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자

본문 내용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Content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 (요 15:4-14)



   아마도 우리 인생들이 서로 나누는 말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바로 ‘사랑’이란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 사람은 항상 이 사랑을 확인하고파 합니다.  이것은 ‘본능―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지어낸 얘기입니다만,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이 후, 한번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와에게 “당신, 나를 사랑하오?”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하와가 무어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아담의 질문을 받은 하와는 입을 뾰족하게 하고는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누구 딴 남자라곤 어디 있어야 말이지….”


   이 이야기는 미국 사람 남자들 사이에서 나누는 흔한 농담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허구성’을 꼬집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끔씩 부부들끼리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아도  ‘서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느냐?  누가 먼저 프로포즈를 했느냐?’ 하는 것이 자주 화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답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이 자기를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담담했었는데 저이가 날 그렇게 따라 다녀서, 그래서 구제해 주었다고 그러더군요.  여러분은 안 그러십니까?

   내가 먼저 사랑하고 반해서 쫓아다녔다고 하면 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되는 모양이지요?  가장 사랑을 나누고 있는 부부사이인데도 말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우리들과는 정 반대입니다.  ‘내가 먼저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것도 못 견디게, 미치도록 너를 사랑하노라!  그러니 내 이 사랑을 받아다오!’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우리 주님의 프로포즈인 것입니다!

   신약성경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고 분명히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보면,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16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해다오!”(9절)―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 ― 여기에 따라서 우리는 Christian이 되기도 하고, 또는 Non-Christian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에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베드로’와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너무나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둘 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하나였습니다.

   또 이 둘이 다 주님을 배반한 것도 ― 비록 그 배반의 형편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반역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 30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나, 조그만 계집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한 베드로나,  서로가 주님을 배반한 것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죄를 깨달아 뉘우친 점에 있어서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는 너무나도 통분하여 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어쩌면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지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는 배반자 가룟 유다가 되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이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그 사랑에 대한 ‘반응’ 때문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계획과 그 결과에 스스로 통분하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혹 어떤 자들에게는 이 행위가 더 깨끗하고, 남자답고, 영웅적으로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결코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랑을 받아 들였는가?  그 사랑 안에 거했는가?’ ― 여기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가 될 수 있고,  반대로 가룟 유다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크리스찬 됨의 의미’는 바로 주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응답하여 그 사랑 안에 거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하며 참된 기쁨을 누리기를 소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찾는 기쁨을 언제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이 평생 찾아 헤매는 행복은 언제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 한마디입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참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자연히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8절에 보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학교에 가서 지식을 배우고는 졸업장을 들고 떠나버리는 것뿐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제자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아닙니다.

   바로 스승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는 것이 제자였습니다.  따라서 제자란 바로 스승의 화신입니다. 분신인 것입니다.  그 제자를 보면 바로 그 스승을 알 수 있었음으로, 제자란 바로 ‘작은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다시 말해서 “내 제자가 되라”고 요구하신 것은――바로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받아 ‘작은 예수’가 됨으로서, 사람들이 바로 나를 보면 곧 예수를 본 것처럼, 그래서 예수를 알고 이해하게 하는 ‘예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제자’란 말이 대략 260회나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의 제자인 경우 한가지 뚜렷한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독특한 ‘입학금’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입학금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우리가 어떤 목표하는 것을 이룩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령 체중을 줄이려고 해도, 먹고 싶은 것을 안 먹어야 합니다!  학교 성적을 올리려고 해도, 보고 싶은 TV를 안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욕심과 편리―곧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행복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부부의 행복이란 것도, 부부간에 피차가 지불하는 그 희생의 분량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나 국가의 복지란 것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는가 하는 그 양에 따라서 올라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져야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입학금은 아주 비싼 것이지만,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할 때 오늘 본문 11절 말씀처럼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참다운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하면, 아마도 그가 누구인지를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또한 ‘크리스찬 됨’이란 이 문제 때문에 수 십 년을 고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황금’에 미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신천지를 향해 떠난 것도 사실은 황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향해 갔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인도’에는 황금이 아주 많아서 길도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 인도를 향하여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서 서쪽 대서양으로 항해해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발견하게 된 대륙도 그는 처음에 인도인 줄 알았고, 그래서 거기에 사는 원주민을 ‘인도사람’―그래서 ‘인디안’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전기에 보면, 그 후 그는 “내 이름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히 고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 ‘크리스토퍼’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업고 다니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업고 사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황금을 업고 사는 사람이 될 것인가…?!!


   젊어서는 황금에 미쳐 날뛰고 다닌 그였지만, 말년에 수도원에 들어가 몇 일을 기도한 콜럼버스는  결국 자기의 이름을 회복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곤 그 후 죽기까지 14년 간 주님의 뜻만을 위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콜럼버스는 평화롭게 미소를 띄고 운명을 하였는데, 죽기 몇 일 전에 그는 이와 같은 일기를 남겼습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지난 14년 간의 생활이었다!!”


   우리 모두 마음 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낳아도 ‘주님을 위하여 기르겠다!’

   돈을 벌어도 ‘주님을 위하여 쓰겠다!’

   재주가 있어도 ‘주님을 바치겠다!’ ― 바로 이 제자의 길!―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 사실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다시 말해서 ‘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 함으로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되리라’ 하십니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12절 이하에서 보시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어떤 총각이 회사에 새로 입사한 처녀에게 첫 눈에 반해서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제법 솔직하고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친구 현철이처럼 ‘스포츠 카’는 못 가졌습니다.  철수처럼 아버지가 보험회사의 사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그 처녀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당신은 참으로 진지하고 호감이 가는 분이시네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현철씨와 철수씨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내게 소개해 주시지 않겠어요?”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에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프로포즈를 하고 계시지만, 나는 혹 이렇게 대답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적절하고 아주 호감이 가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병이 낫는다든지 축복 받아 부자가 된다든지 하는 얘기들을 좀 더 해 주시지 않겠어요…?”


   사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랑의 대상을 딴 데서 구하고 있는 신자들을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구함은 예수의 친구의 자리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라고 말씀한 뜻은 바로 ‘예수의 사랑을 이어받는 예수의 동역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져 있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이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크신 사랑을 이어 받은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사랑! ― 또한 이 사랑을 베풀어서 이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친구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친구로서 예수로부터 인계 받은 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에게 넘치는 기쁨을 주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순간마다 ‘내가 상대를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불행을 탄식하기 전에’ 사실은 나 자신의 사랑을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조용한 이해이며, 서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또한 최선을 다한 충성입니다.  피차가 바치는 사랑의 충성으로써 인간의 약점은 보충되게 되고, 그래서 차차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 그리스도로부터 이어받은 이 사랑이 들어있으면  ‘의미 있는 역사’를 반드시 꾸미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거창한 일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고 해도, 이 사랑이 거기에 들어 있지 않는 일이었다면 ― 결국은 또 한번 무의미를 반복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더욱 예수님의 친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이어나가는 자들이 되도록 더욱 힘쓰세요.  그리 할 때 진정한 기쁨이 넘치게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너희는 가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무 몸통’과 ‘가지’는 단순히 붙잡아 메어놓는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양자 사이에는 ‘같은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붙어도 좋고 떨어져도 좋은 그런 관계가 아니지요.  이것은 생명의 관계이며, 반드시 붙어야만 하는 절대적인 ‘최우선의 관계’입니다.  바로 이 최우선되는 생명 때문에 ‘가지’는 사는 것이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혹 이런 분을 만나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교회에 다닌 지 3년, 5년, 또는 10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에 대해 자신이 없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요. ― 왜 그런 것 같습니까?

   그것은 지난 5년, 10년 동안 그저 교회를, 그것도 때론 지각도 하며, 다른 일로 결석도 해 가면서――수요집회나 새벽 기도회 같은 다른 모임들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그저 교회에 출근하였을 뿐이지,  바로 이 생명의 관계―가지와 나무와의 절대적인 ‘최우선의 관계’를 유지하여 오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에다가 놓고 계십니까?

   예수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먼저 해야 할 일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그러는 한 이 생명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 우리는 찬송 102장을 같이 불렀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여러분, 확신을 원하세요?

   참된 믿음의 생활을 원하세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미지근하고 나약한 믿음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을 원하세요?

   그 방법은 오로지 이것입니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하루의 우선순위를 정하세요.  무엇이 오늘 내가 꼭 하여야 할 일들입니까?  그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까?

   혹 예수 그리스도를 뒤로 미루어버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적어도 오늘 내가 다른 어떤 일을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한 장은 꼭 읽겠다!

   내가 단 일분만이라도 모든 일에 앞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

   내가 단 한 절만이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겠다! ―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내 믿음의 일이 나의 하루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가 되게 하세요.


   그런 다음에는 일주일을 계획해 보십시오.  이번 주간 동안의 나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혹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목숨까지 바치는 그 크신 사랑을 베풀어서 나를 구원해 주신 우리의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일이  친구 만나는 일에, 돈 버는 일에, 교외로 놀러나가는 일에 의해 뒤로 물러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은 최우선으로 지키겠다! ― 이와 같은 우선순위를 정하시고 꼭 지키도록 하세요!

   이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관계이며, 절체 절명의 관계입니다.  이 최우선순위를 지키실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하신 말씀과,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계승이요, 생명의 계승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작은 예수로서 주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예수의 친구로서 그의 사랑을 이어 나가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나의 최우선순위에 놓고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보십시오.

   그러할 때, 여러분은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며,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