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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옛날에는 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질병들로 인해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이 현대인들의 병은 대부분이 다 스트레스로부터 기인한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은 또한 대부분이 다 근심과 걱정에서부터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란 이 자체가 ‘염려와 걱정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 자식걱정, 남편걱정, 친구걱정. 비즈니스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그야말로 첩첩이 염려 투성이들이지요. 그래서 이런 염려 투성이의 인생이기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울면서 태어나게 된다고 어떤 시인은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염려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꽉 차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어떻게 하면 이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하는 데로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열심히 골프를 치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바둑을 두고, 어떤 분들은 극장에 가기도 하고, 또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 순간만은 염려에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우리의 염려를 순간적으로 잊게는 해 줄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골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골프를 치시는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걱정과 염려스러운 것이 꽉 차있을 땐 오히려 공도 잘 맞지 아니하고, 스트레스가 더 쌓이게 되니까 차라리 치러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바둑을 두시는 분들도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느 프로기사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컨디션이 좋아야 잘 둬지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패착만 두게 되고, 차라리 두지 않는 게 났다고 하였습니다.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염려와 걱정이 없어야지, 조그만 걱정이라도 가지고 떠난다면 그것이 잊어지기는커녕, 멀리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심해질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멀리 어디를 나가게 되었는데, 막상 나가다가 보니까 문득 부엌에 가스를 끄지 않은 것 같다는 염려를 하는 경우 말입니다. ‘국솥을 내가 가스를 끄고 내려놓았던가? 때로는 문을 잠그지 않고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염려가 생기게 되면,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확인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떠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행이란 아예 가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이렇게 염려스러운 것이 많은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인데, 그러면 우리 인생에서 이 ‘염려’라는 문제!―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염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염려하지 말아야 할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오늘 본문말씀을 우리 모두가 다 자세히 살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염려를 많이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사실 알고 보면 ‘보다 큰 염려’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염려하고 있는 내용들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세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의외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시한 일들로 염려를 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6․25를 경험해 보신 분들은 실감하실 것입니다. 피난 내려가면서 학교 성적걱정, 직장걱정을 해보신 분 있으십니까?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염려들! ― 그때라고 왜 없었겠습니까만,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부부싸움, 사랑싸움을 할 여유가 어디 조금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정말 큰일을 당하면, 다른 염려들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자녀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을 하시지요. 그런데, 자녀들이 공부를 못하고, 말썽을 부리고, 순종을 하지 않아서 염려가 많던 부모에게 갑자기 그 아이가 앓아눕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공부 잘 하는 것은 아예 뒷전이 되어버리고, 공부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기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개구쟁이라도 좋으니 제발 일어나 뛰어다니기만을 바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더 큰 걱정이 있으면 작은 걱정들은 사라지므로, 결국 우리가 하는 염려라고 하는 것은 ‘다 사소한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걱정이 많습니까? 염려되는 것이 많습니까?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본다면, 결국 나에게 걱정이 많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스스로가 작은 일에만 늘 매달려 있다’는 것을 시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는 염려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염려란 쓸데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 자나 더 키울 수는 절대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염려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란, 사실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것이지요!
심리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주로 염려하는 것들을 조사하여 나열해 보니까, 놀랍게도 3분의 2가 넘는 것들이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30%도 채 되지 못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한번 조사하여 보세요. 과거에 무엇에 대하여 여러분은 그렇게도 염려하였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염려가 과연 어떠합니까? 요즈음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왜 내가 그걸 가지고 그렇게도 염려했던고?’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훗날 그 때가서 오늘의 염려한 것들을 되돌아 볼 때, 똑 같은 결과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미래’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 할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염려해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타시던 배를 몰고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이 때 친구들이 염려해서 “네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었고 네 할아버지도 바다에서 죽었는데, 너마저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느냐?”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 때 그 아들은 친구들에게 묻기를 “그럼 너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어디서 죽었느냐?”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가 다 침대에서 죽었지!” “그래? 침대에서 죽었지?! 그런데 자네는 오늘 밤 어디서 잘 것인가? 여전히 침대에서 자겠지?” ―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하는 걱정이란 게 사실 다 이와 같은 것들인 것입니다.
“너희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음 세 번째로, 본문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바로 불신앙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생명을 위하여 양식을 주실 것을 마땅히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숨을 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목숨을 보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정말 일용할 양식이 따로 없습니다. 해마다, 해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니 우리가 먹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돌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한때 우리나라도 소위 ‘보릿고개’라고, 먹을 양식을 걱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방글라데시나 비아프라, 에티오피아 등지의 기근으로 인한 어려운 소식을 자주 접하지만, 그게 다 비가 오지 않아서 굶주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도 비아프라처럼 3년 동안만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3년만 비가 끊어지면, 이 땅이 다 사막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양식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며,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는 바로 ‘신앙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과 염려는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염려가 높아지면 신앙이 내려가고, 반대로 신앙이 높아지면 염려는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걱정과 괴로움이 쌓이고 있습니까? 그러면 믿음이 내려간 줄로 아시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 안에는, 걱정이 들어갈 곳이라고는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우리는 간혹 어떤 사람에 대해 염려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턴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을 주장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우리는 또한 자녀들을 염려합니다. 자녀를 생각하면 한시도 안심이 되지 않고, 그들의 장래가 불안하십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자녀들을 바라보세요! 믿지 않기로 들면, 이 세상에서 믿을만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리석게도 지금 염려하고 있는 그 사건만 해결되면 문제는 다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여러분이 이미 경험하여서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이 인생살이 자체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분이 계신데, 나이가 많이 든 따님을 두고 늘 걱정하며 염려가 태산 같습니다. 그래서 “난, 저 아이만 시집보내고 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곤 그 후에 그 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이젠 아무런 염려가 없으시지요? 그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게 아닙니다. 그 분 말씀이 요즈음 또 다른 염려가 있는데, 그 애가 나이가 많아서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가 있을는지 그게 그냥 걱정이랍니다. 아마도 그 분은 손자를 본 후에도, 그 애가 커서 나중에 결혼할 것까지 계속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염려라고 하는 것! ― 여러분, 걱정이라는 게 다 이와 같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이, 그리곤 또 다음의 걱정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따라서 염려란 염려함으로서는 결단코 해결이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해결의 방법은 오직 하나! ― 믿음뿐입니다. 따라서 염려를 위한 염려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믿음을 위해서 노력하면, 염려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 자체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더하여 주십사고 간구해야만 합니다. 그러할 때, 이 모든 근심 걱정은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절 6절과 7절에 우리가 꼭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p.32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 대신에 감사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감사와 기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엎드려 “하나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니, 내가 나의 필요를 아는 것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건강이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고, 직장이 잘 되어야 함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 ‘아멘’하실 수 있으십니까?
요즘은 전 세계적으로 밀어닥친 금융사태로 인한 경제불황은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염려 속에 잠기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특히 오늘의 이 염려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깊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결론적으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이와 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오히려 더욱 정금같이 고귀한 것으로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욥기를 통하여, 욥이 그 모든 환란을 겪을 때 그는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0:25-26, 23:10) ―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욥이었기에 그에게 임한 그 결국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역경을 딛고 일어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간증들――그들에게 임했던 그 어려운 역경들을 오히려 믿음으로 받아들였더니, 그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었더라는 생생한 간증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듣고 있지 않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확신 속에서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열심을 다함으로, 승리의 확신 속에서 힘차게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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