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은사는 어떻게 사용 할것인가?

신유의 은사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200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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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신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구약성경에서 ‘치료하는 여호와’(출 15:26)로 자신을 표현하신 하나님은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다. 성령으로 공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구주로, 병든 자에게는 병을 고치시는 의사로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복음서 전체에 잘 묘사된 것처럼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그를 따랐고 그가 고쳐주심으로 깨끗함을 받았다. 예수는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의사 중의 의사’셨다.

최근 들어 서구신학이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교회도 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시작된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을 통해 방언을 비롯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후 1960년대부터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과 제3의 바람(The third wind)을 통해 신유와 축사가 보편적인 교회의 사역으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한국교회와 신학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유’에 관한 서적이 활발히 출판되고 있고 신학교에서도 ‘신유’와 관련된 강의들이 개설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1960년대 초 김기동 목사에 의해 시작된 신앙운동인 베뢰아 운동과 같이 한국교회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활발하게 일어난 바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로써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유가 사도 시대 이후 혹은 초대교회 이후로 종료되었다’는 왜곡된 교리, 즉 ‘은사종료설’(cessation theory)를 만들어냈던 전통신학의 오류가 드러났다.

본 글은 지면상 이적(세메니아,) 가운데 ‘신유의 은사’(카리스마타 이아마톤, 헬라어를 그대로 보면 ‘병 고치는 은사들’로 번역이 된다-필자 주)만을 다루고자 한다.



Ⅱ. 본 문


1. 성경이 말하는 신유


1) 구약성경에 나타난 신유

신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파’()는 구약성경에서 총 67회 나타난다. 이 단어는 ‘치료하다’, ‘건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다.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라파’, 즉 ‘우리의 의사이신 여호와’로 표현하신다.

구약성경의 신유사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병을 죄의 결과로 본다(출 23:25, 시 107:20, 잠 4:20∼22). 그 실례로 광야에서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이방 여인을 취한 것에 대하여 힐문하면서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하나님은 미리암을 문둥병으로 치셨다. 그러나 모세가 그녀를 위하여 기도하자 문둥병이 나았다(민 12:1∼15). 이처럼 죄를 지었다가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육체도 동일하게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출 15:26).

둘째, 신유사역이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왕상 17:17∼24), 엘리사를 통해 아람 사람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하신 일(왕하 5:1~15),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의 병을 치료하신 일(왕하 20:1∼11) 등이 그 예다.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신유는 하나님이 쓰시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유사역

신약성경의 신유사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병의 원인을 피상적인 인간의 범죄로 보기보다는 그 이면에 역사하는 영적 존재인 귀신으로 본다. 귀먹고 벙어리가 된 원인은 귀신이며(막 9:25) 십팔 년 동안 꼬부라져 펴지 못하게 한 원인도 귀신이다(눅 13:10∼17). 또한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게 한 원인도 귀신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병든 자들을 만날 때마다 병을 가져다 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귀신의 정체를 폭로하시고 꾸짖으며 쫓아내셨다. 그때마다 귀신이 나간 후 병자는 온전케 회복되었다.

둘째, 신유사역이 소수의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셨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마 10:1). 또한 70인에게도 동일한 권능을 주셨고(눅 10:1∼9) 이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막 16:17, 18).

셋째, 신약성경은 예수 안에서 영혼의 구원과 육체의 치유를 하나로 간주한다. 헬라어 ‘소테리아’()는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구원’에 걸쳐 모두 사용되는 용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의 광풍으로부터 구원받았을 때나(마 8:25, 26) 혈루증 걸린 여인이 육체의 질병에서 구원받았을 때도(마 9:22) ‘소테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 뿐 아니라 환경의 문제까지도 모두 담당하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그것에 대한 확증으로 병고침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반드시 신유의 복음도 병행되는 것이다. 만약 현대 교회가 신유의 복음을 제해버린다면 그것은 ‘반쪽복음’(half-Gospel)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에서의 신유사역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약은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나 신약은 귀신에게서 찾는다. 구약에서는 신유의 능력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졌으나 신약에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로 그 범위가 확장된다. 구약은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의 구원이 이루어졌으나 신약은 영혼의 구원과 육체의 구원이 예수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신유의 완성

구약에서의 희미하고 제한적인 신유사역이 신약에 이르러 더욱 선명하게 확장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 4절에는 장차 올 메시아의 사역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에서 ‘질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홀리’()는 구약성경에서 모두 질병을 의미하며(신 7:15, 왕상 17:17, 왕하 1:2; 8:8, 대하 21:15; 21:15) ‘슬픔’에 해당하는 마크오브()는 주로 병상의 고통과 아픔으로 인한 슬픔을 말한다.

특히 이사야 53장 11절에서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에서 ‘담당’이란 말과 53장 4절의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에서 ‘당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 ‘사발’()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또한 ‘우리의 질고를 지고’(사 53:4)의 ‘지고’라는 말과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사 53:12)에서 ‘지며’라는 말은 동일하게 히브리어 ‘나사’()가 사용된다.

결국 죄악의 담당과 아픔의 단어가 동일하며 죄의 짊어짐과 질고의 짊어짐이 동일한 단어로 쓰였다. 따라서 앞의 것을 믿으면 뒤의 것을 믿어야 하고 앞의 것을 인정하면 뒤의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그는 질고를 아는 분이시다’(사 53:3)에서 ‘알다’로 번역된 ‘야다’()는 이성적인 작용을 통한 앎이 아니라 완전한 육체적인 경험을 통한 앎을 말한다. 창세기 4장 1절에서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에서 ‘동침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도 ‘야다’다.

이와 같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인간의 모든 질고와 아픔을 친히 몸으로 체휼하신 분이시다(히 4:15).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환영해야 한다.



2. 현대 신유사역의 형태


비록 성경이 이렇게 신유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은 신유의 현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유의 은사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그 능력을 나타내셨다. 비록 이들은 신유사역을 행하고 있지만 그 사역 형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1) 개인 중심의 신유사역자 그룹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신유사역을 행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로는 베니 힌(Benny Hinn), 오랄 로버츠(Oral Robert), 라인하르트 본케(Reinhard Bonnke) 등이 있다.

이들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신유사역을 행한다. 베니 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방언과 신유는 행하지만 축사(逐邪)는 행하지 않는다. 반면에 베니 힌은 병의 원인을 귀신으로 보고 축사를 적극적으로 행한다.

이처럼 이 그룹은 구약의 신유 사역자들처럼 신유의 능력이 특정한 개인에게만 부여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 때문에 신유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거나 교육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 개인의 사역으로 끝날 경우가 많으며 분파(sect) 운동으로 취급 받기 쉽다.


2) 신유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신유 사역자 그룹

이 그룹은 신약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신유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뿐 아니라 세미나나 양육을 통해 신유에 대한 신학적 근거와 방법에 대하여 가르친다. 이 그룹에 속하는 인물로는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 챨스와 프란시스 헌터(Charles & Frances Hunter),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존 윔버(John Wimber), 맥스웰 휘트(Maxwell Whyte), 프레드 디카슨(Fred Dickason), 마크 부벡(Mark I. Bubeck) 등이 있다.

특히 이들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중 챨스와 프란시스 헌터는 그의 저서 『신유의 방법』에서 “귀신 쫓기”라는 한 항목을 할애하여 축사사역을 소개할 정도다.

아쉬운 점은 이들이 신유사역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앙 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기보다는 비주류로 남아 있다.


3) 말씀과 체험으로 균형 잡힌 신유 사역자 그룹

말씀과 체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신유사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신유 이해는 통전적이고 균형 잡힌 신유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전통신학은 인간 창조 이후 인간 범죄로부터 전개되는 인류구속사적 하나님의 경륜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믿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 신학의 출발도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요 1:1, 엡 1:4, 벧전 1:20).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책이며 아들을 증거하는 책이다(요 5:39; 20:31).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전통신학과는 달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라는 신본주의적 인간론을 지향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균형 잡힌 신유신학을 전개한다.

둘째,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적 존재에 대하여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세 영적 존재인 하나님, 천사, 인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마귀, 미혹의 영, 귀신의 활동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병과 귀신과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다.

셋째, ‘능력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이는 신약성경이 제시한 신유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신유는 목회자나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임을 주장하고 가르친다. 평신도에게 제자를 삼아 가르칠 권리를 인정하며 병 고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독려한다. 특히 베뢰아아카데미에서는 ‘복음중재로서의 신유’라는 세부적인 항목으로 가르칠 정도로 신유사역에 대해 열려 있다. 일반 장로교회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시험을 통과해야만 설교할 수 있는 목회 환경과는 달리 신유사역이 모든 평신도에게 개방되어 있다.


3. 신유사역, 어떻게 행할 것인가?


신유는 영혼을 구원하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유사역을 행할 때 다음과 같은 전(前) 이해가 필요하다. 신유사역을 행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다(마 7:21∼23). 우리는 신유사역을 하다가 타락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신유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올바른 성경적 신유신학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영혼을 살리며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1) 복음중재로서의 신유

신유사역을 행하기 전에 먼저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을 해결받도록 도와야 한다. 일반 무속에서도 병을 고치는 경우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분명한 죄에 대한 인식이나 회개는 없다. 오직 죄에 대한 문제는 성경에서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원죄, 본죄, 자범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분명한 회개 체험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나서 병든 자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수 이름이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이름이며(마 16:17) 영생을 얻게 하는 능력의 이름임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마 1:21, 요 20:31).

마지막으로 말씀으로 꾸준히 양육해야 한다. 병 고침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는 말씀으로 양육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육이 빠진 신유사역은 의미가 없다. 신유사역은 영혼을 구령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유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주장하는 ‘믿음 치유’는 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다 낫는 것은 아니다. 신유를 행하는 사람이나 병든 자는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일 뿐이다.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강조하다 보면 병든 자가 낫지 않았을 때 신유를 행한 사람이 능력이 없다든가 혹은 병든 자의 믿음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이것은 신유를 행하는 사람이나 병든 자를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약을 쓰는 것이나 의사의 도움을 받은 것을 죄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는 말씀처럼 의사나 약의 사용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말한다. 이 경우에 바울은 포도주를 약으로 사용하라고 권한 것이다.

의사의 도움을 받거나 약을 쓰는 것도 가하나 먼저는 믿는 자에게 주신 병 고치는 능력을 적극 사용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3)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하는 신유

신유사역을 활발하게 행하는 사역자들의 공통분모는 기도에 있다. 이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 육체에서 능력이 나감을 공통적으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막 5:30)라는 말씀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는 말씀에서처럼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증명된다.

마치 발전소에서 전기가 흘러 나와 각 가정에 공급되듯이, 병 고치는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신유 사역자를 통해 병든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신유를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병 고치는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을 공급 받는 통로는 끊임없는 기도와 적극적인 행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