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내용 |
|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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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 승리의 길” (행 16:22-32)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을 ‘고해(苦海)―고통의 바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서 이 세상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인생에 고통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괴로움, 경제적 문제로 인한 고통들, 이별이 가져다 주는 슬픔, 인간관계로 인한 절망감…… 어쩔 수 없이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며, 또한 슬픔이 있습니다. 저만하면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겠다고 보여지는 분들도, 사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갖는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덱거란 철학자는 우리 인생을 ‘던져진 생’을 산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역경과 고통 속에 던져진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이란 문제―우리가 겪는 모든 역경들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사실 중요한 것은 ‘그 끝맺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 고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마치 서부영화를 보듯이 승리로―Happy End로 끝날 수만 있다면, 아무도 역경 따위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현재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마지막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끝날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을 고통이라고 탄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마지막의 영광, 궁극적 승리!’ 이것입니다. 그러기에 ‘과정으로서 겪는 역경’이란 참을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서 ‘결과로서 나타나는 고통, 비극!’ ― 이것은 그야말로 절망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지막이 비참해 진다면, 우리는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또 귀하게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며, 화려하게 결혼식도 했고 찬란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장면이 비참했다면 우리는 그를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의 역경’ 이것이 아니라, “이 역경―우리가 겪는 고통! 이 다음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다음을 희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고통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통과 역경’ 그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라면, 그것으로 그는 그의 생을 끝내게 될 뿐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그대로 증명할 수 있는 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있는 연합군 포로 수용소 안에서 이상한 병이 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모두가 우울해 지고, 먹어도 살이 안되고, 온 전신이 쇠약해져서 누워만 있으려고 합니다. 이 병은 원인도 모르고, 그래서 치료방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군의관들이 이 병의 이름을 ‘가시철망 병’이라고 부쳤다고 합니다. 가시철망 속에 갇혀서 사는 상황에서 생긴 병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쳤다는 것입니다. 이 병에 걸린 환자들에게는 공통된 현상이 나타나는데, 모든 일에 거의 하루종일 투덜대고 불평만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가시철망을 원망스럽게 바라봅니다. 자기를 가두고 있는 그 가시철망이 모든 불만의 원인과 분화구가 되어서, 아무리 자유시간을 많이 주고 오락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어도 도무지 짜증만을 낼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같은 가시철망 안의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여서 그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한가지 뚜렷한 결론이 나타납니다. 하루 종일 눈앞에 가시철망만 바라고는 사람은 하나같이 다 이 병에 걸렸고, 철망을 넘어서 저 푸른 하늘도 보고, 철망 밑에 핀 들국화도 볼 수 있으며,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던 사람들도 생각하며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병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역경과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 고난이 어떠한 것인가?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느냐?’ 하는 것은 사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문제는 그 역경에 임하는 나의 자세가 어떠했느냐?!! ― 역경을 만나더라도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이 과정! 나의 태도!―이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같이 읽은 본문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역경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읽어서 아시는 대로 이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처음과 그 과정에 있어서 그렇게도 모순되고 잘못 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귀신이 들려서 매일 같이 점만을 치며, 또한 여러 날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여종의 처지가 하도 딱하고 불쌍해서 사도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고 깨끗한 정신이 되도록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이 죄가 되어, 끌려가서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은 채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 하며, 매를 때리고는 감옥에다가 무작정 가두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억울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을 고쳐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를 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도대체 다짜고짜 때리기부터 하고는 그리고 가두어 버리는 억울함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억울함과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서 20절을 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p.37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기 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이 있습니다. 둘째는 죄가 있기 때문에, 죄 때문에 당하는 심판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선을 위하여 스스로 당하는 사랑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정말 억울하게, 그것도 남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국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기적이 일어나고, 역경을 넘어서는 승리와 기쁨이 나타납니다. 한 밤중에 묶였던 쇠사슬이 다 풀어지고, 감옥문이 활짝 열리며, 가두었던 간수들이 오히려 바울 앞에 엎드리고, 집으로 모시고 가서는 극진히 대접할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다 주님을 영접하며 세례를 받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은 참으로 억울함과 고통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끝은 정말로 기쁨이요 승리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여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때로는 당하는 모든 고난에도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Happy End가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에 일어난 기적!―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역경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이런 기적이 나타나고, 모두가 다 Happy End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령, 해산의 고통을 치른다고 하여서 모두가 다 옥동자를 낳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죽은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불구자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영광된 것만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누가 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이 수고 전부가 자동적으로 아름다운 결과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Happy End를 만들어준 그 기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어떤 곳에서 우리의 역경을 Happy End로 바꾸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의 ‘궁극적 승리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역경을 넘어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현장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게 임하는 고난이 바로 나의 죄로 인한 ‘심판적인 고난’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평소에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바울은 고난을 받고 있으나 그에게는 고난으로 인한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는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쇠고랑을 찼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추호의 뉘우침도, 아무런 가책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부끄러운 영광도 많습니다. 잘 산다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그러나 가난해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성공하고도 성공했노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를 하고도 떳떳하게 가슴을 내어놓는 자랑스러운 실패가 있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국회가 회기 중인데, 현역 국회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로 말이 많은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난 그분들 뿐 아니라, 정말 자기의 양심에서 그분들이 지금 지목 받고 있는 죄목에 대하여 떳떳할 수 있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Jonathan Swift란 사람은 좀 장난기가 많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영국 국회의 모든 의원들에게 익명으로 “당신의 행적이 탄로가 났음, 빨리 도피하시오”하고 전문을 보내고는 결과를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평소에 그 점잖고 근엄하던 의원님들이 하나같이 허둥지둥 시골로 달아나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 되었다지만,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러니 그 다음에 전개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상관할 바가 없습니다. 이 후의 문제는 다 하나님께 맡기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여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면 그 무엇이 고통이 되고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때 거기에 궁극적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이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네로 황제의 그 박해 아래서나, 종교개혁의 그 와중에서나, 일제의 탄압과 공산당의 학살 아래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바라보며 오히려 기도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기도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해결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때린 것은 빌립보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아니합니다. 나는 지금 모르는 길을 가고 있으나 하나님은 아시겠기에, 나는 지금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그 지혜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어떠한 순간에도 기도가 막히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부하게 살아도 기도가 막힌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희망이 그에게 있겠습니까? 지금의 현실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지고, 그래서 기도하며 찬송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이것이 궁극적 승리의 길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William Feather 라고 하는 미국의 문학가가, 어느 날 자기가 알게된 한 청년에 대하여 글을 남겼습니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이란 제목인데, 그 내용은 자기가 알게된 그 청년이 어느 날 길에서 100불 짜리 지폐를 발견하였답니다. 그 후로는 혹 오늘은 또 무엇이 떨어져 있지 않나 하고 계속 길바닥만 내려다보고 다니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10년 되에 그가 얻은 것은 2만 9천여 개의 단추와, 5만 4천여 개의 핀과, 돈 모두 합해 12불과, 그리고 꾸부정해진 어깨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그가 잃은 것이 있는데, 찬란한 햇빛과, 별들의 반짝임과,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미소와, 가로수의 싱싱한 녹색의 잎들과, 푸른 하늘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는 맛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현재 얻게되는 그것만을 바라보고 사는 가운데 그만 정말 귀중한 그 다음의 것들을 잃고만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있었지만, 하늘은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캄캄한 밤에 있었어요 ― 그러나 하늘로부터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자기를 보며, 하나님을 보며, 또한 자기의 운명과 자기의 이웃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담담히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바울은 또한 찬송을 부릅니다.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 한숨을 쉬고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찬송을 부른다!! ― 얼마나 귀중한 얘기입니까?!! 혹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역경을 겪을 때에 여러분은 찬송을 불러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유신 당시에 긴급조치 1호로 구속이 되어 사형을 구형 받았고, 나중에 15년 언도를 받은 뒤 감옥에 갇혀 있다가, 몇 해 후 ‘형 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났던 연세대학교의 김찬국 목사님을 출옥 후 찾아뵙고 말씀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들은 간증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어느 날 한번은 찬송을 크게 불렀다고 합니다. 그 때 신학자로서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신비스러운 감동을 바로 그 때 경험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처음엔 꼭 죽는 줄로만 알고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그 때 찬송을 부르다보니 알 수 없는 힘이 생겨, 그 무섭던 “사형!” 하는 그 소리가 도무지 무섭지가 않더랍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 오히려 같이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에게 전도를 하며, 찬송도 가르쳐주며 예배를 드리면서 지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역경 속에서 오히려 부르는 찬송처럼 힘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혹 오래된 영화라서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쿼바디스’란 영화에 보면 사자의 밥이 되고 불에 타 죽고 하는 순간에도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폭군 네로의 그 어떤 포악한 힘도 결국 이 찬송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마는 것을 거기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깊고 어두운 밤에 찬송을 부릅니다! 억울하게 매맞고 상처 난 몸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이 종말적인 찬송! ― 바로 여기에 궁극적 승리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옥문을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그는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러할 때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며, 쇠사슬이 풀어지는 놀라운 기적이; 그리고 자기를 때리던 자가―억울하게 감옥에 넣은 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놀라운 승리가 종국에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의 골자가 어디에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어진 것! ― 이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사도 바울의 그 마음 속에 이미 기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망할 시간에 감사하고, 울어야 할 시간에 기뻐하며, 절망할 시간에 감사 찬송을 부릅니다. 모든 사람이 ‘철망의 내려 누름’만을 보고 있지만, 그는 그 철망 속에서도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보았고,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이 자체가 바로 기적! 그것이 아닙니까?!! 승리의 결국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이와 같이 이미 그 마음 속에 기적을 이루고 있는 그 심령 속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 사람됨에; 기도하며 찬송하는 그 믿음 속에; 이제 그 결과로서 옥문이 열리며 자유하게 되는 또 하나의 기적이 자연히 생산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겸손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혹 당하는 역경은 바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까? 아니면 겸손을 위하여 내리는 채찍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성장을 위하여 내게 주시는 시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시는 특권입니까? 오늘 여기 이 감옥과 같은 이 삶의 현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며 어떻게 임하고 있으십니까? 이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철조망뿐입니까? 아니면 그 너머에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로 이 삶의 현장에서 가지는 나의 부끄러움 없는 자세!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와 찬송! ― 이것이 바로 ‘궁극적 승리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나의 과거를 지금으로 바꾸어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의 믿음의 자세 속에 기적을 이룰 때, 옥문이 열리며 메인 사슬이 풀어지는 엄청난 승리의 기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현실적으로 분명히 있게 됩니다!! 이 궁극적 승리를 허락 받는 여러분의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