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축복, 물의 신학

나눔의 축복: 물의 신학

 신 24:17-22, 막 10:7-22

문동환목사(한신대 명예교수)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땅 위에서 그 고마우신 하느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기원의 첫째가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 가지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려면 그의 거룩한 뜻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 하느님 나라가 땅 위에 이룩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땅 위에 사는 그의 자녀들의 말과 행동에 사랑의 영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물이 사랑의 영으로 말미암아 맛있는 포도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디에서 붙어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무슨 거대한 영적인 일에서 시작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놀랍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하는 기원에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물질문제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구원사의 첫째 인물인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약속하신 첫째 약속 역시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떠돌이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물질 문제를 우선적으로 문제삼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뜻에 있어서 이 물질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물질에 대한 신학이 없는 교회


그런데 그 동안 서구 교회는 물질에 대한 신학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경륜에 있어서 물질의 위치는 어떤 것이오, 이 물질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해명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물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동안 서구 교회는 물질이란 죄 된 것으로만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우리 육체적인 것도 죄 된 것으로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있어서 금욕주의가 그렇게 왕성했었습니다.

그리고 서구 교회는 이 물질의 세계는 장차 망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존 번연이 쓴 저 유명한 “천로역정”이라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 이야기의 줄기란 “기독도”라고 하는 사람이 “장망성”에서 탈출해서 천국으로 가는 노정을 그린 것이죠. 장차 망할 세상에서 떠나 천국만을 바라보면서 전진하라는 것이죠.

우리 찬송가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하는 찬송 역시 그런 신학을 표현합니다.

2 절에 보면 “괴롭고 죄만 있는 곳, 나 어찌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체념하고 “천성”만을 바라보기에 이 세상은 날로 더 험악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을 보면 이런 신학의 모순을 곧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은 장차 망할 곳이라고 하면서도 땅 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잘되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땅 위에서 고난을 받으면 하느님에게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제 3 세계에 가서 자기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너희들도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전도할 때도 흔히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게 되고 자식들도 입신양명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서구가 잘 사는 것은 예수를 잘 믿어서가 아니라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서 수탈을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돈 많은 몇몇 장로들의 경우도 흔히 예수를 잘 믿어서가 아니라 정부에 아첨을 하면서 돈 벌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하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성서의 종교가 이원론적인 헬라철학과 결탁하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헬라 철학이란 노예들의 피땀 위에 세워진 자유인들이 만든 철학입니다.

저들은 노예들의 노역을 통해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이 훌륭해서 그런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살다가 발견한 것이란 삶이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면서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 허무한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된 것은 저 세상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본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철학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이 세상은 장차 망할 것, 참된 것은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이라는 신학을 창출한 것입니다.

그리면서 헬라의 자유인들이 노예들의 피땀으로 세운 부를 당연한 듯이 즐긴 것처럼 기독교의 지배자들 역시 약한 민중들의 노동의 열매를 먹으면서 자기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자처한 것입니다.

구라파의 대 사원 지하실에 가보면 왕들, 제후들, 귀족들의 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땅 위에서 가지각색의 영화를 다 누리고도 예수님이 오실 때 먼저 천당에 간다는 것이죠.


성서의 물질관

        

성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물질이란 결코 죄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장망성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물질을 우리 사람들에게 소중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창세기 1 장에 보면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질들을 미리 다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 장에 보면 아담을 생명체로 만드신 다음 그 생명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에덴 동산을 만드셔서 아담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악할 수가 있습니까?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기름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는 갈대아 땅 우르라는 도시에서 쫓겨난 떠돌이기 때문입니다.

농경민이었던 그는 땅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발부치고 살 수 있는 땅을 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호소를 들은 하느님은 “물론 땅이 있어야지. 누구고 다 땅을 소유할 수가 있어야지” 하시고는 그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삶에 필요한 물질이란 누구나 다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죠.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우리에게도 땅을 주십시오”하고 호소를 했더니 하느님은 저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 곳에 입주한 저들은 모두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땅을 소유하지 못한 과부, 고아, 떠돌이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추수할 때 저들을 위해서 밭에 곡식을 좀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올리부 나무에서 올리부 열매를 다 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부, 고아, 나그네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후 왕조가 탄생하면서 다시 강자들이 약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보면서 예언자들은 이것을 신랄하게 규탄을 했습니다.

그대로 나가다가는 다 망한다고. 결국 저들의 예언대로 남북조는 다 망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치하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특히 농민들의 고난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의 농민들은 저들의 땅을 도시에 있는 기득권자들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저들은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님은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야!”라고 강하게 부인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일용할 양식에 걱정할 필요가 없이 살아야 해. 그것이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의 뜻이야! 그러기에 아무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도록 기원을 하고 노력을 해야 해“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첫째 조건이 이 일용할 양식의 문제였습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주는 것의 기쁨


이 하느님의 뜻이 이룩되려면 재산을 독점하는 자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모두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에 젖은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결국 약육강식의 참극이 벌어지지 않을 수 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는 삶을 깊이에서 살펴보십시오. 정말 많이 가짐으로 행복해 집니까?

삶에 충족함을 느낍니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마가복음서 10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게서 봅니다.

그는 부자입니다.

종교적으로 존경을 받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어딘가 허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와서 영원한 보람이 있는 삶을 살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다는 율법학자도 예수님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공의회 의원인 니고데모도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같은 물음을 물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물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네게 있는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부둥켜안고 있던 것을 나누어주어야 참 삶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실망한 듯 머리를 숙이고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 청년에게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주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몸소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나누어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나누는 경험을 해 보아야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난쟁이 삭개오의 집을 찾으신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것을 명확히 봅니다.

삭개오는 난쟁이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에게 저주를 받은 자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억울했습니다.

자기를 따돌리는 세상을 저주했습니다.

한 맺힌 그는 그 세상을 향해서 복수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가 되었습니다.

세금을 빡빡 긁어냄으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부자가 되었으나 그의 심정을 쓸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반사적으로 세금을 더 짜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내면의 세계는 더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주변의 비난을 들은 척도 하시지 않고 자기를 삭개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삭개오는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그런 경험을 가져본 일이 없습니다.

누가 자기를 한 소중한 인간으로 대접해 준 일이 있습니까?

그는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토색한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삭개오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본 것입니다.

나누는 것의 축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젠 나누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삶의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너희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에도 기쁨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만 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손에 닫지 않는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미시시피 주 Hatishburg 라는 곳에 Oseola McArthy라고 하는 78세의 흑인 노파가 있었습니다.

국민하교 6 학년밖에 다니지 못한 그녀는 일생 동안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녀가 한 일이란 남의 옷을 빨아서 다려주는 일입니다.

한 건에 2,3 불 정도 받으면서 일생동안 번 돈이 $ 150.000 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곧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돈을 몽땅 미시시피 대학에 장학금으로 헌금했습니다.

일생 검소하게 산 그녀에게 있어서 이제 새삼 이 돈을 자기를 위해서 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돈을 받은 대학은 거기에 $150.000을 더 보태어 흑인 여학생을 위한 $300.000 짜리 장학기금을 만들었습니다.

감격한 대학은 그녀를 위한 기념관이나 동상을 세우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이것을 다 거부하고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그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졸업할 때 그 졸업식에 참석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헌금을 할 때는 그냥 이 돈을 좋은 일에 쓰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진짜 축복이란 헌금을 한 뒤 내 마음을 채워준 기쁨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눔의 축복입니다.


맺는 말


우리들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경험들을 더듬어 보십시오.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게 했었습니까?

그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무엇이고 사랑으로 나누어주었을 때이거나 여러분이 누구에게나 자신을 나누어주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누어주는 삶을 사십시다.

아무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우리 개인의 삶이 그럴 뿐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삶이 그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