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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 21:7-14)
우리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계획하며, 또 그 계획한 목적을 위해 굳게 결심하며 각오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죽기로 각오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사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결심하고, 그리곤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우리는 무슨 일이고간에 다 성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과연 이대로 잘 될 것인가?’하는 확신을 하지 못해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됩니다. 그러할 때는 우리의 각오 또한 흔들리게 마련인 것이지요. 사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반신반의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확신이 없는 데에, 이럴까 저럴까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온 한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얘기입니다. 일본사람들에게 이런 격언이 있다고 합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고,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아라. 그러나 죽을까 말까 할 때에는 죽어라.” ― 사실 생각해 보면 매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결정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실패란 무엇입니까? 결국은 ‘이렇게 바칠만한 가치가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할 만한 일이 못되는 것을 하다가, 이제 세월 다 지나간 다음에 와서 ‘잘못 살았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 인생 되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 이게 바로 비참한 것이지요. 그런고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순간순간 어느 때에든지―― 젊었을 때에든지 어렸을 때에든지 늙었을 때에든지 어떤 사건에 접했든지 간에――‘이것을 위해서 내가 죽을 각오가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전력투구하는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에 있어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3절 말씀처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리로 갑니다. 여러분, 모르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께서 그 사실을 미리 일러 주셨고, 또한 여러 동지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강한 만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와 같은 각오와 결심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또한 주위의 강력한 만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하였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바울은 그와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먼저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이 사실을 놓고 바울은 ‘이것은 확실히 신앙의 길이다’하는 확신을 하고 있었음으로 그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다시 말해서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이 길이 바른 길이라는 것!―또 복음전파하는 사명에 있어서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자기가 복음전파하는 이것이 바로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기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택정함을 받았노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요,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것은 복음 전하는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다, 이것이 합당한 길이다’ 하고 바울은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내가 달려갈 길!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명!!, 이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함께,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번에 올라가는 길이 바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당시 예루살렘 일대에는 오랜 가뭄으로 인해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전도여행 하는 가운데 모아졌던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고통 받고 있는 형제들에게 전달해 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일을 마치려 함에 있어서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보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바울은 굳은 결심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또한 깊이 생각하며 마음에 새겨야 할 중요한 사실들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고 하면, 바로 그의 결심이 흔들릴 수 있는 그런 경우들을 그는 만나고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점입니다.
먼저는,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 바로 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결단하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다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앞에 있는 바로 이 사건―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바로 이 사건을 놓고 ‘정말 지금 이것이 꼭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고민하신 것도 어쩌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하시자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무섭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내일 아침 이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후에 받은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일 아침 빌라도 법정에 나가서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 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아버지께서 십자가라는 이 잔을 오늘 내게 주시는 것이다. 십자가라고 하는 이 엄청난 현실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실히 믿고, 그 응답을 받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구체적 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도 예수님처럼,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굳은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 길로 담대히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에 있어서 깊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대목이 나타납니다.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예언을 하지요: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 바로 앞 4절에도 보면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가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보세요, 성령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성령을 성삼위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만약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면, 무조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성령께서 하신 말씀인가? 그것이 바로 성령의 지시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바로 여기에 혼돈이 있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구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20장 22절과 23절을 참조해 보면 우리는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시지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로 여기서 분명한 해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먼저 일러주셨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결심을 굳게 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가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핍박이 있다’는 것은 성령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가보 선지자를 통한 예언에서도 분명히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게 되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성령이 아니라 자기들이 한 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참으로 주의하고 또한 조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바로 그 점인 것입니다. 그들이 핍박이 있는 것까지는 성령의 계시에 의해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응용한 것이 ‘그런고로 가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한 것은 성령의 지시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해석이었을 뿐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에도 보면 바로 이점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과 ‘자신의 해석!’―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주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응용!―이것이 항상 문제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여기 있는데, 이것을 현실적으로 응용해 나감에 있어서 거기에 인간적인 불신앙이나, 인간적인 욕정이나, 인간적인 어떤 해석이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빌립의 집에 들어가 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를 만납니다. 여기 ‘선지자’라고 하는 말은 그 당시 유대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런 ‘선지자의 개념’에 따라 이해하면 됩니다. 그 당시에는 구약시대에서처럼 ‘선지자’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입을 열어 말하게 되면, 그를 선지자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그리고는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자들의 결론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런 감동을 받은 사람이 이것을 알고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고 ‘올라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하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인정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사건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게 결심을 하셨습니다. 어떤 결심이냐 하면,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하는 그러한 각오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지금 제사장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말씀해서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시고, 그리고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모르고 결심하신 것이 아니었어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습니까? 괜찮을 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갔더니, 덜컥 핍박이 있고 체포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미리 알았어요. 그런데도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알고 갔고, 알고 당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고난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죽을 수도 있고, 어쩌다가 순교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실질적 의미에서 순교라고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다 알고, 결심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진작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미리 알고 가는 길이니, 자연히 거기에는 전혀 엉뚱한 결과들도 이 길에 따르게 된다는 점을 미리 예측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 예측이 또한 우리의 결심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고, 또한 많은 문제를 감수하셔야만 하는 것들이 미라 다 예측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예수님은 나약하다’든지, 십자가를 지실 때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능력이 없는가 보다. 그 동안의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다 허깨비였나 보다. 그는 사기꾼이 아닌가?’ 하는 비난까지 따르게 될 것임을 예측할 수가 있거든요.
일찍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에,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이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7)” 하고 말했는데, 여기서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성경까지 인용하여 말하며 뛰어내리라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 뛰어내리면 못 뛰어내린 것이 되고, 못 뛰어내리면 비겁하다느니 나약하다느니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겠노라!” 그런데 여기서 안 뛰어 내리면 못 뛰어 내리시는 것이 되고, 못 뛰어내리시니 무능한 것이 되고…… 참으로 오해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전후 사정을 잘 알지만 어떤 때에는 참습니다. 참고 있으니까 무시당하지요. 모르는 척하면 모르는 것이 되지요, 바보가 됩니다. 사실 알고도 가만히 있는데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그것을 못 참고 ‘에잇’하면, 그 때에는 일이 터져버리고 맙니다. 참으로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바로 이점에 있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시며 말씀해 주시는 경우를, 여러분 모두가 다 깊이 생각하시며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사건이 거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실 때,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하시면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핍박을 받고 죽을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즉각 만류하는 말을 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서 베드로의 모습을 곰곰이 한번 살펴보세요.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은 그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는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도 인정하고, 메시야 됨도 인정하고, 그리스도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십자가는 부정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그는 사탄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을 하였던 바로 그러한 그가 사탄이 되고 마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따로 없습니다. 십자가는 부정해 버리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에게 이같이 말씀하신 직후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를 해석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 ―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내가 져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 한마디 안하고 있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는데, 내가 바보가 안 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사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바보가 되어도 좋고, 무능한 사람이 되어도 좋고, 어리석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의를 위하여, 자기 명예를 위하여,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사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나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사탄이 유혹합니다. 유혹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좀 비껴가면 되지 않느냐? 왜 그리고 가느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갈릴리고 가면 되지 않느냐? 로마로 바로 가면 되지 않느냐?’ ‘구제금은 왜 네게 직접 예루살렘에 전해 주어야 하느냐? 디모데의 손을 통해 보내주고 너는 로마로 가라. 왜 위험한 일을 네가 맡으려고 하느냐? 로마로 가면 거기서 얼마나 더 큰 일을 네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또한 이와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십자가? 물론 져야 하겠지. 그래 져라.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 조금 더 있다가 져도 되지, 세른 세 살이 아깝지 않느냐? 다른 기회도 얼마든지 많을 것이니 그 때 가서 십자가를 져라! 차차 십자가를 져라!’ 사탄은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이번 이 일에서가 아니라 다른 일에서, 또 하필이면 네가 하느냐,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 이런 시험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격언에 사탄의 시험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어떤 유혹을 할 때에 ‘누구든지 다 하는 일인데’ 한답니다. 또한 ‘이 까짓것 별것도 아닌데’ ‘이번 한 번뿐이다.’ 그리고는 ‘앞날이 많은데 뭐’ 하고 유혹을 한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얘기이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에 꼭 이런 유혹이 따라옵니다. ‘비켜가라, 이 길 아니고도 다른 길이 있지 않느냐? 너 아니면 사람이 없느냐, 이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더냐? 네가 십자가를 지다니, 너는 바보다, 무능하구나, 앞으로 있을 숱한 오해와 비난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 그래서 목숨은 바칠 수 있는데 명예는 못 바칩니다. 물질은 바칠 수 있는데 자존심은 못 바칩니다. 이래서 십자가를 기피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참으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또한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할 유혹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죽겠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도바울에게는 꿈이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서 15장 23절과 28절을 보면, 거기서부터 다시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서는 땅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럽대륙의 끝인 서바나―바로 오늘의 스페인으로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로마에 못가도 좋아―서바나로 못가도 좋아―예루살렘에서 내가 죽어도 좋아―그래도 예루살렘으로 가겠노라’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잘 못 내리기 쉬운 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를 그의 꿈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스페인을 그의 목적지로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핑계삼아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피해가려고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앞으로 더 큰 일을 하겠다며 ‘현재의 일’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굉장한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내게 지금 맡겨진 내 몫의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결론지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바로 거기에 가는 것이 진정 목적인가? 스페인, 거기에 가는 것이 과연 목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로마’가 목적이 아니고 ‘스페인’이 목적이 아닙니다! ‘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이것이 바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로마에 가게 되면 가는 것이고, 못 가게 되면 못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스페인에 가게 되면 가는 것이고, 못 가게 되면 못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로마에 가는 것’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한 것인 줄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와, ‘주 예수의 이름’의 선후관계와 또한 우선순위를 우리는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바울의 분명한 우선순위의 선택과 이에 따른 결단 앞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하든 사람들 모두가 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순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또한 보게 됩니다. “주의 뜻대로!”―이것이 결론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이 불굴의 결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어진 현실에 허신하고, 또 내 앞에 있는 이 일에 충성을 다하는데 생명을 거는, 그런 결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 ―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같은 생이 우리 모두에게도 확실히 이어지도록, 성령께서 이 사순절 기간을 지키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더욱 함께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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