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내용 |
|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 Content |
|
“크리스찬의 승리” (롬 8:31-37)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가 지난 8일에 개막을 하여, 오늘 드디어 폐막을 하게 됩니다. 그간 계속된 경기를 통하여 우리나라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때, 그 기쁨과 감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유도에서 계속 ‘한판 승’으로 금메달을 딴 것이라든지; 동양인으로서는 불모지와 다름없는 수영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위시하여,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한 것; 숫한 역경을 계속 딛고 일어나 금메달보다도 값지다고 칭찬해주는 동메달을 획득한 여자 핸드볼; 또 일본과의 야구경기를 두 번씩이나 이기고, 나가서는 금메달을 놓고 심판의 불공정에도 불구하고 큐바에도 승리한 것은 참으로 통쾌한 것이었습니다. 이겼다는 감격은 그토록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기를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느 나라든 승리한 자는 모두가 기뻐하며 환호를 합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누가 있습니까? ‘이긴자’가 있을 땐 언제나 ‘진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리고 진 나라의 선수와 관중석에는 비통한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비단 올림픽 경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경기가 다 그러합니다만, 모든 사람이 다같이 이기고 다같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선수들도 보면, 경기를 시작할 때는 모두가 다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긴자’는 영광을 얻고 ‘진자’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합니다. 심지어 어떤 땐 모욕까지 당하는 것도 보게됩니다. 지난 프랑스 월드컵 땐 자책골로 지게된 나라의 선수가 자기 나라에 돌아갔을 때 총에 맞아 죽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이기는 것을 원하게 마련입니다. 비단 운동경기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면에서 다 그러합니다. 이기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승리는 영광이요, 실패란 언제나 비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원하고 있는 ‘이 세상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데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다른 사람은 져야만 하고, 한 사람이 영광을 누리면 다른 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수치와 패배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야구에서 우리가 두 번씩이나 일본에게 이겼을 때, 일본의 감독과 선수들은 일본의 네티즌들로부터 ‘아예 일본에 돌아올 생각을 말라’고 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또한 ‘세상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영원히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구기종목이나 육상 계주 같은 단체전을 보면,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기라성 같은 나라의 팀들이 맥없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지 않습니까? 오늘 승리하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언젠가 내일은 패합니다. 그리고 선수 개개인을 보아도, 어제의 스타였던 사람이 새로운 선수들에게 밀리게 되고, 끝에 가서는 결국 현역에서 은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승리란 이같이 잠깐 비춰주는 번갯불과 같아서, 숙명적인 괴로움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생각해보면, ‘세상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버는데는 성공했지만, 건강은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굉장한 것을 얻은 것 같고 존경을 받는 것 같으나, 사실은 도덕에서 실패했습니다. 얻은 것이 있는가 하면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알고 보면, 우리가 바라는 그 승리라는 것이 사실은 승리라 할 것도 없고, 영광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에게 간절히 요청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온전한 승리, 절대적 승리, 영원한 승리는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 승리를 우리가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사람들은 ‘승리란 우선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원리를 지녀야 한다고 어떤 학자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 말에 의하면, 첫째 힘의 원리는 ‘직선 상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 점에서 다른 한 점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가 바로 직선이 아닙니까? 따라서 ‘갈지자걸음’을 하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기둥으로 말하면 곧은 기둥이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힘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직선적으로, 한 길로 사는 사람이 항상 성공에 가까운 것입니다. 둘째로, 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 복잡하면 힘이 흩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흔히 말하는 기억력을 놓고 보더라도, 어린 아이들은 기억력이 좋고,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들 흔히 말합니다만,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나이가 들었다고 기억력이 꼭 감퇴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이가 들면 왜 기억력이 없어진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무엇을 보든지 듣든지, 그대로 한가지만 생각하지를 않고 꼭 다른 생각을 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생각해야 할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만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마음, 깨끗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좀 단순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에도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도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복잡한 것은 잊어버리고―찬송할 때 찬송하고, 기도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할 때 놀 생각하고, 놀 때 공부 걱정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둘 다 못하고 말지 않습니까? 단순한 마음이어야 힘이 모이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힘은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이럴까 저럴까 하는 동안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으면 전혀 힘이라곤 없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이것뿐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하고 결정적으로 나가야 힘이 생기고 성공하게 된다는 것!――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오로지 예수! 오직 예수―그 분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힘은 무엇보다도 합쳐야만 합니다. 혼자보다도 집중적으로, 집합하여 밀고 나갈 때 큰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 젓가락도 한 두 개는 아주 약해서 쉽게 부러집니다. 그러나 너덧 개가 함께 합쳐지면, 오히려 같은 굵기의 한 개의 나무보다도 더 단단한 힘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의 힘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해도 여럿이는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상의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네 가지의 힘의 원리를 말합니다만, 그런데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네 가지의 힘의 원리만을 갖추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같은 힘의 원리―이 네 가지를 모두 다 지닌다고 해도, 결국 한 사람은 이기고 다른 사람은 지게 됩니다. 이 네 가지를 다 지닌다고 해도, 나는 이길 때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또한 지고, 괴로움 속에 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적이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세기의 영웅이라고 불리던 나폴레온이지요. 그는 아마도 이 힘의 대표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마지막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였지만 아무도 내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온 세상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소이다. 오호, 그대가 이기었소. 당신이 진정한 승리자이오!” 여기서 갈릴리 사람이란 물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나폴레온은 이 네 가지의 힘의 요소 외에 별도의 또 하나의 원리가 있어야 진정으로 참된, 영원한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원리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상대적이 아니라 완전하며,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하며, 부분적이 아니라 온전한 승리! ― 이 승리를 우리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길 수 있고, 또 항상 이기는 승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닙니까? 성경이 말해주는 요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와 같은 힘―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승리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승리를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힘이란 무엇입니까? 그 힘은 어떻게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힘!―십자가를 통한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힘을 깨달아 알고, 또한 얻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바로 이 새로운 힘과 영원한 승리의 원리를 알기 전에는 처절히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바울이 이 당시의 실패담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결단을 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3년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하고 수양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하고 사도가 된지도 이미 10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오로지 복음만을 전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지식의 힘이 있고, 믿음의 힘이 있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헌신의 힘이 있었습니다. 또 여기에다가 경험의 힘까지 갖추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면 주저하게 되는데, 그에게는 이제 10년이라는 경험의 힘까지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에겐 소위 ‘힘의 요소’들이 다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소위 네 가지의 힘의 요소들을 바울은 다 갖추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바울이 철저한 실패를 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권력이나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나오는 대로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들은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약해진 것입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약하게 만든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로 오기 전 아테네로 먼저 갔더랬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로서, 철학의 본산지가 아닙니까? 바울은 원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철학의 본산지에 도착해서 많은 학자들과 변론을 하다가보니 그만 옛날 솜씨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모르고 섬기는 하나님을 내가 알게 해 주겠노라”하면서 한바탕 연설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테네의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이 모두 바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그는 크게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정작 열변을 토하며 정력을 쏟았던 아테네에서는 교회를 전혀 세우지 못했습니다. 별로 핍박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하고만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그의 학식을 들어내고 변론을 하고 토론을 하였을 때, 아무도 자기에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함을 보고 그는 자기가 이긴 줄 알았습니다. 통쾌하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었음을 알게된 것입니다. 전도를 해야 할 사람이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간 사람이 전도조차 제대로 못하였다면, 그야말로 처절한 실패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에게 진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진 것입니까?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 가서 몇 해 되지 않아 어떤 분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그 기회에 그분에게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 유학하여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신데, 얘기를 나누던 중 듣다가보니까 그 분의 말이 너무나도 건방져요. 공학에 있어서는 자기가 박사일지 모르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내가 더 배운 사람인데,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무신론의 틀린 점들, 잘못된 지식들, 논리적 모순점들을 지적하며, ‘왜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 등등 아주 열변을 토하였고, 결국은 그가 자기의 말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제 속으로는 아주 통쾌하였습니다. “내가 이겼다!”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결국 그 날 밤 진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는 말과 논리에선 내게 졌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껏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후론 아예 저하고 접촉도 하지 아니합니다. 제가 그 날 차라리 말에 있어서 오히려 져주면서, 대신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며 느끼게 해 주었더라면, 결과는 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자존심을, 저의 지식을 더 내세웠던 것이지요. 꼭 전도하는 일뿐만 아니라, 매사에서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어떤 견해나 의견 차이로 인해 다른 사람과 입장을 달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간혹 말다툼을 벌리며, 큰 소리를 내면서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어가면서 내 주장을 이기겠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인심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이긴 것이 결국 무엇이 됩니까? 도대체 무엇에 이기고 무엇에 실패했다는 말입니까? 결국 이긴 것 같지만, 진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사이에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도, 직장의 동료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경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이긴 것 같으나 사실은 진 것이요, 진 것 같으나 사실은 이기는 것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5절에서, 영원한 승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힘, 사람들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그가 이긴 줄 알았던 것이 결국은 일시적인 것이요, 상대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경험하고 우리에게 간곡하게 증거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이 최대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보증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 이 사랑을 믿음으로 우리는 강하게 되고, 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완전한 승리를 이룰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병이 났다고 해서 다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병으로 인해 정신이 강해 질 수도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환난이 사람을 더 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일시적 승리가 아니라―불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완전한 승리―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그 승리를 원하십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의미를 마음 속에 새기십시오!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지혜를 내세우고 나를 들어내기에, 결국 내 주위에 온갖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십자가란 말을 많이 하고, 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자주 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 것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바로 ‘자기를 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란 달고 다니는 것이거나, 그냥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매달려 못 박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장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있고 죽어서 장사지내졌는데, 그렇다면 내가 내세울 자존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여기 이렇게 죽었는데, 그렇다면 다툴 이유가 어디에 있고; 용서하지 못할 일, 희생하지 못할 일, 사랑하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길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이기도, 너도 이기고, 모두 이기고, 그리고 영원히 이기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의분이 있습니까? 부부 간에, 이웃 간에, 동료 사이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하세요. 예수님께 물어보세요.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오냐, 그러냐? 내가 바로 그 일을 위해 내 몸을 이렇게 여기 십자가에 못박았다. 너도 그것을 위해 네 몸을 못박을 수 있겠느냐…?!!” 바울이 한 것과 같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하고, 십자가만 의지하는 새로운 결단을 우리 모두 하십시다. 이 길이야말로 참된 승리로 이끌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만이 내가 나를 이길 수 있고, 십자가의 신앙으로 죄를 이기고, 사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기는 것이고,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승리의 찬가를 외치십니다. 이와 같은, 사도바울이 부른 것 같은, 승리의 찬가를 늘 부르시며 ‘영원한 승리의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