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효도

본문 내용
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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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의 효도” (잠 23:22-25)



   오늘은 우리 겨레에 있어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추석’입니다.  이날에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또 한데 모여 우의를 나눕니다만,  아마도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날의 가장 큰 행사는 바로 성묘하며 또한 제사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사의 가장 근본 된 핵심은 바로 ‘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제사’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 크리스찬은 여기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와 조상들에게 효를 행하지 않는 종교”라고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던 초창기부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믿지 않는 다른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크리스찬이라고 해서 이런 명절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도 추석을 지킵니다.  우리 크리스찬 또한 성묘도 합니다.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그런 ‘형식적인 제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신 우리는 추도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찬은 돌아가신 분들을 향해 제사 드리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조상에 대한 효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효’가 무엇인가?” ―그 의미를 생각하며 그 참된 ‘효’를 행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효도란 ‘살아있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부모님께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식’은 더 이상 효를 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효’란 살아있는 우리가 우리의 살아있는 동안, 다시 말해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동안에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사실 효를 받으실 분도 ‘살아계실 때’에 해야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분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마치셨습니다.  죽은 자식이 살아있는 부모님께 더 이상 효를 행할 수 없듯이, 돌아가신 부모님 또한 더 이상 살아있는 자녀의 효도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떠났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영역이 되었고, 그러기에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 자신 제사를 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좀 말하기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제사 드리는 분들을 어깨 너머로 보았을 때 좀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살아 계실 때 좋아하시는 입맛들이 다 있었을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인을 생각하며 그런 음식을 차린다면 그런 대로 이해라도 좀 하겠는데, 우리나라의 조상들은 돌아가신 후에는 모두가 다 하나같이 똑같은 입맛이 되어버리는지, 모든 집에서 똑같은 음식상을 차립니다.

   또 ‘홍동백서’니 뭐니 하는 제례의식들도, 귀신이 되면 그 기호도 같아져버리는지 한결같은 것이고, 또 마련하는 음식들도 정말 조상의 귀신이 와서 먹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먹겠다는 것인지 아리송한 것이 많았습니다.

   또 제사 드리는 날짜도 모든 조상들에게 같은 날짜여야 하고, 또 그나마도 집안에 좀 유력한 사람에게 사정이 생기면 그 날짜도 그 사람의 편리대로 옮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꼭 이래야 참된 효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세상에 ‘효’를 강조하는 어떤 종교들보다도 성경은 ‘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평소에 불효하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가서 후회하며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에 참된 효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십계명 말씀을 위시해서 아주 여러 곳에서 이 ‘효’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된 효도에 대하여 몇 가지를 오늘 추석을 맞이하여 다시금 깊이 우리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 1절에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효’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도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을 뒤집어 본다면, 효도를 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동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말한다면, 우선 ‘사랑’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동물에게도 사랑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그러므로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의 차이를 ‘바로 깨닫고 바로 지켜야 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을 ‘모성애’ ‘이성애’ ‘종족애’ 같은 것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데 동물에게도 ‘모성애’가 있습니다.  또 동물에게도 ‘이성애’가 있고, 동물에게도 또한 ‘종족애’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동물 중에도 모성애가 가장 강한 동물은 곰이라고 합니다.  ‘곰!’ 하면 우리는 ‘미련한 것’이라고 연상을 합니다만, 동물학자들은 곰에게 굉장한 모성애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도 오랫동안 철저히 새끼를 돌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종족애가 강하기로는 개미와 벌들을 따라갈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이성애는 모든 동물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까?


   동물은 자기 새끼를 어릴 때에만 사랑합니다.

   어미가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지극합니다.  음식을 먹일 때에도 자기가 먹었던 것을 다시 토해서까지 먹입니다.  TV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왕국’ 같은 것을 보면, 왜가리 같은 새는 입을 크게 벌려서 새끼들이 자기 뱃속의 음식들을 꺼내먹도록 하지 않습니까?  가끔 새끼들이 잘 못 쪼아서 입안에 피를 흘리면서도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지만, 일단 크고 나면 멀리해 버리고 맙니다.  새끼들도 마찬가지로, 어릴 때는 어미를 잘 따르다가도 일단 크면 어미를 몰라봅니다.  동물학자들이 말하는 바로는 일단 새끼가 크고 나면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전혀 없어져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어미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새끼들을 키웠습니다만, 늙은 어미를 봉양하는 광경을 짐승들 중에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돌아보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어미를 돌보지 않는 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야말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 받는 것이 인간의 세계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동물의 세계와 무엇이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죄송한 말입니다만, 사람가운데도 아직 덜 된 사람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동물과 같이 자식이 어릴 때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장성하면 서로 미워하고 싸웁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동물적인 수준에 머문 인간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며, 동물적인 욕망의 발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됨이란 결국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 마땅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옳으니라’고 하신 ‘옳다’는 말의 성경 원어의 뜻은 ‘착할 선자 선’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옳을 의자 의’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효도’하는 것은 ‘선행’도 ‘공로’도 아니며, 또 무슨 ‘덕’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기는 일을 무슨 굉장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효도’는 ‘평균수준’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거기에 못 미치면 ‘낙제’인 것이지요.


   효도는 마땅히 그래야 하고,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 인간에게 열 가지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두 개의 돌 비에다가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서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두 개의 돌 비 가운데, 왼쪽에는 네 가지의 계명으로 하나님에 대한 것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사람에 대한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른쪽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야 할 제일 크고 처음 되는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2절은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오른 쪽에 있는 제5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의 순서가, 그 계명들을 어겼을 때의 죄가 더 무거운 것으로부터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적질하지 말라”보다도 “간음하지 말라”가 먼저 나오는 더 무거운 것이고, “간음하지 말라”보다 “살인하지 말라”가 더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죄’보다도 더 먼저 있는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살인죄보다도 ‘더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그 계명보다도 더 중요한 첫 계명이 바로 ‘효도’라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효하는 것이 이렇게 큰 죄이기에, 이것을 범하였을 때 그 형벌 또한 막중합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부모에게 손대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21장 17절에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0장 9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 중에서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하에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어드리지요.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얼마나 엄하게 말씀하셨습니까?  그 죄가 크기에 그 형벌 또한 용서가 없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요, 명령이요 계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고서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봉독해 드린 잠언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들 중 하나입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우리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랑이란 세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보다도 못한 자를 ‘연민히 여기는 사랑’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 긍휼히 여긴다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나와 같은 위치에서 대등하게 사랑하는 ‘친애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친구간에 나누는 우정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보다도 더 높은 이에 대한 ‘우러러 보는 사랑’이 있습니다.  공경이라고도 하고, 존경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성경은 부모에 대하여 분명한 구별을 말합니다.  ‘부모를 긍휼히 여기라’가 아닙니다.  ‘공경하라’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늙은 부모를 불쌍하게 여기는 자녀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용돈이나 드리고, 효도관광이나 보내는 것으로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늙으셨다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도’가 아닙니다.  ‘효’는 존경이 앞서야 합니다.  높이는 마음!  존경과 순종을 겸한 사랑이 공경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지혜를 높여야 합니다.  그분의 명예를 인정하고, 그분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의 인격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야 그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장점만을 보고, 훌륭한 점만을 생각하는 것이 공경입니다.  그리고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저주하고 훼방하는 것은 큰 죄라고 앞에서 지적했습니다만, 부모의 명예훼손, 훼방하는 것, 업신여기는 것 등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가는 알아야 합니다.

   잠언 1장 8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 어머니의 말씀을 마치 금 사슬처럼, 면류관처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효도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자식이 어린 아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50이 넘은 아들을 놓고도 ‘길조심해라, 차조심해라, 사람조심해라’ 그러지요.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길조심해라, 차조심해라, 사람조심해라’하는 이런 어머니의 말씀을 노망처럼 생각하는 자에게 무슨 효도를 이야기하겠습니까?


   부모님을 높이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의 자녀 됨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요새는 좀 망칙한 자녀들이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아버지/어머니의 단점만 보면서, 저런 나쁜 피가 내게도 흐른다고 그의 자식됨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불효자식이지요.  부모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자녀 됨을 자랑스럽게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부모님은 거개가 우리들보다 교육을 잘 받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이면 마땅히 하여야 하는 본분입니다.

   집안에 모셔두고 음식 잘 차려 드린다고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씩 바깥바람 쏘이게 해 드린다고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문제인 것이지요.  ‘공경하는 것이, 그분을 높이는 것이’ 바로 효도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경우,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시며 흘린 아름다운 피와 땀을 우리는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년주일하고 다닐 때 들은 동화 얘기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미 들어서 알고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어떤 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자기 엄마를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혹 학교에 학부모 모임이라도 있게되면 이 엄마가 학교에 나타날까봐 그저 안절부절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엄마는 모두들 얼굴이 곱고 예쁘게 생겼는데, 자기 엄마만은 못생겨도 그렇게 못생겼을 수가 없거든요.  못생긴 것은 고사하고 눈과 볼이 아예 찌부러져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놀릴까봐 아예 학교는 물론 친구들 앞에 얼씬도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모임이 있었는데, 마침 아빠가 중요한 출장을 가고 없어서 이 엄마가 학교에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이 아이가 울고불고 야단이 났지요.  차려놓은 저녁도 팽개쳐 버리고, 자기 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버립니다.

   울고 계시던 어머니가 조용히 그 방에 들어와 머리맡에 앉아서 이야기를 합니다.  “얘야, 이 엄마가 이렇게 밉게 생겨서 정말 미안하구나,  이제껏 네게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이 엄마 얘기를 해야하겠구나.  이 엄마도 본래부터 이렇게 밉게 생기지는 않았단다.

   네가 두 살 때, 이웃집에서 난 불이 우리 집으로 옮겨 붙지를 않았겠니.  마침 너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모두들 못 들어간다고 말렸지만 난 너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어 널 이불에 싸서 구해 나왔는데, 그만 내 얼굴은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이 후로 이 아이는 달라졌습니다.  이제까지 부끄럽던 그 어머니의 얼굴이,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나를 위한 사랑이구나, 희생이었구나……!

   이제부터 모든 친구들에게 큰 소리로 자랑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가장 자랑스러운’  바로 자기 엄마의 얼굴이었습니다!!



   오늘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크리스찬의 참 효도를 나타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