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주시는 평안

본문 내용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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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주시는 평안” (요 14:25-31)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인류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와 정비례하여 더 많은 불안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어느 사회학자는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우리는 세계의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과 항시, 또한 수시로 접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이전에는 몰랐던 그에 따르는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소위 ‘악플’이란 것에 시달리며 심지어는 자살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묶어지는 것으로 인하여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경제적 문제가 그 한 나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동시에 홍역을 치르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많은 정보와 혜택을 누리는가 하면, 더 많은 고민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요즈음과 같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sub-prime mortgage 사태로 인한 금융대란이 전 세계를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의 가계부에도 지금의 어려워진 경제가 크게 영향을 끼쳐서 참으로 힘든 상황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사회가 불안합니다.  경제가 불안하고 북에서 들려오는 안보사태가 불안하고, 정치가 불안하고 교육환경이 불안하고, 모든 것이 불안한 오늘을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불안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며 희망을 주시는 음성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들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겠다’는 바로 우리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란 말은 성경 헬라어 원어로서는 ‘에이레(είρή)’라고 하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히브리말로는 ‘샬롬(shalom)’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샬롬’이란 말은 대단히 뜻이 깊은 단어입니다.  이 샬롬은 단순한 정신적 평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나아가서는 사회적인 모든 평안을 종합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이나 슬픈 것, 또는 육체적인 어떤 괴로움이 있는 것을 ‘평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나라가 망하여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것 역시 ‘평안―샬롬’이 아닙니다.

   샬롬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화평,  나의 양심과의 관계에서도 완전한 화평,  그리고 이웃과 경제와 나라 등등 이 모든 관계가 다 화목한 ‘완전한 화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놀라운 평안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그 시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 지금 아무런 고민이나 불안이 없는 그런 상태에 머물러 계시면서  “너희들이 참으로 괴로워하는구나, 무척 어려운 사태 속에 있구나.  이리로 오너라.  나의 이 평안을 너희가 누리도록 힘쓰거라”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실 행복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어려운 형편의 사람을 동정하거나 또는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정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극히 작은 선심일 뿐, 그 사람은 이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사실상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동정은 때때로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위로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긍휼’이라는 말과는 구별되게 ‘체휼’이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그저 불쌍하게 여기는 그런 ‘긍휼’이 아니라,  친히 그 사람과 같은 형편 속에 거하면서 같이 느끼고, 사랑을 베풀며 함께 괴로워하며, 그러면서도 이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며 이끌어 주시는 ‘체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후면  체포되어 십자가를 져야 할 형편입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진 고난과 능욕과 고통이 다가오며, 죽음을 눈앞에 둔 가장 어려운 시간 속에 친히 계시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모든 불안과 초조와 걱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이 말씀이 주시는 그 의미는 참으로 깊은 것입니다!!


   이 샬롬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평안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써, 모든 근심과 고난을 소화해 버리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다 몰아내 주는 그런 평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근심이 있다고 해도, 어떤 큰 기쁨을 얻게 되면 조그마한 근심들은 다 사라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번 아이들을 키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평소 아이들이 공부 안 한다고,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이가 지금 몹시 아파서 누워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십니까?  “개구쟁이라도 좋다.  제발 건강히 낫기만 해 다오”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간절한 소원이 되지 않습니까?

  

   아주 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작은 문제를 다 잊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큰 기쁨을 하나 얻으면 작은 문제들은 다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샬롬이란 큰 기쁨으로 얻는 평안이므로, 부분적으로 실패하고, 성공하고, 고난 당하고 하는 것!―그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먼저 평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앞에 십자가는 다가오고,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한심한 상태이며, 특히 배반자 가룟 유다가 거기 끼어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기쁨과 평안을 얻을 일이 없는 사면초가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평안을 누리며 기뻐하는 주님의 모습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비법과 그 신비를 알면, 우리도 어떤 고난이나 어떤 문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돈 때문이나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  대단히 깊고  신비로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절대적인 동시에 결정된 기쁨입니다.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했고, 결정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망설일 때에  기쁨이 없고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고 나면, 더 이상의 흔들림과 불안이 없습니다.  진정한 샬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평안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평안이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야 있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살아있는 사람 치고 행복과 평안을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정신이 좀 이상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다 행복과 평안을 소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이 행복과 평안을 소원하는 대로 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행복과 평안이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지 않겠습니까?!

   평안이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먹기에 달렸거나, 개인의 수양에 달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 세상의 평안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대게 소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돈이나 지위를 얻으면 기뻐하지만, 이 기쁨은 순간적입니다.  그러기에 부자들의 경우를 보면 가진 것 때문에 늘 불안하여 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난할 때’가 ‘많이 소유했을 때’보다도 더 편안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늘 정반대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떤 현인은 이 소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소유라고 하는 것은 마치 갈증이 났을 때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심해지는 것처럼, 소유라고 하는 것은 소유를 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나며, 그래서 그만큼 불안은 더욱 더 가중되게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모두가 순간적이고 찰나적이어서, 피곤하고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게 됩니다.  마치 그림자와 같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만이 참 평안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평안―샬롬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는 ‘성령’이 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성령이란 이미 여러 차례 제가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파라크레이토스’란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는 “옆에서 말한다, 돕는다”란 뜻으로서 ‘위로자, 변호사, 나를 돕는 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보혜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평안을  성령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먼저, 이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평안합니다.  사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지, 알고 나면 평안한 것입니다.

   심해에서 잠수복을 입고 탐사를 하는 다이버들이 하는 고백을 들어보세요. 사실 처음 들어가는 바다는 몹시 불안하다고 합니다.  그 어두운 안에 무엇이 있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비를 가지고 그 안을 환히 밝히면, 또 계속 그 속을 드나들면서 그 안의 모든 상태를 알고 나면, 불안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 신비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알게 되므로, 평안하게 하십니다!!



   다음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듣고 본 것을 필요한 때에 생각나게 함으로 평안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밤이 새도록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는데, 시험 보는 현장에서 생각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평소부터 많이 읽고 또 많이 배워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활 현장에서 사건을 만날 때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말씀들이 생각이 나서 나의 발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효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임으로,  생각나게 하는 바로 이 일을 성령께서 친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필요한 때에 생각나게 하신다’는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든든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말씀을 듣고 잊어버릴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열심히만 들어두면, 성령께서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말씀이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필요한 때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적절히 생각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참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고 주님께서는 그 다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님께서는 ‘죽음’을 간단하게 표현해서 ‘갔다가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을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사실 생각해 보세요.  과정이 조금 복잡한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러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안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불안한 이유는 마지막이 어떻게 끝맺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령, 끝에 가서 성공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중도의 실패와 고생은 귀한 경험으로서 좋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만 한다면, 고생해도 좋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그 마지막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내가 주는 평안으로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을 일으켰던 요한 웨슬리에게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웨슬리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있는데, 웨슬리는 오히려 평안히 앉아서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선장이 “지금 죽을 지경인데 당신은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있소?  당신의 하나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나 좀 하십시오”하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 때 웨슬리는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다 잘 가게 될 것입니다.  천당으로든 미국으로든, 둘 중에 한 곳은 가게 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풍랑으로 인하여 바다에 빠지면 천당을 갈 것이고, 무사하면 미국에 갈 것이니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자세인 것입니다!  천당 가는 티켓은 이미 받았으니, 남은 생애가 좀 복잡하면 어떠하고, 고생하면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결과를 아시기에, ‘갔다 온다’고 하시며 마지막 약속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두고도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말 것임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우연이라고 말하지 마십시다.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사건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늘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표현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지만, 내용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뻐하였으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뜻’과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사랑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백 번 천 번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저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으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함을 내가 확신한다면, 이와 같은 평안을 우리는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그 장면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사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침통하며 숨막히는 순간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담은 어떤 영화를 보니까,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든지 이것 모두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  “네, 믿습니다.”

   “좋다. 그럼 여기 누워라.” ― 이삭은 순종하여 그대로 눕고, 아버지는 제물을 위해 아들을 향하여 칼을 높이 듭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  죽이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므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 전개되는 사건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있게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고, 그래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십니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은 배신한 베드로에게도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했고, 근심과 걱정의 사람이 되었는지 아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의미가 포함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되고, 그래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평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세상 임금이 오겠다’는 뜻은 ‘지금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군사, 가야바의 군사들이 잡으려 달려오고 있지만, 예수님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저들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단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사건이 있을 뿐이라고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이 위기를 바라보시면서, 오히려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가 명한 대로 내가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는 계기요 기회라고 보고 계십니다.

   사실 ‘내가 사랑함을’,  ‘내가 순종함을’ 어떻게 나타내시겠습니까?  “내가 사랑합니다”,  “내가 순종합니다” 하고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그냥 되는 것이겠습니까…? ― 바로 이점인 것이지요!

   그래서 다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고, 그러기에 결국에는 승리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은, 바로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오히려 평안을 누리며 승리하는 생활을 하는 믿음의 사람임을 더욱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 증거 해 보여주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속에 더욱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어라! 사랑하라!  그리하면 내 평안을 너희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깊은 뜻을 알고, 신비로운 의미를 바라보시며, 그래서 앞에 있는 영광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1월,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더욱 넘치는 감사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우리 주님처럼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오히려 충만하셨던 그 놀라운 주님의 샬롬이  오늘의 어려운 현실에서 오히려 더욱 믿음의 생활을 굳건히 하고, 더욱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활에  더욱 넘치도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