니라.”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이 세상에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과연 두렵겠습니까?  용기와 힘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모시는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저는 가끔씩 너무나도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희망 속에 살기를 원하고 모두 축복 받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보면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길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데도, 그 길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되는 것인데, 세상살이를 이유로 내세우면서 다른 길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걱정하고, 그러면서 한숨 쉬고, 그러면서 불행을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 사회에 있는 무엇을 붙잡고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줄로 생각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영원하십니다!!  내 건강 사라져도,  내 친구―심지어는 내 가족이 무슨 일로 내 곁을 멀리 떠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 한 분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영원토록, 영원토록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은혜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어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단코 연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보람 있는 인생입니다.  가치가 있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