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태 22:1-14을 자세히 읽으세요. 본문의 문학적 정황은? 즉 앞 뒤 문맥 가운데서 본문을 이해하자.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마태의 편집상의 특징은 주제별로, 형태별로 이야기들을 집합시키는 것인데, 예수의 비유 역시 크게 3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져서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13장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며, 두 번째는 18:23-22:14에 나오는 논쟁 문맥에 나오고, 세 번째는 24:45-25:46의 제자들에게 주신 종말설교에 있다. 오늘 우리가 본 구절은 두 번째 부분의 마지막 비유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비유가 말해지고 있는 장소는 “성전에서(21:23)”였고, 비유가 주어지는 대상은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21:23)” 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21:45)”이다. 그리고 이 비유가 언급되고 있는 문맥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키고 난 후에 주어지고 있다. 이 비유는 두 아들 비유(21:28-32)와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21:33-46)에 이어 등장하며, 이 비유 후에는 바리새인(가이사의 세금에 대해), 사두개인(부활에 대해), 한 율법사(가장 큰 계명에 대해) 등과 대결하는 모습들이 등장한다.
2. 공관복음서 대조를 통해 마태와 누가의 차이점을 찾아보자. 마태의 비유의 특징 중에서 어떤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마태는 일관된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22:1-14는 누가복음 14:15-24과 전체적인 내용 면에서는 유사하지만 개별적으로는 적지 않게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유는 마태에서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대한 것이지만, 누가에서는 “큰 잔치”를 배설한 “어떤 사람” 즉 “주인”에 대한 것이다. 마태에서 등장하는 아들은 앞의 비유들에 나온 “아들”에 대한 언급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누가에서는 보냄을 받은 한 사람의 종(눅14:17)과 대조적으로 마태는 복수형 “그 종들”(3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다음 4절에도 “다른 종들”을 보냈다고 말한다. 이 변화들은 이 비유를 앞의 비유의 내용과 좀더 밀접하게 한다(마 21:36). 그리고 마태는 이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는 내용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6절; 마 21:35-36).
그리고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4절)는 누가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5절에서 마태의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14:18-20의 긴 묘사와 대조적으로 상당히 단축되어져 있다.
그리고 마태에만 독자적으로 나오는 것은 7절의 내용인데, 군대를 보내어 왕의 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는 내용이다. 이것은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불태웠던 A.D. 70년의 그 사건이 이 비유의 언어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살인자들의 도시에 대한 임금의 복수는 많은 근동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이기에, 여기서는 특별히 70년에 파괴된 성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8절에서 마태는 “그러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심판의 말을 가운데 잠시 언급하지만 누가는 마지막 부분(눅 14:24)에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로 기록하고 있다.
9절에서 마태는 “사람을 만나는 대로” 초청할 것을 말하는데, 누가는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에는 없는 내용이 마태의 10절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악한 자나 선한 자나”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행함과 의를 강조하는 마태의 신학적 관점과 일치하며, 11절에 이어지는 마태 특수자료 부분인 또 다른 예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마태의 독특한 편집과 구성에 대한 절정은 11-14절에서 이루어진다. 소위 “예복 비유”를 첨가시켜 마태 자신의 독특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11-14절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그 병행구절을 찾을 수 없다. 마태의 의도적인 첨가부분인데, 10절에서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했는데, 13절에서는 난데없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던지고 있다. 앞의 비유와 상충되는 비유인 것처럼 보이나 여기에는 마태의 신학이 들어있다.
마태는 10절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를 그의 교회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마태의 혼합된 공동체는 종말론적 분리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종말론적인 견해를 첨가해야 했다. 그래서 부름을 받고 교회 안에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합당한 열매 없이 교회 생활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경고로써 “예복”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13절의 표현은 마태복음 8장 12절과 25장 30절에 발견되며, 이 비유의 총 결말을 마태는 14절에서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는 비유를 구성함에 있어서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 축약과 첨가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주제와 별 상관이 없는 부분은 축약하였고, 주제를 더욱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첨가를 하였는데, 그가 지침으로 삼았던 Q를 자유스럽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3. 마태와 누가는 Q로부터 본문을 빌려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본래적 본문에 가까운 지를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각 본문이 연출하는 효과(effect)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태와 누가의 비유 각 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
- 마태 : 하나님 나라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하나님께 택함 받을 자는 적다.
- 누가 : 하나님 나라에 청함을 받은 자는 그 청함에 순전하게 반응해야 한다.
4. 본문의 어떠한 점이 마태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관심(들)을 반영하는가? 마태복음에서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는 다른 부분들을 지적하세요.
마태복음 21장과 22장에 있는 세 가지 비유는 예수와 그의 대적자들과의 대결구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예수를 거부함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태는 여기서 머무르고 있지 않다. 두 아들(21:28-30), 포도원(21:33-43), 혼인 잔치 비유(22:1-14)는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의 거부로 인한 심판과 하나님 나라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간다는 점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비유의 결론이 되는 혼인 잔치 비유의 마지막 부분(마 22:11-14)에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심판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24장 45-51절의 악한 종의 비유, 25장 1-13절의 열 처녀 비유,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 25장 31-46절의 양과 염소 비유 등은 모두 일종의 심판 주제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 비유들은 분명히 공동체 내부인들을 위한 것이며, 내부인들에게도 심판이 주어지며, 행함이 있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가질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에 나타나는 비유는 공동체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질 것을 교훈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