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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34)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이란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날을 기점으로 하여 부활주일까지,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의 날―일요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는 바로 이 사순절로 요약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고,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소개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적절하게 소개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여기 세례요한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이 말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기독교를 이해한 것이며 성경의 골수를 아는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66권을 다 외운다고 하더라도, 이 말의 뜻을 모른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어린양이란 그 말을 왜 모를까’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말로써 자기의 뜻과 생각을 표현하며 전달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가끔씩 그런 경우를 경험하실 것입니다만, 사실 우리 인간의 언어란 참으로 제한적이고 부족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할 때 적절한 말들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경우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땐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생각을 나타내십니까? 대부분 그럴 경우에는 어떤 상징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한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 교회에는 아기를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어떤 분이 귀여운 아기를 안고 교회에 나오던가 하면 사람들이 그 아기의 예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 참 인형과 같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려면 산 아이를 물건으로 만든 인형과 같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기껏 예쁘다는 것이 인형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예쁜 인형을 보고는 “그것 참 진짜 어린애 같다”고 말을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말이란 완전한 표현을 하기에는 항상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상징적 언어를 쓰게 마련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상징하는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을 두고 생각할 때, 예수님의 일생을 포함한 뜻 ― 곧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으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구주가 되시는 그 예수를 바라보면서 단숨에 무엇이라고 해야 그나마 만족한 표현이 되겠습니까? 이런 저런 언어로 다 맞추어 보아도, 말은 항상 부족할 뿐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어린양’이라는 말 속에 그 모든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징하는 바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그 상징하는 사건에 우리가 직접 겪고 체험하는 일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 된 도리에서 자식에게 계속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마침내는 “너도 이제 부모가 되어 보아라” 하는 말밖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을 봅니다. 되어 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공부에 대한 충고도 그렇습니다. 젊은 자식을 앞에 놓고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이니? 이제와 생각하니 공부 안한 것밖에 후회되는 것이 없더라. 그러니 너는 그런 일이 없도록 열심히 해라”하며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잘 알아듣지를 못하고, 때로는 ‘엄마는 엄마고, 아빠는 아빠고’하면서 반발까지 하지 않습니까? 결국은 또 그 나이가 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그러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치적으로야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그 진정한 뜻이 전달되기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어느 유명한 철학자의 말도 아닌, 그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기가 쉽더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돈은 많이 벌었는데, 부인은 지금 병원에 누워있는가 하면, 남편 되는 자신도 진찰 결과가 못 고칠 병인가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게 많이 벌어 놓았지만 먹기는 보리죽만 먹고 앉았으니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일을 안 하고 논다고 해서 건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까지 해쳐 가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 하나를 깨닫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겪고 나서야―체험하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두 신구약 66권으로써 참으로 많은 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흔히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암송도 하시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독생자’―이 ‘외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뜻을 알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단어의 뜻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아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 하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고생시키신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외아들, 그것도 백세에 주시고는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주신 것입니다. 다름 아닌 독생자 예수를 주셨다고 하는 이 한마디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많은 사건이 이루어지고, 그 많은 역사가 기록됩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를 가르치기 위한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하면, 그러한 상징적 사건에 부딪힐 때만이 이 상징적 언어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어린 양’이라고 하는 이 말의 뜻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기에 기록된 그 많은 제사와 피 흘리는 이야기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도살장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모든 유대인들이 레위기에 기록된 그 많은 제사를 매일같이 드리고 있었으니, 그야 말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그 많은 소와 양들의 피가 정말이지 엄청나게 흐르고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제사와 피흘림은 오직 하나 ― 예수를 증거하자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어린앙이다”라고 하는 그 말을 가르치기 위해서 수천 년 동안 성전 안에서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처럼 그 뜻을 전한다는 것! ―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요한은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사실상 모든 뜻이 다 들어가 있는 ‘상징적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할 때, 그 요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속죄물’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양’으로 표현했다고 하여 그저 양은 순진하고 착하니까 그런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어린양’의 뜻은 죄를 대속하는 ‘속죄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이해하십니까?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로, 혹은 경제가로, 또 어떤 이들은 훌륭한 성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기적을 나타내는 마술사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고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에 보면, 병 고친 이야기, 떡을 먹이신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 그 외 갖가지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들과 문맥의 흐름은 바로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와 같은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분이신데, 그가 나를 위해서―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 굶주려주셨습니다. 그가 괴로워하여 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사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분이신데, 그러나 죽으셨습니다! ―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사로가 다시 사는 사건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게 되면 성경에서의 한 말씀 한 말씀. 한 사건 한 사건이 정말이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규명하자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 그것은 한 인간의 죽음입니까? 아니면 혁명가의 실패입니까? 혹은 하나의 어떤 사건입니까? 그런데, 여기 성경이 말하는 ‘어린양’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단에 바쳐진 하나의 소중한 제물입니다. 그러니까 갈보리 언덕이 다름 아닌 하나의 제단이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위에 바쳐진 제물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9장 12절 말씀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제물이라고 했을 때, 이 제물에서 흐르는 피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본래 드리던 양과 소의 피는 모두가 다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인 것이며, 이제 본체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가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민의 죄, 곧 내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예수의 제사성과 십자가의 속죄성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또한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해주시는데 이와 같은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제사법을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까? 그 제사는 왜 드려야 하고, 누구를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잘못 이해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그들은 잘 못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직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피비린내’나 ‘고기타는 냄새’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1장 1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우리가 어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침으로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피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지불하고 있는 그 엄청난 희생을 바로 그 제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자기의 죄를 위해서 희생의 제사를 매번 드렸는데, 그 제사의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제물이 될 양의 머리에 죄인이 먼저 자기 손을 얹고 회개의 기도를 함으로서 죄를 전가시키는 의식을 취한 후에 그 다음 그 양을 잡아 불사르게 되는데, 이때에 죄인은 그 제단 앞에서 제물이 불타고 있는 동안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속죄양이 지금 불에 타 죽을 때에 바로 내가 죽는 마음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이 속죄를 어톤먼트(atonement)라고 하는데, ‘어톤먼트’라는 말은 at과 one과 ment란 세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서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속죄라고 하는 것은 속죄물과 내가 하나가 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고귀한 희생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것만을 본다면 아직도 십자가를 바로 보고 있는 것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거기에서 죽은 것입니다!
거의 모든 개신교회들에는 강단 중앙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를 드리시며 저기 저 십자가를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저 십자가를 보실 때마다 거기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 개신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성체가 매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 천주교회에 가보면 십자가에 예수님의 성체가 매달려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한 개혁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업적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성체를 떼어 낸 것이라고 신학자들을 말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성체가 거기에 여전히 달려 있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실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만을 생각하며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저 십자가를 다시 한 번 깊은 마음으로 바라보세요. 여러분은 거기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십니까? ―― 불쌍하신 예수님! 아무 죄도 없이 매맞으시고, 모진 고초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부르짖으며 돌아가신 불쌍한 우리 예수님! 그러나 다시금 십자가를 보세요. 누구의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저기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거기에서 바로 여러분의 죄를 보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고는 다시금 십자가를 깊은 마음으로 바라보세요. 저기에 바로 여러분의 죄가, 아니 죄 많은 여러분―바로 당신 자신이 매달려 죽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까?
십자가! 세상 죄! 아니 나의 죄! 속죄! ― Atonement! ― at-one-ment! 하나 됨! 일체감!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시는 것과 같은 고백을 우리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는 말씀 속에는 바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 속에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동물이 하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세례 받으실 때, 또한 왜 하필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입니까? 왜 나타나신 것입니까? 여기서 ‘비둘기 모양’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양’이란 말과 함께 우리가 성경 전체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것부터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란 죄인이 죄 씻음의 상징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을 필요가 도무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죄인이 아닌 자가 죄인인 것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 여기에서부터 이미 십자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의 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흔히 비둘기를 순결하다, 유순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주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여러분,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본문은 ‘비둘기’가 아니라 ‘비둘기 같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둘기 같이!!
그런데,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했다는 이 사실! ―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세례 요한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향해 세례를 받으시는 자세로 이렇게 서있고, 이제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게 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을 본 사람이 누구냐 할 때 ―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보여 주신 그 이유는 바로 세례요한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보여 주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그 이유가 또한 나타나고 있는데, 세례요한이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그러니까 성령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할 때,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한 분명히 깨달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했다면, 그러면 그 이전에는 성령을 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복음서에서 보는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이었던 마리아가 잉태를 할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여기에서 임했던 성령은 무엇인가 할 때, 이것은 바로 증거의 의미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 보게 하고, 그로 하여금 예수의 대속을 깨달아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서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하며 큰 역사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것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분명히 보는 바와 같이, 이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신앙고백을 할 때, 이미 성령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령을 가리켜서 성경은 두 가지로 표현을 하시는데, 하나는 ‘구원의 영’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증거의 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내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심을 봄으로써 이분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분을 중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어린 양’과 ‘비둘기’라는 두 가지의 상징물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성경엔 이와 같은 상징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상징이란 우리가 친히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봄으로써 깨달아 알게 하고, 그리고는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예가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서양을 지나가던 배 한 척이 파선을 하게 되어, 승객 모두가 구명대를 차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치된 구명대가 모자라서, 한 가족에 오직 한 개의 구명대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아이 하나를 데리고 여행하던 부부가 있었는데, 한 개의 구명대로는 모두가 몰살할 것이기에, 아이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그 구명대를 주면서 ‘당신이 아이를 안고 이 구명대를 가지고 바다에 뛰어들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래도 헤엄치다가 지쳐서 죽게 되겠지만, ‘훗날 아들이 자라거든 아버지가 구명대를 너에게 주시고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 부인은 그 구명대를 보관해 놓았습니다. 아이들이란 자라면서 말썽을 부리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이 아들 역시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구명대를 보여주며, 너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너의 아버지는 이 구명대를 우리에게 주시고 대신 죽었다고 말해줍니다. 이 구명대가 바로 그 증거다고 말이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변했겠습니까? 그 구명대를 볼 때마다, 그 구명대는 그저 하나의 구명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상징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 구명대는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해 주며, 그리고 어떻게 내가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우리가 지키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도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 구원과 그 사랑과 내게 주시는 사명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러한 감동과 결단으로 이 사순절을 지키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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