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의 신령한 교훈

베데스다의 신령한 교훈 (요5:1-9)

(요약)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절망의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소망을 주셨다. 베데스다 못은 소망의 예수님을 보여준다. 베데스다가 양문 곁에 있듯 예수님은 죄와 저주를 지셨기에 소망이 되신다. 또 베데스다가 자비의 집이듯 예수 만나면 아버지 사랑을 받으니 소망이 온다. 또 베데스다의 물이 동하듯 예수 만나면 역동적인 성령의 새 능력을 받기에 절망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소망 주셨다. 이처럼 찾아오시는 분 즉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설교)

세상에서 가장 큰 병은 절망의 병입니다. 이 절망에는 현실적인 절망이 있고 마음의 절망도 있습니다. 둘 다 조심해야 할 절망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절망 중에 안타까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과정을 보여주시면서 너도 그 뒤를 따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다음 나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다시 살면 주님과 같이 영생하는 사람이 되겠구나 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소망은 지금도 이루어가고 있는 저의 부푼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혹시 절망 중에 계신 분들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소망을 얻은 이야기입니다. 38년이면 완전한 절망의 상태입니다. 그는 소망 가지고 베데스다를 찾아왔지만 아무도 소망 주는 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베데스다는 그에게 소망을 주지 못했어도 참된 베데스다 연못 되신 주님은 그에게 소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도 베데스다 되신 주님을 더 깊이 만나 소망으로 충만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왜 예수님 만나면 소망을 얻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본문의 베데스다 연못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절망을 지신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2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라고 했습니다. 양문 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러 문이 있는데 양문은 양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양을 팔던 시장이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양을 사서 성전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양문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이 양문 곁이란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지신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오면 구원과 용서와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까지 다 청산해 주십니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저주 아래 살았습니까? 그래서 나무 하나 베지 못하고 돌 하나 옮기지 못했습니다. 만약 함부로 했다가는 여기서 죽고 저기서 죽고 그래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이 땅이 얼마나 거룩해졌습니까? 어떤 저주도 다가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보이는 저주나 보이지 않는 저주나 다 우리 주님이 지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통이 있습니까? 슬픔이 있습니까? 절망이 있습니까? 삶의 저주가 있습니까? 우리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만나면 다 해결 됩니다. 예수 만나기 전에는 우리의 짐이 결코 내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이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2.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디시 2절을 보니까 그 연못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성경은 연못의 이름을 특별히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기자가 그렇게 이 연못의 이름을 부각시키고 있을까요? 그 이름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혹은 ‘긍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연못의 중앙과 주위에는 행각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곳에 와서 누우며 쉴 수 있었습니다.

3절 보니까 그 안에는 많은 병자도 올 수 있었습니다. 소경도 있었습니다. 절뚝발이도 있었습니다. 혈기 마른 자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해야 합니다. 3절과 6절을 보면 누웠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즉 누구든지 행각에서 마음껏 누워 쉴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장소인 것입니다.

지금 노숙자들이나 무주택자들이 많은데 어서 속히 집 없는 사람이 없는 때가 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집은 없어도 우리가 언제나 쉬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 곳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다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이 있습니다. 거기에 쉼이 있어요. 거기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면 때려도 기쁘고 욕을 먹어도 즐겁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평안해요. 그것은 예수 안에서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크신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 안에서 역동적인 새 능력을 입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4절에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온천의 일종으로 간헐천으로서 간혹 물이 나오다가 치솟아 오르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강력하게 분출하는 베데스다의 물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새 힘을 주시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사40:29-31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없으면 지혜를 주시고, 재능이 없으면 재능을 주시고,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주시고, 용기 없으면 용기 주시고, 앞날을 예건하는 능력도 주시고, 신유의 치료도 주시고, 영분별과 기도의 능력도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자신감도 주십니다. 마음의 소원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에요.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어떤 어려움도 다 이기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만나면 절망은 없어요.

어떤 아이가 백혈병에 걸렸는데 교회와 부모의 수많은 기도 속에서 기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도 있습니다. 수많은 생사의 순간이 있었고 결국 무균실에 들어가 있는 아이에게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심장을 체크하는 기계는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훗날 그가 이런 간증문을 썼습니다. “갑자기 내 생명이 빠져나간 것을 느꼈어요. 어떤 무서운 사람이 자기를 잡으려고 왔어요. 순간 저 사람에게 잡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망가는데 그 사람이 쫓아오는 것예요. 강이 보였고 징검다리가 놓였어요. 그 다리를 건너 도망가는데 그 무서운 사람이 더 이상 쫓아오질 못하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그 징검다리마다 글이 쓰여 있었어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예수님 만나면 어떤 소망이든지 소망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전에 입시를 앞두고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때 저는 공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철야기도하면서 입시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은 떨어져도 주님을 더 사랑함을 더 귀히 여기자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제게 놀라운 지혜를 주셨고 자신감을 주셔서 준비 잘해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상태로 보아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낙방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저의 삶의 원리입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도 인간의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완전한 절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이라면 고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7절에 못에 넣어줄 사람을 바랬던 것을 보니 대단한 중병 상태입니다. 더구나 베데스다 못가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만 살려고 뛰어 들어갈 뿐 어느 누가 넣어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무서운 이기주의 사회입니다. 혹 물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미신일 뿐 낫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그 순간 그의 병은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1절 보면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여기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임하신 이 진리가 아주 귀한 진리입니다. 만약 주님이 친히 임하지 않았다면 그는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이 성령으로 친히 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육체로 오신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수십억 사람 틈에서 주님을 발견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 성령으로 임하시는 동일하신 주님을 누구든지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고 하신 것도 성령 안에서 임하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 절망은 사라지고 소망이 찾아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에 절망이 있습니까? 마음에 절망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절망을 다 지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되신 우리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주님을 만났지만 더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더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죄와 저주와 고난과 고통과 절망은 다 사라지고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화 다빈치코드의 요약)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로서 예수님이 결혼했으며 그 후손이 엄청나게 많다는 비밀(가설) 위에 만들어진 허구적인 작품이다. 즉 예수의 결혼 사실을 비밀로 지켜온 사람들 중에는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있으며 그는 이 비밀을 자기의 그림 ‘최후의 만찬’ 속에 암호(Code)를 넣었다는 것이다. 그 암호를 해독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과 결혼하여 \'사라\'를 낳았는데 그 후손이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거짓에 바탕을 둔 비역사적이며 반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소설로서 기독교인들을 자극하여 흥행을 노리고자 하는 상술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