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의 믿음을 고쳐주신 예수님 (요 11:38-44)
이 시간에 “마르다의 믿음을 고쳐주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해도 멈추게 하고 달도 멈추게 했습니다. 또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은 믿음은 당신을 하늘로 인도하지만 큰 믿음은 하늘을 당신에게로 인도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험해도 믿음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사8:20)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마리아의 믿음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 모두 바른 믿음 갖기를 원합니다.
그럼 어떤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 할까요?
1. 아는 믿음보다 믿는 믿음으로 고침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 장사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누이였던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21-22절 보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맨絿척?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고백은 참으로 귀한 고백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마르다의 이 고백 중에서 하나 잘못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22절 끝부분에 ‘아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아나이다’라는 말이 ‘믿나이다’로 고쳐져야 합니다. 아는 믿음이 아니라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관해서는 아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아만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얼마나 믿고 얼마나 체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당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메시아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알아만 가지고는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알아만 가지고는 도움 받을 수 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귀신들도 알긴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2. 나중 믿음보다 현재의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말을 듣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24절에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바로 조금 전에 ‘이제라도’라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하니까 이제는 ‘이제라도’의 고백은 어디로 없어지고 ‘마지막 날 부활에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나중의 믿음보다 현재 역사하는 믿음을 더 기뻐하십니다. 미래 천국도 믿어야 하지만 성령 안에서 현재 천국부터 이루어야 합니다. 현재의 천국 없이 어찌 미래 천국이 있겠습니까? 현재 잘해야 미래의 소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습니다가 없이 나중에 해주실 거라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하지 않고 차차 하겠다는 것은 시험입니다. 그래서 차차 마귀가 가장 교활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잘해야지 낼부터 내년부터 나이 많아서라고 한다면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했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현재 믿음이 아닌 나중 믿음이라면 이 시간부터 바로 믿는 현재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교리적인 믿음보다 진실한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미래의 부활만 생각하고 현재의 부활을 믿지 않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본문 앞 25-2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질문에 마르다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까요? “주여!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도 살고 나중도 살고 영원히 살줄도 믿습니다.”라고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은 조금도 틀림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 자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위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입니다. 즉 주님은 “네가 부활을 믿느냐?”고 질문할 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라고 교리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적으로도 바로 믿어야 합니다. 교리는 성경을 요약한 것이며 총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 것도 좋지만 성령으로 그 사실을 경험하여 죄를 지을 수 없도록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부활을 믿는 것도 좋지만 내 영혼이 성령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또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어야 하지만 성령으로 그 믿은 대로 신유를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교리적인 신앙은 고정관념만 키우고 말과 행동을 다르게 만듭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신앙의 정의를 재미있게 내렸습니다. “신앙은 가뭄 때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기도회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지 않고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하나님! 비를 주세요!”라고 믿고 기도해야지 “하나님은 비를 주시는 분이야!”라는 교리적인 사실만 내세우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에만 머물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실재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4. 환경적인 믿음보다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으로 고쳐져야 합니다.
주님은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믿음이 없는 마르다의 믿음을 보시고 마르다와 대화를 그만 두시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왜 예수님은 모든 기적을 다 홀로 일으키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의 돌문을 옮기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기적을 이루시기 전에 사람으로부터 한 조각의 믿음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모른 채 그때 마르다가 또 끼어들었습니다. 39절 하반부에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마르다의 고백은 ‘환경만 보는 환경적인 신앙’입니다. 죽어 냄새가 나니 안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에 매인 믿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이기는 것이 믿음임을 보아야 합니다. 환경만 보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축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환경은 마치 먼지 낀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믿음을 잃지 말고 그것을 열심히 갈고 닦으면 머지않아 천국 다이아몬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 없는 마르다를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처럼 믿음 없으면 책망 받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 위로도 필요하지만 울기만 하면 책망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웁니까? 왜 실망합니까? 환경을 이기는 믿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큰 산이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처럼 큰 믿음 갖길 바랍니다. 여호수아처럼 요단강을 밟고 건너가는 믿음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책망이란 좋은 것입니다. 책망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의 책망이 울려 퍼지자 누군가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큰소리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산 사람처럼 생각하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하러 간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탄 배가 바람이 없어서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자 선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바람 불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테일러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선장님! 돛을 세워야 바람 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선장이 난처한 듯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남들이 조롱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을 세우겠습니다.” 이런 불신의 믿음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음으로 응답 받습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아는 믿음보다 믿는 믿음, 나중 믿음보다 현재 믿음, 교리적 믿음보다는 진실한 믿음, 환경적인 나약한 믿음보다는 환경을 극복하는 강한 믿음으로 고쳐 온전히 승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