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바울을 도왔던 사람 일곱이 나타난다. 여기서 약 세 종류의 일군이 있는데 먼저는 데마와 같은 일군이다. 주님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일군이다. 일시적 감정으로 주의 일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마가와 같은 일군이다. 믿음이 어려서 넘어지고 포기하지만 다시 일어나서 좋은 결실을 맺는 일군이다. 그리고 누가와 같은 일군이 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주를 위한 수고와 고난에 동참하며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과 동역자를 위해 수고하는 일군으로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설교)
이 시간에 “나는 어떤 일군인가?”라는 제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군입니까? 여기 바울을 도왔던 하나님의 일군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이름은 약 여섯 명이지만 9절이 디모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모두 일곱 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 세 종류의 일군을 발견합니다.
1. 데마와 같은 일군입니다.
본문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골4:14을 보면 데마는 과거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힐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일시적으로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히자 바울을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것입니다. 기복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어요. 세상의 영광과 복을 구하는 사람은 고난이 오면 언제든지 그만 둘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12:43에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두려워 숨는 것입니다.
부산 고신대학 다니는 여학생의 말을 들으니 여학생들이 처음 입학하면 대부분 목회자 사모가 되겠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2학년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사모 되겠다는 사람은 몇 사람도 남지 않는답니다. 처음에는 영광스럽고 그저 좋아 보이니까 그러나 이미 목회자 사모가 된 선배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사모가 되든 안 되든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 없는 신앙은 신앙도 아닙니다.
이런 일시적 감정의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곧 그만 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거절하시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고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는 데마라면 진정 회개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2. 마가와 같은 일군입니다.
14절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했습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가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다락방 주인집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방을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 배경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가 하면 부짓집 아들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만한 2층집 다락방을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가 고생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마가는 고난을 각오하고 제 1차 전도사역 때 바울과 바나바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얼마나 가상한 일입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복음사역에 외로움과 박해와 고난이 심해지자 그는 참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 1차 전도는 마가에 있어서는 실패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데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다시 뉘우치고 제 2차 전도 때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제 1차 시 제 맘대로 한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행 15:39). 그래서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둘로 갈라져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마가가 바나바와 같은 좋은 사람 만나서 기회가 있었지 아주 버림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더 존경을 받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좀 부족할지라도 기르고 키워서 훌륭한 사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가가 어떻게 됩니까? 그는 뉘우치고 나중에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혔을 때 늘 찾아가서 만나며 바울을 돕고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한 자니라” 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골4:10이나 벧전5:13 등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충성했든지 사도들이 인정할 만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이 마가입니다. 처음에는 고생할 줄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지만 진실로 변화 받은 마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에는 못했다면 진실로 뉘우치고 잘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과거에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나서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도 마가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사람이 두려워 숨어있기도 합니다. 역시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생해 보지 않아서 작은 일에도 인내하지 못하고 뒤돌아서려고 합니다. 이 역시 마가의 모습입니다. 신앙적 자립이 필요합니다. 마가처럼 속히 장성하여 하나님이 인정하고 교회가 인정하는 귀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누가와 같은 일군이 있습니다.
11절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바울의 분신처럼 바울을 도왔던 사람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사람이요 집필가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사는 유망한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포기하고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함께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보면 누가가 바울을 수종을 들면서 함께 했던 흔적들이 많지만 누가는 우리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변함없고 충성된 일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더구나 일생 주의 사역자들을 도와 말없이 교회를 섬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예수님만 같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는데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교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저도 간혹 그런 생각해 봅니다. 내가 교인이라면 어떤 교인이 되었을까? 좋은 교인이었을까? 가시 같은 교인이었을까?
그러나 누가는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바울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노라’ 이 말씀대로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바울의 위로자가 되어주었고 모든 수고를 감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속적인 영광을 버리고 오직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바울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누가였습니다. 나중에 가서 보십시다만 하나님 나라에 바울의 상이 크겠지만 이와 똑같이 상을 받은 사람이 누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섬겼으니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회원 여러분!
충성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본받으십시다. 우리는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외면하는 자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마가와 같다면 속히 온전케 되어 주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누가와 같이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 충성된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