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나를 찾아 주시는 주님

본문 내용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Content

“돌이켜 나를 찾아주시는 주님” (막 5:25-34)


   우리 인생은 살아가는 가운데  누구나 다 여러 가지 괴로움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 여기까지 오는 가운데에도 그 많은 괴로움들!―우리는 이미 경험해 보았습니다만,  여러분 생각에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괴로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물론 우리 각 사람 개개인에 따라서 ‘그 내용과 또한 그 양’에 있어서는 서로가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것은 아마도 ‘고독’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고통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럭저럭 감수하며 견뎌내지만, 유독 ‘고독’만은 이를 견디지를 못하고, 그래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그 관심’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러한 기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보석을 가졌다고 해도, 남들이 그것을 보면서 칭찬해 주고 부러워해 주지 않으면  도무지 가졌다는 기쁨이 생기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자랑하고프고, 또 자랑할 때 부러워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에는 그렇게도 서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든지, 새 옷을 해 입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한 것은, 우리 인류사회는 그 문화와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이와 같은 ‘인간관계, 관심의 관계’는 계속 무너져만 가고;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사람이 많이 모이면 많아질수록―사람은 계속 개인주의가 되어버리고;  그래서 단절과 소외됨은 더욱 더 커져만 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옛날에 비해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정말이지 얼마나 발달하였고 얼마나 편리해진 사회입니까?  그것도 시골보다도 도회지일수록  더 편리한 환경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이 서울에서 사는 우리들! ― 어떻습니까? 바로 이 ‘인간 상호관계의 단절’을 너무나도 잘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살고 있습니다.  문만 열면 바로 옆이 사람이요, 위에도 아래도 수 없는 가구가 밀집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바로 옆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체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아주 먼 옛날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이웃 간의 일에도 관리사무실을 통해서 하고, 또 민원이니 뭐니 하면서 툭하면 경찰이 동원됩니다.
   서로가 남남입니다.  옆에 누가 살건  누가 아프건,  결혼을 하던 장례를 하던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인 것이지요.  심지어는 친척관계마저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이 작은 나의 마음 하나를 둘 곳이 없는 적막한 세상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고독합니다!
   사람은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일수록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사람들 속에서 더 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오늘 날의 우리 인간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어느 마약을 하다가 수감된 적이 있는 연예인이 간증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이 왜 자신이 마약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자신의 인기가 올라가면 갈수록 자기 주위엔 팬이니 하면서 싸인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났지만, 그런데 자기 주위에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질수록  오히려 자기 자신은 더 큰 고독 속에서 시달리게 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절망감을 이겨보려고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약도 처음 몇 번을 좀 반짝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전혀 해결책이 되지를 못하더랍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바로 그 고독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럴 것입니다.  만일 이 참을 수 없는 소외된 고독 속에서,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고 나를 진심으로 찾아주는 그 누구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나의 진정한 친구요, 나의 구원자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고독한 사람을 한 사람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많은 무리 속에서 완전히 버려진 소외된 자의 모습! ― 예수님 주위에 옹위하는 많은 무리 속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또 알아보지도 못하는 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소외된 사람인가?, 얼마나 버려진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 몇 가지 상황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초대교회 당시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방사람’이라고 하면, 당시 선민사상으로 가득 차 있던 유대 사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말하자면 ‘축복권 밖으로 밀려나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철저히 소외당한 사람인 것이지요.

   게다가 이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오늘날도 무슬림 나라에서나 미개한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를 인정치 않는 모습을 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정말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지만 또한 소외당한 사람입니다.
   그 예로서, 인구 조사를 할 때에도 성인 남자만을 계산할 뿐, 여자는 세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5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를 보더라도 ‘남자 장정만 5천명쯤 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또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예배드리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회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이 쓴 편지들이 지금도 가끔씩 발굴되는데, 그 중에 보면 어떤 로마 군인이 멀리 원정을 떠나면서 만삭이 된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아들이면 키우고, 딸이면 버리시오!” ― 이 처럼 비참한 것이 당시 여인의 지위였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타난 이 이름 없는 여인은 건강을 잃은 여자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은 부인병의 하나인 혈루증으로 12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며, 이 병을 고쳐보겠다고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오히려 괴로움만 더할 뿐, 아무 효험도 얻지 못한 채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가진 바 재산도 다 허비하였고, 친척도 친구도 가정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나을 수 있다고 하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더 이상의 아무런 기력도 없는, 그야말로 ‘버려진 자, 소외된 자’입니다.

   이 여인이 지금 예수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 틈에 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그 가운데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관심―이 뼈저리는 소외감을 또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여인이 갖지 못한 것은 단지 건강 하나 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그 건강 때문에 모든 것을 함께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그를 버렸고, 세상이 그를 버렸고, 이제는 자포자기하여서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가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여자로서 아름답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과연 누가 있겠으며,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과연 누가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12년의 세월! ― 여자로서 정말 꽃 같은 아름다운 생을 이 여인은 병으로 고생하며 잃어버렸습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졌다는 고독 속에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더 딱한 사정을 우리는 지금 이 여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을 중심한 중동지방은 ‘물’이 매우 귀합니다. 사막지대인 것이지요.  그러니 마실 물마저 귀한 형편에 목욕과 빨래를 자주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게다가 당시는 ‘옷’이 아주 귀한 때입니다.  그래서 옷 한 벌을 가지고 3대나 물려가며 입었다고 합니다.  옷 한 벌을 가지고 말이지요!

   이러한 형편에 목욕도 못하고 옷마저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으니, 혈루증 환자로서의 이 여인의 형편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냄새인들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이 혹 만나려고 해도 ‘부정하다’고 하면서 이 여자 편에서 먼저 손을 흔들며 피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5장과 신명기 22장에 보면, 이런 부인병은 ‘부정한 병―부끄러운 병’이라고 규정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에도 출입을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유마저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나마 기도하고 의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마저도 사람들에 의하여서 금지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절망적인 소외감 속에 내버려진 채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 여인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얼마나 불쌍한 상태에 있는가를……!   이 여인은 12년 동안 병을!―그것도 부끄러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질병’이라고 해서 다 괴로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때에는 며느리가 그 무서운 시어머니를 이 병으로 인해 부려먹을 수도 있으며, 혹 상황에 따라서는 자랑스러운 병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라고 해서 다 괴로운 것도 아니지요.  고통 중에도 영광스러운 고통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당하는 애국지사들의 고통!  신념과 명예를 위한 고통!  순교를 향한 고통!……  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고통은 바로 ‘부끄러움’의 뜻을 내포한 고통입니다.  부끄러운 고통은 육적인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함께 겸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견딜 수가 없는 무거운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많은 군중들 틈에 끼어들어서 울먹이는 마음으로 예수님 곁으로 가까이, 그야말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면서 간신히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가까이 오기는 하였지만, 감히 예수님께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사정을 예수님께 고하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고함을 질러서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장님도 소리 질렀고, 앉은뱅이도 소리 질렀고, 심지어는 문둥병 환자들까지도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 여인만은 바로 예수님 곁에까지 왔건만, 아무런 말도 어떤 청원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현대인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인간관계는 이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연대적으로 엉키어 있기 때문에, 그 누구 하나만이 죄인일 수가 없고 그 어떤 자만이 의인일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한 사람의 죄가 결코 그 한사람만의 죄가 아니고, 또 혼자서만 진실할 수도 없고 혼자만의 회개가 있을 수가 없는 그런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령 한 회사의 직원이 자기만의 진실과 회개를 외치며 독자적으로 행동했을 때, 그것으로 인해 전체에 끼치는 뜻하지 아니한 결과는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까?!!
   몰라서가 아닙니다!  부정을 보고도 말 못하며, 또 불의를 알고는 있으나 해결이 어려운 딱한 실정입니다!
   조그만 의와 작은 진실일지라도 찾고 싶지만, 그것 때문에 더 큰 어려운 형편이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불의를 당하며 차라리 속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회개도 못하고, 진실할 수도 없는 딱한 사정에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이 현대사회입니다.  이 절박한 형편에 이를 해결할 다른 길이라곤 없는 것이겠습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께 가까이 왔으나, 길을 멈추게 하고 “나는 이런 병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고쳐주십시오” 하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가 취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  예수님의 옷자락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 여인의 심정!  여러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떠한 심정인 것입니까?
   “내가 어떻게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저 내가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진다면, 그것만도 나에게는 과분한 일이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이 ‘여인의 마음가짐’입니다.
   바로 여인의 이 마음!―“내가 무엇이기에…”하는 이 마음!!  여러분, 이것이 바로 경건인 것입니다.  경건이란 결코 어떤 금욕도, 금식도, 자선도, ‘주여 주여 하고 울부짖는 것’도, 또한 그 어떤 ‘거룩해 보이는 행동’도 아닙니다!
   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이 ‘인자가 무엇이관데’,  ‘내가 무엇인데’ 하는 이 말 속에 깊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알고, 자기의 낮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심과 나를 만나 주심에 감격하여, 일생에 처음같이 그리고 생에 있어서 마지막인 것처럼 마음을 정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경건이 우리가 이 무서운 절망과 소외감에서 헤어날 수 있는 바로 그 첫 관문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경건한 중에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중요한 초점은, 바로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사실상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보살펴 주려고 급히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소녀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뛰어가도 시원찮을 그런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급한 상황 속에도  이 여인의 ‘그 조그만 손길의 스침’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발길을 멈추시고, 돌이켜 뒤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며 이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 때의 상황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에워싸 밀고 있어서, 제자들의 말처럼 아무나 옷깃이 서로 스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쩌다 옷자락에 닿으며 옷깃에 스쳐지는 그런 정도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상대는 어쩌다 고적감에 젖어들어 감상에 간혹 잠기는 그런 사람! ― 그래서 어쩌다 교회에 나오며, 어쩌다 예배에 참석하는 그러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경건하게, 예수님의 옷을 만진 그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경건하게, 일생의 처음같이 그리고 오늘이 나에게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오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나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 속에서 소외되어져 있는 한 가련한 여인을 만나주시고, 친히 찾으셨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워서 감히 나서지도 못하는 그를, 그 혼잡한 속에서도 간신히 내밀고 있는 그 떨리는 연약한 손길조차도 결코 놓치지 아니하시고, 찾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보세요. 이 소외되어 있던 여인!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찾아주시고, 만나 주셨다는 이 사실에 너무나도 감격하여서,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자신에게서의 문제―바로 병에 대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직고하게 됩니다.
   자기를 그대로 바쳤습니다!  이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자기의 가치를 새롭게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얼마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결코 “나의 능력으로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요,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인정이요, 이 믿음 위에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비록 작고 연약한 믿음이지만  하나님은 이 믿음을 축복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의로 여겨 주시며, 큰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한편,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우리에게 주는 아주 중요한 뜻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서 그 여자가 병이 나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병이 낫는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그 여자가 이미 병이 나았기 때문에, 애써 걸음을 멈추시며 애써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그냥 계속 가실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이미 다 나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걸음을 멈추시고, 돌이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하시며 그 여자를 찾으셨습니다!

   여기 뒤돌아보시는 예수님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누가 나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으셔서 찾으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시면서도 걸음을 멈추시고는,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 여자를 찾아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다른 사람들 속에서 한 단계 낮게 소외되어 있는 그를 부르시고 들어내어 주심으로써, 그 여자를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위치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하시는 우리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인들 앞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또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으시며, 또한 소외된 채로 버려두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시며, 돌보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는 나를 높이 들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 여러분! 내 자신이, 바로 내가―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들어내어 공포하여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혹 소외됨을 느끼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소외된 자기를 슬퍼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절망은 죄요, 가치의 부정은 불신앙입니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혹 당신에게 말 못할 고민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로 그러할 때 당신은 예수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당신의 손을 내밀어 보았습니까?

   믿음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그저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되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손을 내어 밀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손을 주님께서 내어 미세요!!   예수님은 그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으시고, 또 소외된 채로 내버려 두시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주님께 손을 내어 밀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그 누가 여러분을 만족시켜줄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무엇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모두가 다 실망만을 줄 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  우리를 알아주고, 들어주고,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예수님뿐입니다!
   그 주님께 여러분을 마끼세요.  아뢰세요.  여러분의 손을 내어 미세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 순간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돌이켜 나를 찾아주시며, 그리고는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