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현실을 복으로 만드는길
부당한 현실을 복으로 만드는 길 (벧전 2:18-25)
이 시간에 [부당한 현실을 복으로 만드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치 않는 온갖 부당한 일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가령 종으로 태어나 일생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일입니까?
지금도 인도에는 카스트라고 부르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 1계급은 바라문이라 해서 사제계급이고, 제 2계급은 왕족, 무사계급, 제 3계급은 농민, 상인 등의 일반 서민들이고, 제 4계급 피정복민으로 이루어진 노예계급입니다. 그런데 카스트 계급에도 들지 못한 계급이 있는데 하리잔이라는 계층입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으로도 치지 않는 불가촉천민 즉 그들과는 접촉조차는 안 되는 천민입니다. 이들은 침조차 땅에 뱉어서는 안 되기에 항아리를 목에 걸고 다녀야 하고, 자기 발자국조차 내서는 안 되기에 빗자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으로 달리트라고도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힌두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 뿐입니까? 최근 국제아동구호단체인 플랜 인터내셔널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Because I am a Girl)\'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매년 1억에 가까운 여성들이 낙태 또는 아이 때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크고 작은 부당한 현실이 존재합니다. 이것들을 개선해 나가야 하겠지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부당한 현실이 결코 손해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현실 가운데서 더 큰 유익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럼 어떻게 부당함을 나의 복으로 만들 ?있을까요?
1. 내가 죽고 순복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18절에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했습니다. 여기 사환은 당시의 노예들을 지칭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노예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지만 당시 교회에서는 노예들도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했고 직분까지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인보다 교회에서는 더 인정받는 일군이 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에게 “나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니까 이제 하나님 말씀은 들어도 주인 말은 안 듣겠다!”하지 말고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의 모습은 원래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부당한 현실일수록 내가 죽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훈련의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불만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래리 버켓(Larry Burkett)이라는 목사는 어느 마켓을 운영하는 한 여자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답니다. “선생님! 저는 몇 년 동안 정직하지 않고 게으르고 불평 잘하는 직원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방송을 듣고 모든 직원을 기독교인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까지 그 기독교인들처럼 불평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저는 직원들을 다 불법체류자로 바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면서 항상 감사하고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좀 더 각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편지였습니다. 혹시 이런 교인들이라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수고를 주인이 보답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고 나의 일만큼 더 충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현실이 육으로만 보면 슬프지만 영으로 보면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19-20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는데 여기 “아름답다”는 뜻은 원문에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실을 신앙훈련을 위한 큰 은혜로 여기시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철저히 죽어지고 순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짓고 고난당하면 그것은 쓸모없는 고난입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도둑질하다 잡힌 사람을 찍은 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주인은 도둑을 차고 때리고 돌로 몸과 손과 발을 찍어서 다시는 쓸 수 없는 병신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인지 중국관련 전문가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기도 그런 일을 보았는데 그것이 사실이랍니다. 그런 후진국이 어떻게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죄를 짓고 고난당하면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애매히 고난당해도 나를 위한 훈련으로 생각할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처럼 좋은 훈련소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훈련을 받습니다. 여기서 기도의 훈련을 받습니다. 겸손의 훈련을 받습니다. 섬기는 훈련을 받습니다. 사랑의 훈련을 받습니다. 죽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부당하면 부당할수록 알고 보면 큰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어두운 날이 지속 되는 것 같지만 온전히 감사하며 나를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100배로 천배로 주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성도들은 모두 이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이것이 부당한 현실을 나의 복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인내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아주 귀한 교훈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본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22절대로 주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높여주실 날이 옵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이 종이 되어 충성했으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만약 불만 불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갖 스트레스로 병들어 죽든지 앙심으로 큰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편 105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시105:17-22절)
3. 사명자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4-25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무고한 고난 같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사명의 고난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두신 것은 내가 속한 곳을 복음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참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음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이어는 73세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77살까지 살게 하옵소서.” 그러다가 몇 년 후에 다시 기도를 바꾸어 “하나님! 77세는 적습니다. 저는 백 살까지 살기로 결정했사오니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동의해 주소서!” 그런데 그렇게 기도한 후에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일찍 일어나게 되고 목욕도 자주 하게 되고 운동도 틈틈이 하게 되고 짜증도 내지 않게 되더랍니다. 목표를 세우니까 그 목표가 나를 끌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야 할 더 큰 목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처럼 애굽과 열방과 자기 가족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을 살 때 부당할 때가 많지만 우리가 그 의미를 깨달아 믿음으로만 임한다면 그것을 놀라운 은혜로 바뀝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딤후2:11-12).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처한 상황에서 불평하지 말고 부당함을 오히려 나의 복으로 만드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