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 “행복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계속하여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복도 아니고 여덟 가지의 행복의 길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이 해와 같이 밝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그만큼 큰 행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모든 문제가 내가 행복하지 못해서 옵니다. 내가 행복해야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10:13에 모세는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어떤 강아지가 꼬리를 좋아했답니다. 거기에 재미가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잡혔을까요? 그러면 그럴수록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뿐이었습니다. 꼬리는 잡힐듯 말듯 노력하면 할수록 어지럽고 지쳤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쓰러졌습니다. 그걸 지켜보던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그건 미친 짓이야. 나도 한때는 그랬지. 꼬리를 잡으려하면 어지러울 뿐이야.” 꼬리 그걸 무는데 성공했다 한들 별 것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꼬리가 있습니다. 그 꼬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이나 미모나 재능이나 명예 권세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닙니다. 잘 알아야 할 것은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만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진정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6.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모두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신 분들 하나님을 보는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면 그 영광에 압도되어 살 수 없습니다(출19:21, 33:20, 삿6:22). 죄악 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 볼 것이라는 헬라어 \'와손타이\'를 살펴보면 육신의 눈이 아닌 \'경험을 통해서 보다\',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재를 통해서 느껴지고 체험하는 그런 봄입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모태에서 어머니를 느끼듯 우리 마음에 행복감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빌4:7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얼마나 강하든지 어떤 상처나 감정도 다 압도해 버립니다. 그래서 래리 크렙은 \"많은 것을 풍성히 맛보는 것보다 하나님을 조금 맛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 했습니다.
16세기 전쟁터에서 부상 당한 로렌스 수사의 이야기입니다. 로렌스는 수많은 세월, 장애와 궁핍 속에서 불만과 불평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렌스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모두가 부러워 하는 행복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혼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임재는 자양분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혼의 평안이요, 영혼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혼의 행복이요, 영혼의 풍성함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 누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마음을 청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했거나 주님을 불러도 들으신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렘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라\"(마15:19) 했습니다. 더러워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됩니다. 그래서 사59:2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1:1-2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딤후3:1에 말세가 왜 고통하는 때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죄악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령에 하나님이 행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육신의 쾌락을 따를 때 하나님의 진노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무서운 진노는 외부와 아울러 내부적인 면도 큽니다.
시편 기자도 진실로 회개하고야 참 평안을 얻었습니다. 시32:3-5에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성·어거스틴도 회개한 뒤에도 죄의 욕망이 가끔 일어나면 그럴 때마다 그는 팔을 물어뜯으면서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마틴·루터도 자기의 죄를 깨닫고 졸도하기까지 심각한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으로 찾아와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7. 화평케 할 때 행복이 옵니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화평은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로서 단순한 마음의 화평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예수를 닮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평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고통을 당하실 이유가 없지만 사랑 때문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랬기에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그토록 높여 주셨고 하늘의 천군천사가 그를 찬송하며 우리들도 그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는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으시다면 화평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최고의 특권은 아버지께 사랑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은 천사들로 시중 들게 하시며 어둔 세상 앞에 빛나게 하셔서 큰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런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만 보여준다면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도로 화평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녀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거기에 있는 문제의 중압이 나에게 몰려옵니다. 혹은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 느껴집니다. 창자를 끊는 듯한 간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천 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다 부리고 나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평강이 옵니다. 복이 옵니다.
요즘 중보기도라는 고상하고 편리한 용어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서 사용하지 않다보니 기도운동 확산에 지장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대신할 용어를 찾아보니 도고라는 말이 있는데 낱말이 어렵고 차라리 기도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명칭도 좋지만 무엇보다 화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충만도 강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화평케 하는 사역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도를 화평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잘 전해야 합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화평케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메시지가 인간의 아름다운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달리신 복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려주고, 보혈의 공로를 알려주고,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도 함께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전도를 위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그 일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말씀으로 준비하고 또 지혜로워야 합니다. 고성능 스피커로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여기 저기 사람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요소요소에 있다가 사람을 돕는 것이 더 큰 전도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전도에도 패러다임(Paradigm=사고방식의 틀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뿐 아니라 모두 덕 세우는 일에 앞장설 때 전도할 환경은 더 좋아지고 전도의 기회는 더욱 많아지고 민족복음화는 더욱 신속히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무디 선생이 제자들을 데리고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을 다녔으나 그 누구에게도 “예수 믿으십시오.” 라고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에 예배당에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묻기를 “선생님! 우리가 전도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예배당이 가득 찼습니까?” 무디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일주일동안 무언의 전도를 잘했다. 그동안 길에 넘어져 우는 아이를 일으켜 주었고,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수레를 밀어주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느냐?” 이처럼 하나님 자녀의 모습만 잘 보여주어도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는 특별한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무거운 화평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들도 진정 복의 사람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높이 되신 예수 안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청결케 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