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본문 내용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Content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히 10:21-25)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이렇게 ‘서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신데, ‘서로’라는 이 말! ― 비단 본문뿐만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서로’라는 이 말이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로 문안하라, 서로 화목하라, 서로 발을 씻기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용서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수없이도 많이 읽게 됩니다.
   사실 ‘서로’라는 이 두 글자를 빼버리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기본정신이 아주 없어져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믿음의 생활에는 ‘서로’라는 이 말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서로 웃고, 서로 울며,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세상! ― 우리 인간에겐 그 이상 더 아름다운 것이 없고,  만약 이 지상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서로’라고 하는 세계일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부르던 동요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대부분이 기억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하얀 우산, 빨간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셋이서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옛날에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그 길!  포장이 되어있지 않아서 비라도 조금 내릴 것 같으면 진창이 되고 마는 그런 길이었지요!
   그 길에 찢어진 우산을 받고 가는 아이들이지만, 이렇게 서로가 나란히 어울리고 있는 우산 속에서, 거기에 피어나는 어린아이들의 천국과도 같은 모습을 여기서 읽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천국은 ‘서로’라는 사상을 강조합니다.  그 반면에 지옥은 ‘내가, 나만이’라는 생각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하여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본 바로는, 천국과 지옥은 한 면에 있어서는 똑같더라고 그럽니다.
   먼저 지옥에 가 보았더니, 긴 식탁이 놓여있고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데, 이상한 것은 손잡이가 아주 긴 수저들이 놓여 있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 때에는 반드시 이 수저로만 먹어야 합니다.
   시간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는 아무리 자기 입에 넣으려고 해도 숟가락이 너무 길어서 어디 들어가야 말이지요.  종래는 하나도 먹지를 못하고, 모두가 해골같이 바싹 말라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천국으로 가 보았는데, 거기에도 똑같은 식탁과 음식이 있고, 또한 똑같이 긴 수저가 놓여있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이래서야 천국이 지옥과 다를 게 무엇이람?’ 하고 있노라니까 사람들이 모두 모여드는데, 모두들 웃어가면서 긴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는 서로 상대편의 입속으로 넣어주더란 것입니다.  그러니 무두가 배불리 먹고, 그래서 붉으래한 건강한 모습들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만, 하여튼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돕는 그 곳이 바로 천국과 같은 곳이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가정이 주어져 있고, 직장이 주어져 있고, 또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 ‘같은 가정, 직장, 교회’에서 천국처럼 사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 우리 벧엘교회는 그 같은 분이 한분도 없으시리라 믿고 또 그렇게 바랍니다만 ― 그 ‘같은 가정, 직장, 교회’에서 천국과 같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사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를 주장하며 ‘내가’를 고집하는 그런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환한 얼굴로 기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여러분 한번 곰곰이 살펴보세요.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하셨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세어보면, 원문을 번역한 우리말 성경에서는 우리말의 중복하지 아니하는 어법상 여섯 번, 그러나 영어성경으로는 원문 그대로 무려 아홉 번이나 ‘우리’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서로’를 맺어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로만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직접 땅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행함’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이요,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봉사하라, 서로 이해해주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저 사람의 발이 저만큼 더럽소!’ 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얼른 가서 그 더러움을 가려주고 씻어주어라! ―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찬의 생활이요,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예기치 않는 사건도 발생하고, 어려움과 고통이 닥치게 마련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를 아니합니다.
   이 고통들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만이’하는 생각으로 이 어려움을 바라볼 때에는 공포와 무서움만이 생겨날 뿐입니다.  불평과 원망만이 들끓게 됩니다.
   지옥이란 어떤 곳입니까?  내가 도저히 감당치 못하여 실망하고 괴로워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고통의 짐도, 서로 지면 가벼워집니다.
   또 아픔도, 서로 나누면 진통제의 효력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울 땐 괴로운 것이지만, 서로가 함께 울어주면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 크리스찬에게 간곡한 권면으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교회요, 그런 사람이 크리스찬이요, 그곳이 천국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미국 Texas주의 Midland라고 하는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시카 멕크루어(Jessica McClure)라고 하는 태어난 지 18개월밖에 안된 아기가 사고를 만난 것입니다.  넓이가 겨우 8인치, 약 12cm밖에 안 되는 폐기된 우물 관에 이 아이가 놀다가 그만 빠져버린 것인데, 이 우물관의 중간 22피트, 그러니까 약 7미터 지하에 이 아이가 꼭 끼어버린 것입니다.
   아이가 사고를 만났다는 뉴스 보도가 방송을 타고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던 일들을 다 팽개쳐두고는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각종 엔지니어, 의사, 굴착공, 보일러공… 이렇게 모든 분야에서 수백 명이나 모여들었습니다.  또 이들을 위해서 많은 레스토랑에서는 음식을 끼니때마다 보내어 왔습니다.  그래서 의논한 끝에 옆으로 굴을 다시 뚫고 내려가서 아이가 빠진지 3일 후, 58시간 반 만에 구출하여 내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들이 뉴스를 통해 매 시간 보도되고 있었는데, 당시 저도 미국에 있었던 때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었습니다.
   사고 당시 이 아이의 엄마는 겨우 열일곱 살, 아빠는 열여덟 살, 아직도 teenager인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아무도 ‘어쩌자고 결혼을 그리 일찍 하였느냐’,  ‘아이를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곳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느냐’,  ‘역시 어린 사람들은 할 수가 없구나’ 하는 등의 말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부모의 마음이야 얼마나 아프겠느냐?  이곳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집안에 들어가 안정하도록 하라” 이렇게 권하며, 오로지 아이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습니다.
   요즈음같이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이 세태에서 이렇게 남을 나로 여기고, 남의 일을 나의 일로 여겨 서로 격려하며 돕는 것! ―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정말 우리 모든 인생이 이렇게 서로 위하고 서로 도울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말에 ‘허물없는 친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는 대로 아주 막역한 사이를 나타내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이 ‘허물이 없다’는 말은  서로에게 아무런 허물도 보이지 아니하는 완전한 관계라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서로의 사이에 허물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납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서로가 허물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못됩니다만, 소위 깡패들의 사회에서는 ‘의리’라고 하는 것이 아주 강하지 않습니까?  정말 자기가 매 맞아 죽으면서도 의리를 지킨다고 입을 열지 않으며 결속을 지킵니다.
   이들이 갖는 의리가 이렇게 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서로의 약점을 서로가 나누고 있다는데 그 비밀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완전함을 나타내며, 자기 자랑을 하는 친구는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서로 짐을 져 주는 친구라야만 정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강조하고 나만을 앞세우는 한, 그에게는 천국의 기쁨이 주어지지 아니한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에 communica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가 상반되는 관계에서―알지 못하는 관계에서―적대되는 관계에서  서로의 생각과 서로의 마음이 서로 이해되고 교환되는 것을 communic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communication이 잘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communication이란 말은, 근래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시하는 넓은 뜻으로서 교육, 문화, 교통, 통신, 정치 등등의 여러 면에서 두루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의사전달, 의사소통’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communication이란 말의 어원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라틴어 com-이란 접두사에다가 -munus란 단어가 합쳐져서 이룩된 말인데, com이란 접두사는 ‘서로, 함께’란 뜻이고; munus란 말은 세 가지 뜻을 가졌는데 ‘선물, 짐, 책임’이라는 세 뜻입니다.  그러니까 communication이란 말의 문자적인 뜻은 ‘선물을 서로 나눈다’,  ‘짐을 서로 진다’,  ‘책임을 함께 진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너와 나의 communication이 잘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친구사이, 이웃사이, 가족사이, 교우들사이, 인종과 민족 사이의 communication을 성공적으로 이룩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communication이란 말 자체가 말해주듯이  짐을 서로 지고, 사랑을 나누며, 성경 말씀대로 서로 섬기는데 그 비결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과 2절 말씀(p.309)을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짐을 지는 것!’―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법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지요.  만일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범법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서로가 짐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실천하여야 하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가 짐을 져 준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무슨 잘못한 일이 있거나 실수한 일이 들어날 때에는, 또는 못하는 점이나 모자라는 점이 있을 때에는, 조용히 그 실수를, 또는 그 모자라는 점을 서로가 감당해 주고, 바로 잡아주고, 서로를 권면함으로서 다시는 서로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 이것이 서로가 짐을 지는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배우며 예수님을 따르며,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더욱 닮으려고 힘쓰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7절(p.259)에서 이렇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영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남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서로 남을 영접하는 것’에 대하여 15장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믿음이 강한 우리는 연약한 사람을 도와 그들의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자기 자신에게 좋을 대로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자기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선을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로 이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여러분의 직장에서나 이웃관계에서, 혹 여러분이 무관심함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사람을 소외되게 하는 일이 있지는 않은가  한번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셔서는 누구와 주로 말씀을 나누십니까?  주중에는 주로 누구하고 전화통화를 하십니까?  어떤 내용으로 얘기를 주로 하십니까?
   혹 나는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불평과 짜증스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오늘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서로가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끼리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불평하며 비방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 얘기를 하며 농담하며 취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선행을 서로가 격려할 때, 거기서 천국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참으로 기쁜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늘 하는 것처럼, 저녁 집회시간 같이 기도하고 집회에 임하고자 성가대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권사님들께서 갑자기 모두가 손을 머리위로 올리면서 “목사님 사랑해요!” 하고 인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얼떨결에 손을 머리 위에 올리며 인사를 받았습니다만, 하고 나니 참으로 흐뭇하더군요.  또 기도할 때―말씀 증거를 할 때, 모두가 아마 미리 서로 뜻을 모았던 모양입니다.  ‘아멘’하면서 열심히 응답을 하였습니다.

   목요일에는 한 어떤 권사님께서 추어탕을 맛있게 끓여 오셨고요, 또 어제 토요일에는 9여전도회 회원 여러분들이 캄보디아에서 온 림 부떼아 의사와, 또 이우진 선교사 가족과 우리 교역자들과 직원 모두를 위한 점심을 준비해 와서, 갑작스러운 사랑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돈가스를 먹었는데, 참으로 맛있는 돈가스였습니다.  음식 속에 사랑이 담겼으니 얼마나 맛이 있었겠습니까?
   금년에 우리 교회 표어를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이라고 하였는데, 정말 가정 같은 교회, 천국 같은 교회가 싹터나고 있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 25절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렇습니다.  이것은 습관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습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여러분 자신 스스로와,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세요.  불평을 말하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불평을 늘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기뻐하는 일에도 그 기쁨을 같이 나누지를 못하고 불평만을 말합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한숨을 쉬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은 데도 한숨을 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을 비방하면 계속 비방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집이 아무리 가까워도 으레 늘 지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또 모임에 빠지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빠지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습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새벽기도 하는 것도 보면, 하는 사람은 매일같이 합니다.  그것도 기쁘게 매일같이 합니다.
   일이 밤늦게 끝나기 때문에 새벽기도를 못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에 보면 늘 개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밤 열두시에 일터의 문을 닫습니다.  집도 교회 바로 옆 아파트나 흑석동에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도 제가 교회에 새벽 일찍 도착해 보면, 언제나 저보다도 먼저 나와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기도하는 것도, 은혜 받는 것도,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습관처럼 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그 습관대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역모임을 모이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구역은 아주 잘 모이고 있습니다.
   또 선교회의 월례회를 모이는 것도 보면, 잘 모이는 선교회는 참으로 열심히 잘 모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남들은 모두 선교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거기에 함께 모이지를 않고 친교실에 그냥 와계신 분들이 계신데, 참으로 딱한 것은 그런 분들 가운데는 매달 늘 습관적으로 참석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또는 다른 어떤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잘 모이는 분들을 보세요.  그분들은 재미를 위해 모이지를 않습니다.  또 누가 자기를 재미있게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도 아니합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기에 스스로가 습관처럼 먼저 나가고, 먼저 섬기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습관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습관, 은혜 받는 습관, 축복받는 습관을 잘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온유하며 겸손한 습관, 늘 온화하며 환히 미소를 띠는 습관, 부지런하며 남을 돌아보는 습관, 섬기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찬송하는 습관, 기뻐하는 습관, 좋은 말하는 습관, 모이기를 힘쓰는 습관, 남보다 먼저 선구자적으로 행하는 습관!!
   여러분, 우리 크리스찬은 좋은 습관, 아름다운 습관을 길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이란 바로 이와 같이 아름다운 습관을 길들이고 훈련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기쁨을 창조하며, 그 기쁨과 만족을 항상 누리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우리는 항상 바라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아가서, 어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더 큰 기쁨으로 그의 삶에 넘치게 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선행을 폐하며,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 어떤 사람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는 좋은 습관으로서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이룩하며, 그래서 22절 말씀처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