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즐거워야 할 이유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이유 (롬 5:1-6)

이 시간에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나 즐겁게 살기를 바라지만 이 세상살이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많고 너무나도 그런 일을 당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웃자. 웃으면 복이 오고 건강이 오고 성공한다고 말하지만 환경에 붙들리면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어떤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즐거움은 어느 정도일까요?

본문 2절과 3절에 \'즐거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우코메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보통 즐거움이 아니라 가슴 벅찬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너무 즐거워서 견딜 수 없어서 춤추고 노래하고 자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런 즐거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만큼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찌든 세상만 바라보지 마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사실을 본문은 잘 가르쳐 줍니다.

성도가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영원히 지옥 형벌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억만 죄악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알기 전에 율법 아래의 고통은 얼마나 큰지 마음의 지옥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율법의 칼날에 의해서 심령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타고 눌리고 무엇인가에 조여오고 슬프고 외롭고 절망만이 가득한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율법이 하는 것이고 어둠의 사자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지상에 살 동안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복음을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열심만 가진 유대인들이 불행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세상 살 때는 이 고통을 모르지만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이 무서운 고통이 영원토록 계속 됩니다.

그러나 죄인일지라도 영원히 사면 받아 죄 없다 하시는 주님의 복음을 믿게 될 때 그 고통은 다 사라지고 그 기쁨이란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장 마음은 안식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마음에 비쳐옵니다. 이 기쁨은 진정 율법의 심판 아래 들어갔다 나와 봐야 압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죄성까지 씻게 되면 그 영광은 무척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이런 고통을 영원히 당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진정 즐거워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 서 있는 은혜란 은혜의 자리를 말합니다. 주님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은 은혜의 자리인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천국의 영역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쳐옵니다. 그러면서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우리 모습도 영광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고후3:18에 “우리가 -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속죄의 복음에 서지 못하면 아무리 찬양해도 그 심령은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은혜를 경험해도 사막에다 물을 붓는 것 같고 깨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정죄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붓고 부어도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보혈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의의 복음에 견고히 선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성막에서 보여줍니다. 물두멍에서 씻고 피를 가진 자만이 성막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보혈공로에 선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로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쳐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힘써 예배할수록 더욱 강한 기름부으심이 우리를 사로잡아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살게 됐으니 즐겁지 않겠습니까?

3. 고난 속에서도 충만한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환난은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훈련시켜 믿음의 용사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 기도의 사람, 순종의 사람, 겸손의 사람, 섬김의 사람, 전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깨어지고 부스러져 행함 있는 믿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히12:12-13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이 훈련의 수업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항구적인 소망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해도 쓰실 수 없습니다.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을 어떻게 쓰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에 서서 신앙 훈련만 잘 받아 보세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소망을 주실 것이고 온전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복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편할 대로 나가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지금은 훈련해야 할 때입니다. 육신의 게으름을 치면서 더 나아가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4. 아버지의 사랑을 성령으로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말씀처럼 성령을 부어주시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쁨이 넘칩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는 희락이 있는데 희락은 기쁨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 행복이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9:3을 새 번역으로 보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마음에 치유가 옵니다. 마음에 응어리진 것들이 다 풀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성도는 어떤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주전 존경하는 어느 사모님께서 임종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사모님의 영계가 열리고 천사들이 함께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의 황금 면류관까지 다 보여주시며 사모님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귀가 시험했지만 예수님이 안에 계시니 덤비지 못했고 주님의 품으로 가니 울지 말라 유언하시고 찬양하자고 하면서 지휘하시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의 상을 저에게도 보여주셨는데 번쩍이는 수십층 빌딩이 군을 이루고 있었고 하층에는 천사들이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의 직도 귀하지만 사모의 상도 크다는 것을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즐거움을 주시니 임종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마시고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은혜의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충만한 소망과 아버지의 영광과 사랑으로 가득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즐거워할 이유를 주셨으니 언제나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