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을 행하였더면

본문 내용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Content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왕하 5:8-14)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 열왕기하 5장에는 한 군인과 선지자 엘리사와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군인은 아람 나라의 군대 총사령관인 나아만 장군입니다.  이 나아만은 일 국의 총사령관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려서 절망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행히도,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한 어린 소녀가 ‘이스라엘에는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유명한 선지자가 있다’고 전해주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엘리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나아만은 그 선지자를 찾아 올 때 ‘은 십 달란트와 금 6천 개와 값진 옷 열 벌’을 선물로 준비하였고, 아람 왕의 친서까지 휴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하들까지 거느리고 이 나아만 장군의  일행이 드디어 엘리사의 오막살이 앞에 서서 문을 두들깁니다.

   이 정도의 신분과 이 정도의 위용이라면, 누구든지 그 기세에 눌려서 맨발로라도 뛰어나옴직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문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단지 몸종을 보내어서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는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일 국의 총사령관이 그저 오라고 명령만 내려도 허겁지겁 달려왔어야 할 터인데, “이렇게 예절을 갖추고 먼 길을 찾아오기까지 하였는데 얼굴 한 번 내밀지도 않다니…”  나아만이 상한 자존심에 노기가 충천하여서 소리를 지릅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나의 이 병든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었다. 그런데 이럴 수 있느냐? 다메섹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보다도 더 좋은 아마나 강과 바르발 강이 있지 않느냐?  거기서 내가 씻으면 될 것이지 하필 더럽고 조그만 이 요단강에서 목욕이나 하자고 이 먼길을 온 줄로 아느냐?”

   그래서 홧김에 돌아가려고 합니다.  아마도 돌아가서는 단단히 복수를 하겠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 부하들이 나서면서 나아만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던집니다.

   “장군님, 여기 오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만일 이 선지자가 아주 어렵고 큰 일을 장군님더러 하라고 시켰더라도, 장군님께서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었다고 하더라고 무엇이든 분명히 하셨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강물에 목욕하는 이 작은 일을 하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못하겠다고 하십니까?”


   드디어 나아만은 마음을 돌이켜서, 요단 강에 내려가서 몸을 담그고 씻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더러운 피부가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정말로 천만대군을 호령하던 장군이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나아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나아만이 자기의 부하들의 얘기를 듣지 않고,  엘리사가 자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한 말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실망, 그리고 자기의 기대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자신의 노여움과 생각대로만 하였더라면, 그는 평생 문둥병자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뜻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8월 마지막 주일이며 또한 31일 마지막 날입니다.  금년이 시작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나 갔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해마다 새해가 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속에 새로운 다짐과 목표를 세우게 마련입니다.  금년에는 이런 목표를 이루어 보아야지, 이런 이런 일들을 하여 보아야지……

   그런데 한달 한달 지나는 동안 돌이켜보면, 물론 그대로 이룬 것도 있지만, 반대로 용두사미 격이 되어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을  지난 세월에서 돌이켜보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결심과 대답도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대한 응답처럼 되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왜 나아만은 다메섹을 떠나올 때 “그 선지자가 무엇을 내게 시키든 내가 그대로 꼭 행하여서 내 병을 낫게 하겠다”고 하는 크나큰 기대와 결심과 목적을 가지고 왔었는데,  그런데 막상 엘리사의 지시에 이와 같은 실패와 좌절의 응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까?

   나아만에게서 실패는 무엇 때문이었던 것입니까?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본문에서 분명히 보는 대로, 나아만의 실패는 바로 ‘작은 일’을 업신여긴 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지요.  ‘천리’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데, 그 길을 걸어서 간다면 그야말로 굉장한 거리입니다.

   ‘천리 길’에 비해 ‘한 걸음’이란 얼마나 작은 것입니까?  그러나 이 먼 천리 길도 결국은 한 걸음, 한 걸음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미식 축구―풋볼 경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최다승률을 올린 어느 풋볼 코치에게 기자들이 몰려가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승리를 위해서 선수들에게 어떤 작전 지시를 하십니까?”

   그 코치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비결은 단순합니다.  난 늘 이렇게 선수들에게 말하지요.  그저 네 번 동안에 10야드씩만 나가라고요.”

   혹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미식축구는 공격과 수비로 나누어져서, 한 쪽 팀에서 네 번의 공격을 할 수 있는데, 이 네 번의 공격기회동안에 10야드를 앞으로 전진하면 다시 네 번의 공격기회를 얻게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서, 10야드를 전진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상대방에게로 공격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욕심을 내어 ‘코러백’이라고 불리는 선수가 앞으로 멀리 공을 던져서 좀 더 많이 전진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그러나 공을 상대방에게 빼앗기게 되면 공격권이 그대로 상대방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코치는 “너무 무리한 욕심을 내지 말고, 한 야드 한 야드를 소중히 여기며 앞으로 꾸준히 전진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다승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작은 이 한 걸음, 한 야드의 전진 ― 이 작은 일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뭔가 좀 굉장한 일을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저 요단강에서 목욕이나 하라니……’   그 정도로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보세요.  하나님은 항상 작은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겐 그것이 하찮고 작게 여겨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적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원칙은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크게 이름을 내며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작은 사랑을 남 몰래 주는 사람이  사실은 위대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과부의 동전 한 잎,  베들레헴의 조그만 말구유,  겨자씨 만한 믿음,  어린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린 아이에게 준 냉수 한 그릇,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천국의 인간상들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왜 성경은 이들을 오히려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큰 일이란,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큰 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동기는 ‘내가 원하고 있는 큰 일’ 거기에 있지를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향한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일을 네게 맡기리라!!” 

   작은 일을 크게 여기고,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두 번째로, 나아만은 형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맺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내 아픈 환부 위에 그의 손을 흔들어서 문둥병을 고칠 줄 알았노라.”


   대부분의 원시 종교들이 그러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몸과 팔을 흔드는 열광적인 의식을 통하여 신이 내려오시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무당도 그러합니다만, 아프리카와 남미의 샤만들을 보면 그 몸치장과 의식이 그야말로 굉장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게 바로 나아만이 행해오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면 낫게 된다고 일러 주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뭐, 이렇게 작고 더러운 ‘요단 강’에서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그렇다면 내 고향 다메섹의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몇 백 배나 훨씬 더 낫지!!”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나아만과 같이 잘 못 이해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호렙산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는데, 먼저 크고 굉장한 바람이 불어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장관이 일어납니다.  이 바람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고 보았으나 그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를 아니합니다.

   바람이 분 후에 이번에는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 정도의 위력과 거창함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겠는가 하고 보았으나, 그러나 그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합니다.

   지진 다음에는 크나 큰 불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불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그와 같은 속에 하나님이 계실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다 지나간 다음, 아주 조용한 가운데 아주 세미한 소리가 있는데, 그 세미한 소리 속에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계시를 하여 주셨습니다!!


   나아만은 자기의 방식과 흥분으로서 하나님을 대하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말로만 전한 것은, 바로 나아만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그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을 그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 보다도 ‘요단 강물’―거기에 무슨 효험이 있어서 거기서 목욕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요단 강 바로 그 물에 어떤 약효가 있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요단 강은 이스라엘에 있고,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은 이방나라에 있는 강이어서, 바로 그 강이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십여 년 전입니다만, 제가 전해들은 어떤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자기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요단강으로 가서 거기서 몇 달을 머물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도 받고, 계속 그 물을 먹고 목욕하면서 지내다가 왔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고 돌아왔지만 그의 병은 전혀 낫지를 않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전적인 자기 겸손! 그리고 순종인 것입니다!!

   요단 강이냐 바르발 강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는 ‘내가 얼마만큼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도 낫다”고 우리에게 엄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 왕 아각과 전쟁을 하였을 때, 모든 것을 진멸시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사울은 전쟁에서 오히려 전리품을 챙겨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라고 사무엘에게 변명하였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엄히 일러준 말씀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분명히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 이곳에 오는 그 ‘목적설정’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어찌하여서든 하나님을 찾아뵙고, 그의 자비와 사랑을 빌어서 나의 이 병을 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 ― 나아만은 이와 같은 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나아만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가 나에게 나와서 그가 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슨 신통력을 보여서 내 병을 낫게 해 줄줄 알았노라!”


   나아만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 병이 낫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그 목적만 이루어진다면 무엇이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꿩 잡는 것이 메”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이 참으로 우리 인생을 잘 못 인도할 수 있는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목적만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이건, 무당이건, 부처이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내 병만 나으면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그 방편으로써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이 ‘목적변경’을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게 바로 실패의 원인인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을 둘러싼 많은 일화들이 있습니다만, 그에 관한 얘기들 중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단체에서 대통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모임에 참석한 대통령을 향하여서 사회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대통령께서 틀림없이 이 일을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하나님을 믿는 분이신데,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말이면 안 들어 줄 수 없게끔 만드는 굉장한 엄포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 링컨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이 일이 과연 미합중국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고 정당한 것이지를 신중히 검토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언하여서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 편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개척사를 보면, 무척 재미있고 의미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북부와 남부의 개척사가 무척이나 대조적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남부에서의 개척사는 Virginia주 Jamestown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곳에서 개척이 시작된 것은 1607년인데, 그런데 바로 그 후 2년 뒤부터 여기에서는 이미 흑인 노예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집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의 목적은 이들보다 앞서 왔던 북부의 Plymouth에 이주하여 온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처음 미국으로 Frontier가 되어 이곳 Plymouth에 온 사람들은 청교도들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Jamestown으로 들어온 남부의 개척인들에겐 ‘신천지 아메리카’는 영국에서 자기들이 못 다한 일, 다 채워지지 않은 욕심을 연장시키려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싶은 땅들을 다 빼앗아 가지고, 또 가지고 싶었던 돈을 모으는 것만이 그들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들 이민의 뒤를 이어서 두 척의 배가 Jamestown에 우선적으로 도착하였는데, 한 척에는 남자들을 접대할 술집 여자들을 태운 향락선 이었고, 다른 한 척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기 위해 쇠사슬에 묶어서 끌고 온 노예선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부의 Plymouth나 Salem이나 Boston에 도착한 미국 최초의 이민들은 Jamestown에 온 이민들과는 그 목적이 본질적으로 다른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 위하여 온 이주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일단 떠나온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빈주먹으로 기도와 찬송으로서 새 땅에서의 새 생활을 개척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이러한 두 가지의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종류의 흐름이 미국이라는 이 역사 속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Jamestown과 Plymouth로 대변되는 ―― ‘어두움의 역사, 이기적인 역사’와  ‘빛의 역사, 신앙의 역사’가 병행되고 있는데, 이 미국이 Plymouth의 정신으로 돌아올 때에 미국은 진정한 미국으로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 또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Plymouth와 같은 것입니까?  또는 Jamestown과 같은 것입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며, 다시금 다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내게 주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의 작은 일에 충성하며,

   나를 위한, 내 뜻, 내 방식대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오로지 겸손히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이 나를 온전히 주장하게끔 순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여러분의 삶 속에도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