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4:22-33

 


                                                                                        

 

 

ꁾ 본문 : 마태복음 14:22-33


마태복음은 교회의 복음이다. 마태복음이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한 (16:18, 18:17) 유일한 책은 아니지만, 그 내용과 구조 모두가 신자들 공동체에 대한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지침을 제공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마태의 공동체 중에서도 특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즉 제자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곳에서 제자들의 자세와 각오,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다.


이 본문 역시 평행되는 다른 복음서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마태의 이런 관심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마태에만 나오는 물 위를 걷다가 빠지는 베드로 이야기는 이런 관심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히 적절하다.


그러기에 이 본문을 통해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과연 교회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이 구절을 설교함에 있어서 다른 평행 본문들과 어떤 차별을 두고 메시지를 전해야할 지 살펴보겠다.



1. 본문의 문맥


이 기적 이야기는 마가복음(막 6:45-52)과 요한복음(요 6:16-21)에서와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직후에 나온다. 이 사건도 앞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소위 ‘자연현상’을 뛰어 넘는 초자연적인 이적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이렇게 연속적으로 기적 이야기를 사용함으로써 효과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뒤 이어서는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장로들의 유전문제로 바리새인들과의 언쟁이 나온다.


이미 마태복음 8장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8:27에서는 예수의 신분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이 본문 33절에서 명백하게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앞의 이야기, 즉 오병이어 사건의 적절한 결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는 이 본문으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태가 추가한 장면으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또한 베드로가 가라앉기 시작할 때, 예수님은 그를 도와주신다(28-31절). 이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자 됨이 무슨 의미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순히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리고 독특하게 28-31절을 첨가하여 베드로로 대변되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 풍랑을 만난 배로 대변되는 마태공동체에 역사하실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제자도”의 교훈이 담긴 글이라 할 수 있다.



2. 본문의 구조


본문은 물 위를 걷고 풍란을 잔잔케 하신 예수의 기적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이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예수의 말씀(27, 31절), 베드로(30절)와 제자들의 말(33절)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제자들이 떠나고 무리가 해산됨 (22-23절a), (2) 산에서 따로 기도하시는 예수(23절), (3) 바다의 강풍을 만나는 배 (24절), (4) 예수의 나타나심과 제자들의 공포 (25-26절), (5) 예수의 자기 계시와 위로의 말씀 (27절), (6) 베드로의 요청과 그가 물 위를 걸음 (28-29절), (7) 베드로의 동요와 구조 요청 (30절), (8) 베드로를 구원하심과 그에 대한 책망 (31절), (9) 폭풍이 잔잔해 짐 (32절), (10) 제자들의 반응과 신앙고백 (33절). 이 중에 (5)는 정확하게 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 이야기는 형태상 치유의 기적과 유사하다. 즉 이야기의 형태는 제자들과 베드로의 난국에 대한 표현, 베드로의 구조 요청, 바다를 잔잔케 하신 기적, 제자들의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이야기는 현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출 3:1-6; 19:9; 33:18-23) 또는 엘리야(왕상 19:11-13)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의 구조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양식을 본떠서 그리스도 현현 이야기를 자주 꾸미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 외에도 예수 변모 이야기(마 17:1-9), 부활 후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마 28:9-10),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마 28:16-20)가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3. 본문의 분석


마태는 이 본문을 마가복음 6:45-52의 내용을 따르고 있는데, 물론 각 절에서도 약간의 첨삭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 본문에서는 크게 마태복음 14:28-31, 33절을 삽입하고 마가복음 6:51b-52절을 삭제하였다. 마태가 어떤 부분을 축소시킬 때나 혹은 확대시킬 때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마태가 축소시키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들이고 또 확대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본문과 병행되는 마가복음과 대조하면서 마태의 의도와 신학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1) 22절에서 마태는 마가복음의 문제가 있는 “벳새다로”를 생략하고, 마가복음의 동사 “보내다” 앞의 “자기 자신이”도 생략한다. 그리고 23절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심을 묘사하면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따로”를 첨가한다. 24절에서는 마가복음의 “바다 가운데 있고”를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로 대치하고, 마가복음의 “[제자들이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를 생략한다. 25절에서 마태는 마가복음의 불가사의한 “지나가려고 하시매”를 생략하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예수에 대한 자신의 설명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4절의 σταδιους πολλους (“여러 스타디아”; 개역성경 - “수리나”)가 다른 사본에서는 σταδιους ικανους로 나오는데 대략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본들에는 “호수 가운데”(μεσον της θαλασσης)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의 해석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2) 26절에서 마태는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이”와 “놀라”를 덧붙인다. 이 단락의 맨 끝 33절에서 마태는 마가복음의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막 6:51)를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로 바꾼다.


거기에다 마태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문장인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를 생략한다. 마가복음 6:51b-52에선, 제자들이 정신이 나갔다,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다고 한다. 마태는 이를 고쳐 33절을 쓴 것이다.


여기에서 “절하다”(proskunevw) 동사는 마가에서 두 번, 누가에서 세 번 나오는 데 반해 마태에서는 무려 13번 나온다(2:2,8,10; 4:9,10; 8:2; 9:18; 14:33; 15:25; 18:26; 20:20; 28:9, 17).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혀 주저없이 “하나님의 아들”(qeou\' uiJo;\")이라고 고백한다. 베드로의 고백(16:16), 예수의 임종을 지켜본 백부장의 고백(27:54)도 그 내용이 같다.


그리고 22, 27, 31절에 사용된 “즉시”(eujqevw\")는 마가의 특징적인 단어이지만 오히려 이 본문에서는 마태에 의해 그 효과가 극대화 되고 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공동체와 제자들, 그리고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즉각적인 반응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신다.


(3) 27절의 “나다”(ejgwv eijmi)라는 말씀은 마태와 그의 독자들에게 단순히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자기 확인이라기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졌다. 본 절과 같은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정황에서 이 말은 출애굽기 3:14과 이사야 43:10; 51:12의 칠십인 역에 제시된 여호와라는 이름의 정의(ejgwv eijmi, “나다”)를 암시한다.


(4) 위의 여러 정황을 보면, 마태는 제자들에 대해 마가보다 훨씬 호의적이었다. 마태에 있어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하며, 따라서 이들은 완전히 믿음을 상실하거나 이해력이 없는 사람일 수 없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의 최초의 추종자들에 관한 곤란한 사실들을 절대로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버렸고(26:56),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나타나셨을 때에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28:17). 하지만 마태는 시종일관 폭풍을 잔잔케 하신 일(8:23-27, 14:22-33)과 혈루병 여인(9:18-26), 변화산 사건(17:1-8), 두 번째 수난 예언과 같은 장면에서 마가의 곤란한 표현들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두 번째 수난 예언에서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심히 근심”하였다(17:23). 마태는 이들의 문제를 믿음이 적은 것으로 규정하였고, 이 본문을 포함하여 “믿음이 적은 자”라는 표현이 제자들에 대한 마태의 실제적인 별칭이었다(6:30, 8:26, 14:31, 16:8).


(4) 특히 28-31절에서는 제자들의 수제자인 베드로 사건을 첨가하고 있다. 아마 이 삽입된 이야기는 구전 전승에 근거하여 마태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안에 있는 많은 표현들이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마태가 제자들을 다루는 모습에서 베드로의 두드러진 역할은 아주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의 대표로 등장하는데, 그 횟수가 마가에서 보다 훨씬 많으며, 더러는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은 내용들도 나타난다. 이 본문 외에도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발견하게 될 베드로(17:24-27),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18:21-22),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 이후의 예수님의 축복(16:17-20) 등이 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누릴 열 두 보좌에 대한 예언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며(19:27-30),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베드로가 잠들었다는 사실이 두 번이나 강조되어 있다(16:37, 40).


그리고 마태는 베드로의 두드러진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아울러서 이야기하는데 그 대표적인 부분이 이 본문과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이어지는 예수의 수난 부인이라 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지게 되었고, 16장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가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만류하다가 예수께로부터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질책 받게 된다.


신앙고백 이후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며, 공동체에서 “매고 푸는” 능력, 다시 말해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막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부여 받았다(16:19). 18:18에 보면 공동체 전체가 “매고 풀” 수 있다고 말씀하니까 베드로의 권위는 공동체의 권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태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인 동시에 공동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5) 30절에 베드로의 믿음이 부족했던 원인은 집중의 실패 때문이었다. 그는 거센 바람에 의해 마음이 산란해졌다(베드로가 두려워하는 이유를 강화하기 위해 첨가 되었을 “강한”(ισχυρον)을 생략한 사본도 있다). 그의 마음은 예수의 능력을 믿는 믿음보다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리하여 다시 공포로 가득 찼다. 그는 빠져 가기 시작했고 절망 가운데서 소리를 질렀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8:25에서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 탄 제자들도 거의 정확하게 동일한 소리를 질렀다. 이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에는 거의 부정할 수 없이 전형적인 특징이 존재한다. 구원의 근원이 하나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긴박한 곤경의 순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울부짖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6) 31절에 예수께서는 “왜 의심하였느냐”(eij\" tiv ejdivstasa\")고 물으셨다(신약성경에서 “distazein”이 유일하게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는 28:17이다. 이 단어는 “나누어진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의심의 대상은 정말로 물 위를 걷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고, 따라서 간접적으로 예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구원을 받았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메시지는 베드로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마태의 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7) 33절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진다. 물 위를 걸으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현하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아들”을 후에 교회가 분명하게 나타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전달자, 하나님의 메시아적 대행자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본문의 결론은 16:16에 나오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상케 한다. 16:16의 대답은 그와 같은 대답이 최초였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마태의 기독론은 5장에서 시작된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시종일관되게 이루어진다. 본 단락과 본 절은 이렇게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정점을 이루며, 16:16은 더 높은 절정이자 마태복음 전체의 전환점이다.


(8)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 기적과 이 앞의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다. 예수의 치유기적들은 잘 알려진 심인성 신체 질환 치료 현상으로 인해 별로 크게 문제 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적과 이 앞의 기적은 자연법칙에 대한 직접적인 위반이다. 만일 해석자의 세계관이 이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연주의적 설명을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물위가 아닌 물가를 걸었거나 수면 바로 밑의 돌을 밟고 걸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은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고 복음서 이야기들과는 조화되지 않는다.


그럼 이와 같은 기적들은 불가능한 일로 배제되어야 하는가? 성경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독특하고 가장 중요하게 활동하신다면, 이런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역사 내에 초월적인 사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갖가지 전혀 다른 기록들의 수집이 되어 버리고 만다. 즉 역사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관한 우화집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의 역사성을 여기서 확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태가 기록한 기적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하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는 근본적으로 기독론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4. 본문의 메시지


(1) 본문에서 제자들은 바다에서 풍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구약에서 바다는 악의 상징 또는 악의 처소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으며,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바다를 제압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시 89:8-9, 시 65:7; 107:29 참조).


바다는 인생을 집어 삼키는 위험한 세력이다. 하나님은 바다의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인생을 위협하는 죽음과 혼돈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 바다 위에서 위협을 당하고 있는 배. 배는 자주 하나의 공동체를 상징한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상징할 것이다. 이 배가 바다에서 풍랑에 휩싸여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죽음과 고난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난의 한복판에서 예수께서 다가오신다.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떡과 물고기를 크게 늘리셨고,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출하신 예수께서는 바로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셨고, 자기 백성이 에워싼 악으로 인해 의심할 때 그들을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 교회의 주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는 모든 환난을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공동체는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그 고난 가운데 홀로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고난을 밟고서 공동체를 향해 다가오신다. 공동체는 그분과 함께 그 고난과 환난을 헤쳐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공동체는 이 예수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2)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에서와 달리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장면(28-31절)이 들어 있다. 이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자 됨이 무슨 의미인가”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전권에 완전히 참여한다(29절). 그들에게는 ‘의심’으로 말미암은 시련이 또한 끊임없이 존재한다(31절). 의심이란 한편으로 주님에 대한 신뢰와 다른 한편으로 위험을 불안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것 사이에 두 쪽으로 갈라진 상태이다.


“의심”의 헬라어적 의미 또한 “나누어진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며, “두 가지 방향”으로 가는 것, 두 길을 동시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사람들이 그의 가슴 속에 하나는 이리로 다른 하나는 저리로 기울어지는 두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실 신앙인이 예수의 말씀에 엄밀하게 집중하여 살아갈 때면, 그 신앙인은 현실적으로 폭풍과 풍랑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철저히 예수의 약속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마태에 의하면 그러한 믿음에 모든 것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과 명백한 개인적인 위험 사이에 이리 저리 눈을 돌린다면, 그 믿음은 믿음이 적은 것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괴테가 이 이야기에서 읽어 낸 것처럼 “가장 어려운 모험 안에서 믿음과 참신한 용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엄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믿음이 문제되고 있다. 실제로 이 믿음은 베드로가 거부하는 바로 그 순간, 거기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제야 비로소 그는 그의 주님을 보고 그로부터 도움을 기다리는 것 이상의 다른 아무런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마태에 의하면 제자와 그의 임무 수행을 항상 위협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 적은 것’(또는 ‘적은 믿음’)이다(마8:26; 14:31; 16:8; 17:20). 그러나 이 ‘적은 믿음’은 부정적인 의미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제자도” 중의 하나이다.


‘의심’에서 시작된 ‘적은 믿음’은 특별히 종교적인 개인의 당당한 성취가 아니라 주님과 그의 명령 그리고 그의 도움에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이 신뢰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이 거기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폭풍과 풍랑으로 대변되는 고난을 통해, 환난을 통해 제자들에게 강요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그랬듯이 제자들을 그러한 위험에서 구원하신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를 읽는 많은 오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오라! 믿음이 적은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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