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본문 내용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Content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빌 2:5-8)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을 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한 주간동안 있은 사건들!―여러분은 복음서를 통하여 자세히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멋모르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흥분하여 외쳐대고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르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 자들을 몰아내시며 성전을 정결케 하셨고, 이 후 몰려와서 예수를 책잡고자 하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리고 목요일 저녁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대로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거기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아직 동도 트기 전, 몰려온 군병들에게 체포당하시고 먼저 직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셔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이송되셔서 거기서 매 맞으며 온갖 거짓 증언과 모함을 받으시며 정죄를 당하신 후,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법정으로 옮겨졌습니다.  거기서 로마 군인들로부터 채찍질과 온갖 희롱을 당하셨고, 그리고는 최종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금요일 저녁 해지기 직전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동굴무덤에 장사되신 것입니다.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 ― 이 말을 들을 때에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한번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까?

   교회에 한두 해 이상 다니신 분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있는 것은,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상식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다는 것’과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여러분 자신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정말 느껴지십니까?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흑백으로 된 세실 B. 데밀이란 감독이 제작한 ‘왕 중 왕’이란 영화가 선교사들의 손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초창기의 영화라서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변사들이 마이크를 들고 영화의 장면들을 해설하면서 보았는데, 그 당시 전도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영화의 장면들이 제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는 모습이 그렇게도 극적으로 묘사되어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온 장내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곤 하였는데,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우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같으면 흔해빠진 게 영화요 TV요 비디오이기 때문에 어림도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만, 그때만 해도 영화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면 이를 구경하기 위해서 온 동네사람들이 다 교회로 몰려와서 구경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교인들뿐만이 아니라, 몰려온 동네사람들까지도 눈이 퉁퉁 붓도록 우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너무나도 슬프게 우는 제 친구 어머니에게, 이 아주머니는 그 동안 여러분들이 열심히 전도를 했지만 믿지를 않고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을 우습게보기까지 하던 분이셨거든요.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서 물어보았습니다.  “아주머니,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울어요?”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응, 저 예수란 분이, 저 예수란 분이…” 그리고는 우시느라 말도 제대로 잇지를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매 맞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는 그 장면들에서 너무나도 감동을 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묘한 존재라고 느껴집니다.  자신은 믿지 아니하면서도 얼마든지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런가 하면 금방 감동을 하였다가도, 내 언제 그랬느냐 하는 식으로 돌변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동안 부부싸움도 많이 하였고, 그래서 사이가 벌어져서 목사님을 찾아가 함께 상담을 하였습니다.  상담을 하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었고, 목사님의 기도에 눈물을 흘리고는 돌아갑니다.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겠어요.”  “이제부터는 목사님의 걱정을 끼치지 않으며 살겠습니다.”  이 부부는 이렇게 다짐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져 있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 무엇 때문인지 또 다툼을 하고는 서로 따로따로 다른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감동을 받거나, 신문이나 잡지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읽거나 또는 좋은 영화를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지만,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어떤 하찮은 일 때문에 마음이 흐려지는 경우가 적지 않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살인을 지지르는 사람도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감동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동을 하고 난 다음 순간에는 또 같은 죄를 계속 범하면서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는 그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도,  또한 내가 그 사실에 감동을 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알고 있고, 또한 감동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의 의미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의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있어 그가 고난을 당했고, 그리고 그 고난에 도전하여 최종 승리를 하였다는 그런 얘기기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영웅위인전 같은 데 보면 흔히 등장하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소년이 입산수도한 후에 이 세상에 내려와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중에 그의 덕성과 인품이 고귀하게 들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종래에는 왕이 되었다는 그런 흔한 건국신화들이나 영웅미담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만왕의 왕이신 바로 그분께서 친히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어 오셔서, 자원적으로 스스로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는 ‘계시의 역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우려야 할 점은, ‘무엇이시다’ 하는 말과 ‘무엇이 되셨다’고 하는 말의 차이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무엇이시다’ 하는 말과 ‘무엇이 되셨다’고 하는 말! ― 비슷하게 들리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이 두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영어로 말씀드리자면 ‘to be’와 ‘become’의 차이인데,  ‘to be-무엇이시다’하는 말은 원래의 존재, 바로 그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become-무엇이 되셨다’고 하는 말은 이 본질이 그렇게 되어주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본래가 하나님이시요 말씀이시며 능력이십니다.
   그런데 그가―이 하나님이―사람이 되어주셨고, 게다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른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낮추셔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능력이 있는 자이시지만 없는 자로―의인이시지만 죄인으로 나타나셔서 그 뜻을 이루셨다 하여, 이것을 ‘비하―낮추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이심’과 ‘사람이 되심’,  그래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이 관계를 우리는 바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어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이 한 사람 뿐이었습니까?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형수들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였고 또 당하게 될 것입니까?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비극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았다!―고난을 당했다’하는 것은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 어디 죽은 사람이 한둘입니까?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러나 ‘누가’ 고통을 당했느냐 하는 데서 그 고난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 그가 누구십니까?
   그의 ‘하나님 이심’과  ‘사람이 되심!’―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의 눈으로 바라볼 때,  유대인들의 눈에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치는 한 청년의 죽음! ― 무기력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힘없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당하시는 수난이며, 곧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나를 위하여 죄인이 되시는 하나님!―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같이 ‘누구냐?’ 하는 근본문제와  ‘무엇이 되셨느냐?’하는 후속문제를 우리는 바로 이해하며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냐?’하는 것을 바로 이해할 때, 거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게 될 때, ‘무엇을 받았느냐?’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선물을 준 그가 ‘누구냐?’ 하는 것은 ‘무엇을 받았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나 존경하는 분, 또는 대단히 지체가 높으신 분이 내게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손수건 한 장이라고 할지라도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물부터 끌러보고는 ‘겨우 손수건 한 장이군’하고나서 그 보낸 사람을 알아본다고 한다면,  얼마나 그 사람을 잘못 알아보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사랑하는 애인이 한 달 동안이나 정성들여 손수건에 수놓은 그것이―그 선물의 의미가―바로 깨달아 질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친히 대야에 물을 떠다가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기십니다.  그 먼지투성이의 억센 발들을 하나하나 씻기시고 닦아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발을 씻기고 또한 씻김을 받는다고 하는 이것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어느 집에든 들어갈 때에, 으레 그 집 하인이나 또는 누군가가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던 그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 발을 씻겼느냐?’ ―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신 다음에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발을 누가 씻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 ‘주인으로서 종의 발을 씻겼고, 스승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겼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라!’
   ‘그 의미를 오늘 모르겠다면 장차라도 생각해 보아라.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는 알리라!’

   여러분,  ‘누구이시냐?’하는 문제가 이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만왕의 왕이시오, 그리스도시며,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내 더러운 발을 씻겼다는 이 사실이 엄청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주가 고난을 당하시고, 주가 저주를 받으시고, 주가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여기에 엄청난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더욱 더 우리 마음속에 깊이,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두 번째로, 어쩌면 이것은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 고난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죄가 없으신 몸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가 돌아가신 것은 세상의 죄를 위해서였고,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분이 수십 번도 더 들어온 터이고, 알고 있고 또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나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사실이 바로 나와는 과연 무슨 상관인 것입니까?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입니까?

   여러분,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내가 가슴 속에서 깊이 깨달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얘기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화상을 입어 얼굴이 흉측하게 찌그러진 엄마가 창피하여서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을 싫어하였고, 그래서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늘 피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화상을 입게 된 사실이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입게 된 화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아이는 그 때부터 엄마의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감사하며 자랑하는 아이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 고운 엄마의 얼굴이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아이의 감동!―여러분은 충분히 느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미워했는데,  나는 싫어했는데,  나는 부끄러워했는데,  그저 엄마가 화상을 입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이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게 내게는 무엇인 것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 ― 이것을 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사실에 대해 감격하고 감동하는 것! ― 그것도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사실이 ‘내게 어떤 연관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강대상 뒤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있습니다만,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달리셨던 십자가라고 생각하시며 이 십자가를 계속하여 바라보세요.  이번 고난주간동안―이 한 주간동안, 계속 기도하며 바라보고, 보고는 또 기도하고, 여러분 이렇게 꼭 해 보십시오. 
   특별히 내일부터 이 한 주간동안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어떤 형편 속에 계셨든지 간에, 이 한 주간동안 빠지지 말고 출석하셔서 꼭 그렇게 하여 보십시오.
   그 십자가에 누가 달려 있습니까?  왜 달려 있습니까?

   나 때문이라는 사실!―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이 철저할 정도로 느껴지며 인정되지 아니하십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지 못하십니까?  나는 사람을 죽이지도, 도둑질을 하지도, 사기를 치지도, 커다란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는 깊은 감동을 하고도 그러고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정말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죄 많고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엔 수긍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나의 그 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시인하십시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세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는 바로 나를 위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리심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내가 나음을 받았도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나의 매일의 생활에서 진정 자유함을 받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죄의식에, 또는 내 마음의 연약함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자유하며, 진정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동안 더욱 ‘주님의 고난’에 ‘나의 고난’으로 동참하십시오.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격적인, 결단하는 신앙생활이 수반되는 부활절을 여러분은 맞이하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