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2

행복한 사람 2 (마 5:6-7) 
 

    

 

이 시간에 지난 시간에 이어 “행복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복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행복해야 합니다. 그 때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행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안에서 어떤 존재임을 안다면 밥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날마다 춤추며 살게 될 것입니다.

최근 학자들은 행복의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발견했습니다. 세로토닌은 사람의 뇌에서 만들어지는데 이 호르몬은 기분을 좋게 하고 생활에 활력을 주며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안겨주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뇌에서 세로토닌이 덜 만들어지면 감정이 극히 불안정해지며 근심 불안 우울감 등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미국 휴스턴 베일러의과대학의 신경과학자 레인 스트라선 박사팀은 엄마에게 10개월 된 아기의 여러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면서 기능자기공명영상기(MRI)로 뇌를 촬영했더니 아기가 웃고 있는 사진을 볼 때 행복 호르몬이 마구 솟아났다고 의학전문지 \'소아과학(Pediatrics)\' 최신호에 발표했습니다. 아기가 웃고 있을 때 엄마의 뇌 속에 분비된 호르몬은 뇌가 쾌락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었습니다. 이 호르문이 분비 되면 밥 먹지 않아도 배 고프지 않고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다고 합니다. 혹은 환자들이 한 시간 동안 웃었더니 항암제 인터페론이 100배 증가했다는 등 이런 예를 들라면 시간이 없어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뇌에서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인터페론 멜라토닌, cck, 옥시토신 엔돌핀 다이돌핀 같은 행복의 호르몬이 펑펑 쏟아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행복의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여덟 가지 복의 교훈입니다. 이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그대로 실천한다면 반드시 행복은 우리 뇌의 호르몬 뿐 아니라 우리 주의 성령으로부터 행복이 쏟아지게 되고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도 하나님이 다스리심으로 천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4. 주의 의로움을 갈망하는 자에게 행복이 옵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 “의”는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로서 히브리어 ‘체테크’를 번역한 용어로 70인역 성경에서 사용했습니다. 체테크는 법적이면서도 언약적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언하시거나 온전한 의로 변화시켜 주시는 즉 우리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의,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는 내 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입을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행복하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과 성령으로 누려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양심의 평안을 얻으며 예수와 함께 죽어 옛사람이 처리되고 예수의 생명을 받아 살아나고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예수 안의 권세와 능력과 영광으로 충만한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은혜를 입기 위하여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자기 의가 아닌 이러한 예수님의 의를 갈망하는 자만이 하늘에 속한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만 복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의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함처럼 방해 받는 것은 없습니다. 먼저 사탄이 참소가 너무나 커서 보혈 공로를 웬만큼 강하게 믿지 않으면 양심의 정죄가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아주 강하고 담대하고 믿지 않으면 주의 의가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자꾸만 내 죄가 생각 납니다. 나의 부족이 생각 납니다. 나의 상태가 생각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우리를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보혈이지만 내 죄악이 더 크게 느껴져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 중에 우리가 의를 소유함처럼 강한 방해를 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보혈을 잘 알지 못한 사람들은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또 회개합니다. 또 회개합니다. 그래도 용서 받지 못한 것 같아 또 회개합니다. 물론 회개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야 겨우 안정을 갖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의 보혈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보혈은 겨우 혹은 반짝 보혈이 아니요 우리를 영원히 용납하신 항구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24시간 보혈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범죄하기 전에도 보혈, 범죄한 후에도 보혈, 회개하면서도 보혈, 회개한 후에도 보혈, 언제나 보혈로 싸여서 보혈의 공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문설주와 문인방에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지 않은 것처럼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사탄에게 참소 당하는 것을 회개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정죄하는 것을 겸손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회개하더라도 용납하신 주님의 품 안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보혈은  아버지 앞에 드려져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하신 보혈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보혈을 체험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용서를 믿고 안심하면 평안이 옵니다.

사후의 세계에 들어갔다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신자든 불신자든 하나님의 빛 아래서 자기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 피로 씻은 성도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기쁨이 충만하지만 불신자들은 큰 양심의 고통을 느끼고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고 합니다. 양심 없이 살던 사람도 그 때 만큼은 깊이 가책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세상에 살 때 보혈의 공로로 무장하지 못하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때가 온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하신 보혈의 공로를 믿어 사탄의 참소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단이 욥을 시험한 것을 생각해 보세요. 사단이 욥을 정죄하고 시험할 때 그의 많던 재산 다 사라지고 사랑하는 열 자녀도 사라지고 자기 몸도 악창이 나서 썩어 가는데 자기와 함께 해주어야 할 아내와 친구들까지도 욥을 욕하고 정죄합니다. 그 비참함이란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참소를 받아들인 자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보혈을 믿지 못할 때 우리 심령은 죽습니다. 보혈을 믿지 못할 때 우리 심령은 황폐해지고 온갖 평안과 기쁨은 사라집니다.

내 죄를 믿을 것인가? 보혈을 더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내 죄가 아무리 커도 보혈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보혈만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소리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히4:16은 우리에게 보혈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336장 4절의 “미련한 우리 인생은 주의 공로를 모르고 그 쓸쓸한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했던 가사처럼 방황하지 말기 바랍니다. 저도 로마서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그토록 분명히 기록되어 있건만 그 말씀을 내 것으로 삼기까지 얼마나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자꾸만 내 가짜 의를 생각하고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 가짜 의 때문에 우리의 영적 문제가 지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의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이라고 했는데도 사람들은 자기 의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배설물보다 더 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자기 의에 대한 관념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데 큰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본질을 깨닫게 하시려고 어떤 환경 속에 집어 넣으셔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망하도록 놔 두십니다. 그래서 얼마나 추한 자인가를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는 바로 설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기 가짜 의에대한 미련이 강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자만이 착각의 자기 의를 탈피하고 참된 의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세상 유혹의 압력이 너무나 강해서 하나님의 의를 배척합니다. 지금 세상은 죄악이 얼마나 발달해 있는지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죄악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온갖 도색과 우상과 미신과 방탕과 폭력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거리낌 없이 안방까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 배가 불러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안의 육신의 욕망 역시 너무나 강해서 땅에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을 더 갈망하고 있으니 어찌 신령한 것이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아직도 육신적인 것을 갈망합니다.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밖에도 내 영혼을 죽이려는 원수, 내 안에도 나를 죽이려는 원수,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진 육신을 날마다 가지고 다닙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가깝습니다. 지상생활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이 육체는 떼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마른 강렬한 심정 없이는 주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배고프고 목 마를 때 생각나는 것은 음식과 물 외에는 없습니다. 사막에서 목 말라 죽어갈 때 물물물 물을 외치다 죽는다고 합니다. 눈에 물의 환상이 보여 달려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이같은 갈망을 가지고 구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망하는 마음에 하나님은 하늘의 의를 입혀주십니다. 이 의를 입을 때 죄성이 사라집니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되 영원한 영광과 함께 주신 하나님 그 은혜를 맛본 자만이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렇게 주의 의를 갈망하는 마음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그런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으로 팔복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혈로 말미암는 양심의 평안은 물론 예수 안에서 우리 옛사람을 처리하시고 의롭고 영광스럽게 하신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용서의 보혈만 알고 악을 처리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모른다면 조금밖에 모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5:9에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 간절한 갈망을 가질 때만이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5. 긍휼히 여길 때 행복이 옵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자비’를 의미하는 ‘엘레오스’에서 온 말로서 죄를 용서해 주고 궁핍하고 조롱당하는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김이 나의 행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남을 불쌍히 여길 때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베풀고 줄 때 얻어집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에들러 박사는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 환자들에게 두 주간만 자신이 지어준 처방대로 따르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특별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어떤 처방이었을까요? 매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궁리를 해서 그것을 실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처방이요? 비웃었지만 그대로 했던 사람들은 우울증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중병에 걸렸지만 남은 여생을 자기와 같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분들은 같은 환자들보다 대체로 병을 이기는 면역력이 강해 낫거나 보다 오래 사는 것을 봅니다. 자기 몸에도 병이 있지만 봉사하며 살 때 행복의 호르몬이 더 많이 분출되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행복의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나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마6:14-15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마 18장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의 비유에서 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마18:35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중심으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두 계명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3:23). 지난 송구영신예배 시 드린 말씀 기억하시죠? 예수 믿고 사랑하면 우리 심령이 살아요(요일3:14). 사랑하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요(요일3:17).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요일4:18), 온전해지고(벧후1:4), 주님과 함께 살고(요일4:16), 하늘의 빛이 비쳐오고(요일2:10), 구하는 것마다 받으며(요일3:22-23), 형통케 하게 되며(요삼1:2), 가장 신령해지는 길입니다(고전13:12).

다른 것은 모두 부분적이에요. 사랑만이 온전합니다. 바울과 일반 은사자와 차이가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뜻의 전체를 알았지만 예언자들은 부분적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가면 붙잡히게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 알았습니다. 전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만류를 뿌리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얼마나 사랑으로 성숙한 신령한 자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 긍휼의 마음은 역시 성령의 열매입니다. 약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긍휼이 생깁니다.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진정한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안에서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이 귀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성령의 은혜를 갈망하십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확실히 믿고 하나님의 의를 목말라 갈급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그래서 가장 행복한 은혜를 받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