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기서 나를 보리라” (마 28:1-10)
누가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부닥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죽음! ― 그가 아무리 권세가 많고 유명한 사람이든, 그가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힘이 또한 장사이든, 그 누구도 다가오는 이 죽음을 피하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그저 모든 존재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던져진 최대의 이적이며 참된 소망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죽었던 자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게다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고 하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 죽게 되겠지만,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를 않고 우리 모두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희망적이며 기쁜 소식인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지난 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최대의 장벽인 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깊이 새겨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같이 읽은 본문 말씀은 부활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몇 명의 여인들에게 천사가 빈 무덤을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를 찾는구나.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고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조금 후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이렇게 다시 당부를 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여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기 거듭된 당부의 말씀을 보세요.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 무슨 말씀인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 위해서는 ‘거기’, 곧 ‘갈릴리’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돌아가셨습니까? 그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장사되셨습니까? 그곳 역시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자연히 무덤이 있던 그 곳―바로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왜 이곳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 ‘갈릴리’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 부활하신 주님을 ‘여기’가 아니라 ‘거기’, 갈릴리에서 만나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심오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 왜 여기 예루살렘에서 그냥 만나자고 하지 아니하시고 애써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 바로 이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리란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에 대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곳 갈릴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제자들이 처음 불림을 받았고, 그래서 감격하며 주님을 따라 나섰던 바로 그 ‘결단’과 ‘사랑의 뜨거움’이 있는 곳이란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장 이하에 보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명령하셨을 때,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아버지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생활수단인 그물과 배 보다도 예수님을 더 귀중히 여긴 것이며, 예수님을 그들의 부모나 친척들보다도 더 귀중히 여긴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어 보여준 행동들이었습니다. 이같이 오직 예수님 중심의 최우선 순위가 실천되고 있던, 뜨거움이 있는 거기가 바로 갈릴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어떠한 곳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다가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을 하였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버리지 않겠습니다!”―이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었습니다. 마가는 베 홑이불을 쓰고 있다가, 붙잡히자 이불을 던져버리고 벗은 채로 달아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제자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있는 곳의 문을 걸어 잠그고, 다만 벌벌 떨면서 예수님으로 인한 사건에 말려들까봐 염려들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뜨겁던 제자들의 ‘열심’도, 호언장담하던 그 ‘결심’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다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겁에만 질려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라고 하셨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아니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라고 하셨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십자가가 섰던 골고다 언덕, 그 곳으로 오라고 하셨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제자들은 송구하고 부끄러워서, 주님 앞에 나타나지를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골고다는, 겟세마네는 바로 제자들이 실패한 곳이며, 비겁했던 곳이고 무기력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는 그들이 뜨거움이 있던 곳이고, 열심이 있던 곳이며 사랑이 넘쳤던 곳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더라면, 베드로는 아마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물으셨기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책망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사랑이 뜨거웠던 그곳에서 ― 처음 시작했던 열정이 있던 그곳에서 ― 그들 스스로가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 설 수 있겠금 갈릴리로 부르신 이것이야 말로 실로 크나큰 은총 중의 은총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떼에도 “내가 너를 고쳐주노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스스로 소생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를 배려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리라”하시는데 ‘거기’가 어디입니까? 물론 제자들에게 있어서 거기는 바로 갈릴리를 뜻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거기’는 어디냐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하게 된 젊은 연인들은 “내일 거기서 또 만나자!” 이렇게 하고 헤어지지요. 이렇게만 해도 그들은 거기가 어디인지 서로가 알지 않습니까? 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감격이 있는 바로 그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만약 ‘그곳’이 그들에게 없다고 한다면, 그들의 사랑은 아직도 뜨겁고 감격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로 ‘그곳’-‘거기’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무엇입니까? ‘거기’는 단순히 어떤 ‘장소’―어떤 지역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가지는 그 감격, 그 결단, 그 사랑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때때로 베드로처럼, 그 제자들처럼, 실수도 하고, 회의도 느끼고, 실망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가 우리의 갈릴리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우리 주님을 다시금 뵙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고, 열심이 식고, 불신앙의 요소가 우리에게 침식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거기’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2장 2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들은 이것!―이것이 바로 우리의 ‘거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니지 못하게 될 때에, 이 세상의 온갖 번민들과 나아가서는 온갖 이단들의 감언이설에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열심, 처음의 그 감격, 그 사랑이 바로 우리의 ‘거기’인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라는 의미가 바로 ‘거기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요청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오늘 우리들의 생활에서도 사랑과 열심이 있는 헌신이 새롭게 부활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뜨거운 사랑과 헌신이 보여진다면, 거기가 바로 ‘나의 갈릴리’가 될 것입니다. ‘그곳’―이 갈릴리만큼은 꼭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곳은 무엇입니까?!!
다음 두 번째로, 왜 부활하신 주님을 ‘갈릴리’에서 만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방은 유대나라에서 서민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 하면,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시골사람, 촌사람, 가난한 사람’이란 뜻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갈릴리 지방에서 대부분의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곳에서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다시 그 낮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에 비해 ‘예루살렘’―다시 말해서 ‘서울’하면, 일반적으로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출세와 성공이 있는 곳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거기에는 생존경쟁이 극심하며, 출세를 위해 다투며, 출세한 후에는 자랑하며 뽐내게 되는, 교만과 오만이 가득한 곳을 연상하게 됩니다. 높은 곳이며 부유한 곳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이 낮은 곳으로 오셔서 가장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그리고 죽기까지 희생하시며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낮아질 대로 낮아지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사형당하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들은 얼마나 교만하기가 쉽습니까?!!
이제 여러분을 향하여 “갈릴리로 오라”고 손짓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로 오라! 갈릴리로 오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으로서 여러분에게 들리십니까? 바로 우리를 향하여 “겸손하라.” “낮아지라.” “남을 섬기라.”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고, 낮아질 때 높아지게 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썩으면 열배, 백배, 천배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 바로 이와 같은 부르심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갈릴리에, 겸손과 마음이 가난한 그곳에 우리 주님은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나자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세 번째로, 또 한 뜻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왜 갈릴리에서 만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용서의 확신’과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갈릴리, 거기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워 노력하며 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날이 새어갈 무렵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 때도 그들은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이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던 바로 그 장면을 연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다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잡힌 물고기를 끌어올리면서, 자기들을 처음 부르시던 그 때를 연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고기와 떡을 구워서 아침식사를 하게 한 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이제는 ‘전하는 자가 되라는 사명’을 다시 주신 것입니다.
보세요! 처음 사명을 받던 그 자리에서 사랑을 확인받은 후, 다시금 사명을 허락하시는 이 사실에 베드로는 너무나도 감격하였고, 그래서 그 비겁했던 자가 이제는 가장 용감한 자로서, 그의 온 일생을 전도하다가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게 됩니다!! 여러분, 갈릴리는 바로 이와 같은 곳입니다. 거기엔 용서와 사랑이 있고, 넘어졌던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주신 은총의 감격이 있는 곳입니다. 사명을 다시 맡겨주신 선교사로서의 임명장이 다시금 주어지는 곳이 바로 ‘갈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갈릴리에서의 새로운 사명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나야 합니까?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하신 일은 모두 끝이 났고, 이제부터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다시금 시작되어야 할 모든 일들이 전적으로 우리들 손에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친히 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나, 나아가서는 공의를 이 땅에 세우는 어떤 일을 친히 하셔야 한다면, 아마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에 먼저 나타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자기를 부당하게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총독 빌라도 정도는 마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에게는 “당신 잘못해도 아주 잘못한 것이었소!” 빌라도에게는 “재판 좀 똑똑히 하시오!” ― 글쎄 이 정도쯤은 점잖게 말씀하실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기록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직 제자들과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뜻이 있겠는데, 첫째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셔야 했던 모든 사역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전히 다 이루셨고, 이제 부활하심으로 다 끝내셨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바로 이 말씀이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 “다 이루었다!” 십자가와 부활은 ‘완전히 다 이루신 것’이며,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보완하여야 할 것이 없는 ‘완전한, perfect한 이루심’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누구를 만나고, 무슨 증거를 하시고 하는, 조금만치의 보완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이루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제부터 주님이 다 이루신 이 일에 대하여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우리들 손에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의 지상에서의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하셔야 했던 일들을 다 끝내셨고, 이제부터는 모든 일들이 다 우리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처음의 소명을 주셨던 갈릴리에서 만나시고, 이제 우리로 그 사역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을 다시금 고요히 마음속에 새겨보십시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주를 뵈오리라.”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 이 말씀이 우리 마음을 거리끼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이 혹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갈릴리, 거기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용서의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적어도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로 간 사람은 두 가지 사실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의 죄에 대한 ‘용서의 확신’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가졌던 처음 사랑을 통하여 주님의 용서를 확인받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으심에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고 감격적인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바로 과거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고백이며, 그래서 ‘회개한 후 주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관계를 가졌습니다’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기에게 맡겨지는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주님의 부탁이 확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은혜의 감격이 있으면 마땅히 그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되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온 마음과 뜻과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학교에서, 성가대에서, 전도대에서, 주방에서, 선교회와 구역장 순장으로서 열심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거기에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거기’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나의 갈릴리―나의 거기’에서 주님을 더욱 새롭게 만나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그곳! ―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의 갈릴리로 가야만 합니다.
그곳은 주님께로부터 처음 부름을 받았던 자로서 가졌던 뜨거운 감사와 감격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으로 오라’는 주님의 부름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시는 우리 주님의 요청입니다! 그곳은 또한 용서와 새로운 사명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이 말씀의 뜻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의 갈릴리’를 항상 이루시는 삶을, 그러한 신앙생활을, 더욱 힘차게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