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람을 입으라

본문 내용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Content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91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특별히 크리스찬으로서의 나됨의 의미, 개혁의 전통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의미를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크리스찬이란 누구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말과 모양으로 정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정의를 내리시겠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서는, “우리 크리스찬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 입은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옷을 벗고 입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복음의 성격을 아주 깊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옷을 사서 입을 때 여러분은 어떤 기분과 마음을 갖게 되십니까?

   요즈음은 옷이 아주 흔합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근의 일로서, 제가 자랄 때만 해도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소위 양복이란 것을 입어보았습니다.  그것도 교회에서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어 예배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잠바를 입고 강단에 서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서 제 아버님의 헌 양복을 청계천에 가서 고쳐서 입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 올라가서 처음으로 동대문 시장에 가서 제 옷을 사서 입게 되었는데,  새 양복을 입고 교회에 갈 때, 그 때 그 기분! ― 아마 여러분은 짐작을 하실 것입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새 양복을 처음으로 입어보니 참으로 좋긴 좋더군요. 모든 사람들이 다 나만을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좋은 옷은 더욱 사람을 우아하게 보이게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래서 여러 해 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소위 ‘옷 로비 사건’이란 게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있는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이란 아주 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옷 하나를 가지고 할아버지가 입고 나면 아버지가 입고, 다시 그것을 받아서 아들이 입는 ― 그러니까 3대를 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시체로부터 옷을 벗겨 입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얼마나 옷이 귀했겠습니까?

   그 때문에 옛날에는 옷이 하나의 귀한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또 요즈음은 옷이 아주 민주화가 되었습니다.  청바지와 케쥬얼한 옷들을 모두가 흔하게 입고 나들이를 다닙니다.  그래서 뒷모습만 보면 애기 엄마인지 아가씨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빈부 귀천, 그 신분에 따라서 옷의 모양이나 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또한 갓이나 모자, 의관을 갖추는 모양이나 정도도 다 다른 것이어서, 아무 것이나 자기가 쓰고 싶다고 쓰거나, 입고 싶다고 해서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극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갓의 모양도 그 쓴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현상은 옛날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로마나 헬라 사회에서는 물론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제사장의 옷이 다르고  왕과 왕족의 옷이 다르며,  귀족과 상민, 노예, 죄인 등등 모두가 입는 옷이 다 달랐기 때문에  자연히 옷으로 신분을 구분하게 됩니다.  이렇게 옛날에는 옷이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옷을 입는가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상인들은 두루마기가 없었습니다.

   제 할아버지만 하더라도,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외출하실 때에는 꼭 두루마리를 입고 외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옷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걸치지를 않으셨습니다.

   당시 제가 생각하기론, 아마도 할아버지께서는 스스로 ‘나는 안동 김가이다. 난 양반 집 자손으로 선비 집안이다’ 하시는 의식이 있어서 그러지 않겠는가 그렇게 여기곤, 한번은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대답하시는 말씀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무슨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것이 있겠느냐.  단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크리스찬이란 품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 중에도 스스로 품위를 지키는 사람은 의관을 함부로 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아무렇게나 걸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그 신분과 인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신분은 이러이러하니 지금까지 입었던 그 헌 옷은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옷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 크리스찬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특히 계시록 3장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옷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흰 옷’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3장 18절 말씀에서는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흰 옷은 곧 그리스도인의 옷을 말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의 옷’을 입어서 너희의 죄악 된 모습을 가리우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계시록 3장 4절 말씀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하는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옷을 다 더럽혔는데, 몇 명은 더럽히지 않고 그대로 깨끗하게 지켰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의 신분, 그 신앙, 그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4장 4절 말씀에서는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흰 옷 역시 ‘성도의 옷이요, 그리스도의 옷이며,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 말씀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 온 몸을 가리워 놓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란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은 가려지고, 그래서 그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이란 사람이 지은 ‘거지와 왕자’라는 동화에 보면, 어느 날 거지와 왕자가 장난삼아 옷을 서로 바꾸어 입었는데, 이를 신하들이 몰라보고 ‘왕자 옷’을 입은 거지는 왕자로 대접받고, ‘거지 옷’을 입은 왕자는 거리로 내몰리게 되어 고생하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비록 천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귀족의 옷을 입으면 귀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니다.  탕자에게는 탕자의 옷이 있습니다.  돼지우리에서 지내던 냄새나고 더러운 그 남루한 옷이 탕자의 옷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더럽고 추한 옷을 입은 탕자가 지금 거지가 되어 이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반기면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며 종들에게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라!” ― 이것은 바로 내 아들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분이 바뀌는 것이지요.  만약 집에 와서도 옛날 그 옷 그대로 입혀 놓았을 때와 새 옷으로 바꿔 입혔을 때에 어떤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 탕자는 이제 새 옷을 입은 후로는 그 옷에 걸맞은 생각과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속은 그 탕자 그대로이지만, 일단 옷이 바뀝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옷에 맞는 생활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헌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떠들며 소리를 지르느냐고 꾸중을 합니다만,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부르지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는, 머물러 스셔서 저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 때에 옆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성경에 보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얻어서 먹는 거지인 바디매오에게 있어서는  이 옷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6․25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 아버님께서 섬기시던 교회에 어떤 거지가 도움을 청하려 왔습니다.  마침 구제품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던 터라 옷 한 벌을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 옷을 입고부터는 그 거지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 옷을 입고 구걸을 하니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구걸을 할 땐 다시 옛날 그 거지 옷으로 바꾸어 입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거지 때의 옷을 입고서야 얻어먹을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얻어먹는 사람의 옷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으로서 얻어먹는 사람인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어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고 보면 바디매오는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를 만나면 나는 확실히 눈을 뜬다는 것이며, 다시는 이 옷을 입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달려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버렸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 새 사람을 입은 그 새 사람과  그가 입은 옷이 걸맞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새 옷을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새 옷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 해야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었습니다.  그런데 적업복을 입었을 때 매었던 짐 보따리를 등에 여전히 그대로 매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새 옷을 입으면 새 옷에 맞는, 거기에 어울리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옷에 맞는 생각, 맞는 언행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옷만 입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심령입니다.  이 심령이 새로워지고, 생각과 사상이 새로워지며,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과 더불어서  그렇게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옷’만이 새 옷이 아니라, 그 ‘새 옷’이 담고있는 상징적인 내용인 ‘사람됨’ 전부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혹 어떤 사람은 바로 이점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생각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한편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옷을 먼저 입으라’고 하는 바로 여기에  아주 중요한 복음의 깊은 뜻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의 옷을 우선 먼저 입은 다음에, 그리고는 그 옷을 입은 신분에 합당한 사람이 되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옷은 우리 주님께서 은혜의 선물로서 우리를 위해 이미 예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 말하자면 세례를 먼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그런 후에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복음의 내용이 이러한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예였고, 아무런 자격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장면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십계명을 주시고는 ‘너희들이 이 계명을 잘 지키면 너희를 구원하여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때와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이미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다음에,  그것도 홍해까지 다 건너 완전히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다음에, 애굽에서가 아니라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십계명을 주신 것은, 너희들이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은혜를 이미 입었으니―하나님의 백성이 이미 되었으니―가나안 땅을 이미 약속 받았으니,  이제 그 약속된 백성답게 이렇게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며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백성답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며 주신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 30여년 동안 목회를 해 오는 가운데 이런 분을 몇 분 본적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 지 10여 년이나 되면서도 “나는 아직 크리스찬으로서 완전히 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좀 더 믿음이 성장하면 그 때 세례를 받겠습니다” 하시는 분을 말이지요.

   저는 그 분께 이렇게 권면해 드렸습니다.  세례 받는 것은 결혼예식을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을 완전히 이룩하고서야 그때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옳습니까? ― 아니면 아직 부족한 것을 계속 느끼고는 있지만, 그러나 결혼식을 그럼에도 먼저 하고서 그리고 계속 사랑하여 나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결혼식을 하고, 그 후에 계속 사랑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직분을 맡는 것이나, 또한 성찬예식에 참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몇 해씩이나 사양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함으로 성찬에 참례하는 것이라면, 우리 가운데 단 한사람도 성찬에 참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와 똑 같은 죄인된 몸을 입으시고 오셨고, 나의 이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며, 그 의미를 마음속에 다시금 새기며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됨의 그 감격으로 더욱 그리스도의 몸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을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여기서 우리가 깨닫고 있어야 할 점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단번에 완전한 변화가 그 순간 오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사람이 변하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노력과 훈련과 과정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자란 딸이 어느 귀한 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말을 막하며 자랐는데, 이제 조심하며 행동을 하지만 교양 있는 말을 쓴다고 하는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한번은 시아버지께서 점심을 드시는데 밥알이 입가에 붙어 있습니다.  시아버지께서는 그것을 모르고 계시기에 자기 딴에는 아주 교양 있게 존대 말로서 한다는 것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시아버님 아가리에 진지가 붙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쉽게 갖추어지는 것은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람의 성품이 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예 생각조차도 하지 않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옷에 걸맞은 나의 행동을 이제는 열심히 노력하며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맞는 생각과 언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비록 거북스럽게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일단 아버지가 주신 새 옷을 입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년동안 방탕하던 사람이지만 이제부터는 깨끗이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제일 좋은 옷을 입고서도 다시 방탕한 길로 나가서야 되겠습니까?  새 옷을 입었으면 새로운 생활이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처형되는 날, 그의 사랑하는 제자 아풀로드로스가 마지막 길을 떠나는 스승을 위해서 새 옷을 한 벌 드리면서 이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가 그 옷을 받아 들고 하는 말이 “자네 생각에는 내가 평상시에 입던 이 옷이 평상시에는 맞지만, 마지막 죽는 시간에 입을 옷으로서는 마땅치 않다고 여기는군.  사실 그렇지!”  그러고는 그 새 옷을 갈아입고는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오늘 내가 주님 앞에 가야 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옷을 입어야 될 것 같습니까?

   먼저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넥타이에 양복을 입으면 아주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예 입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단 입으면, 거기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저에게 어떤 분들이 “목사님, 주일날은 그렇다고 치고, 평소에도 꼭 넥타이를 매고 나오십니까?  좀 편한 옷을 입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렇게 훈련을 받아서인지 늘 넥타이를 메고 지냅니다.

   물론 여러분들께서도 저와 같이 늘 정장을 하고 지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귀한 손님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을 하면 어떤 차림으로 가야 되겠습니까?  결코 아무렇게나 하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목사라고 알고 또 보고 있는데, 평소라고 해도 어떤 차림이면 좋겠습니까?  더더욱 저를 보는 교우 여러분 한분 한분이 모두가 다 가장 귀하신 분들이신데, 그러한 여러분을 만나는 저의 차림이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는 솔직히 어떠했으면 좋겠습니까?


   더더욱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슨 굉장한 의상을 따로 차려입거나 꼭 흰옷을 입고 나와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소한 어떤 어른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은 차림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곧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 올 때면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가는 자의 마음과 몸가짐으로 단정하게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91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종교개혁이란 중세기를 거치면서 잘못된 옷을 입고는, 거기에 치장만 거창하게 하고 있던 로마 캐톨릭 교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옷을 입는’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면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 모두 깊이 마음 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 옷을 입은 자에게 합당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도록 성령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보시며, 또한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새 옷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옷을 입지 못한 자들과는 당당히 다르게, 이 신분에 걸맞은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즈음의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지난 IMF때에도 당당히 지내온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분―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란 새 옷을 입은 사람답게 더욱 살아가며, 개혁자들의 뒤를 이으며, 더욱 하나님의 영광의 증거자가 되기에 힘쓰는 우리들로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며, 기뻐하시며, 더욱 우리에게 복을 더하여주시며, 승리의 관을 씌워주실 것임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