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히 보시는 성도가 되자

귀히 보시는 성도가 되자 (롬6:1-11)

(요약)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보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죽어진 사람이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산 자이다. 잘 죽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나의 사건으로 받고 성령 충만을 통해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늘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죽으면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게 되고, 영생을 경험하며, 많은 열매를 맺고, 사망이 다시 왕 노릇하지 않으며, 그 사람에게 주님이 온전히 임하신다.

 

(설교)

이 시간에 귀히 보시는 성도가 되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일까요? 잘 들어보세요.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죽으면 하나님 보실 때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백만 불짜리란 용어를 쓰는데 이 용어는 금전의 단위의 의미를 넘어 아주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영화 말아톤에서 배형진 군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면서 하는 말이 있지요? “형진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훌륭하다는 뜻이죠.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 보시기에 백만 불짜리의 귀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죽어져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어떤 부분에서만 죽는 선택적 죽음입니다. 2절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랬습니다. 그리고 11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살고 죄에 대해서만 죽은 선택적 죽음과 삶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가령 잡초는 죽고 곡식에게는 이롭게 하는 제초제가 있다면 바로 그런 죽음입니다. 잡초는 죽고 곡식은 살리는 제초제와 같이 죄와는 상관없고 의에는 상관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입니다.

딛2:14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죄와는 관계하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 섬김과 선한 일에 대해서는 이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떤 학생이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목사는 공동묘지에 가서 험한 말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누가 무어라 하더냐? 아무 대꾸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게 죽는 것이다.

그럼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하겠다는 다짐은 중요하나 내 스스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딤전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듯 우리가 죽으신 복음의 말씀에 서고 다음에는 기도로 성령으로 죽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말씀을 믿고, 한 편으로는 늘 기도하여 성령 충만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주님이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옛사람을 자기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믿는 그 말씀에 서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11절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이 진리의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는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간단히 죽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롬8:13에 “영으로서 몸이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령 충만 받아야 합니다. 이 믿음과 성령이라는 이 두 바퀴가 잘 굴러가면 온전히 죽어지게 됩니다. 한 가지만일 때는 실재를 경험치 못합니다. 두 가지가 잘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복하고 겸손과 감사와 충성의 귀한 성도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 공로이지 무슨 훈련이 필요하느냐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는 이미 죽었다는 과거성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현재성이 있습니다. 즉 우리 죄는 십자가에서 멸했지만 우리 자아는 늘 말씀에 순복되어져야 합니다. 자아의 죽음이란 목석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순복하고 기다리고 믿고 맡기는 그런 형태의 죽음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훈련시키십니다.

그럼 죽을 때 누리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1.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2절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했습니다. 6절에 죄의 몸이 멸해진다고 했고, 7절에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다른 종교에서 이 수준에 오르려고 수십 년 도를 닦아도 불가능한 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쉽게 이룹니다.

어떤 동네에 소리 잘 지르고 욕 잘하기로 유명한 소몰이 영감님이 있었습니다. 이 영감님은 소 몰고 나갈 때면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감님이 어느 날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동네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 영감님이 얼마나 달라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감님이 소를 몰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소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큰 소리만 명령을 들어온 소들이 갑자기 달라진 영감님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소들이 말을 잘 듣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렇지만 “소들아 일어나라, 소들아 일어나라” 해도 소들은 꿈쩍도 하질 않습니다. 이거 잘못했다가는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영감님은 또 다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런데 기도하던 영감님의 머리에 와 닿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영감님은 회초리를 번쩍 들더니 소의 엉덩이를 내리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뭐라고 질렀을까요? “이 넘의 소 새끼?”가 아니라 “할렐루~야”였습니다. 그랬더니 꿈쩍도 않던 소들이 후닥닥! 다 일어나고 말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이지만 진정 죽은 사람은 성격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지고 삶이 다 달라진다는 교훈입니다. 죽어 죄에 방황하지 않게 되면 백만 불짜리 신앙이 됩니다.

2. 죽으면 영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했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은혜로 죽으면 삽니다. 우리 심령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생명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억지가 아니라 풍성하고 자동적인 삶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평강이 오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며 저절로 하나님의 뜻을 품고 그 뜻대로 살아집니다.

죽기 전에는 마차를 손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었는데 죽은 후에는 자동차를 차고 가는 기분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지 무겁고 힘든 율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고 율법대로 자동으로 살아지게 됩니다.

3.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복을 받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열매 맺습니다. 많이 죽을수록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죽어야 하나님이 쓰세요. 쓰시되 귀히 쓰십니다. 주님도 죽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만 죽어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4. 죽으면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않습니다.

8-9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했습니다.

에스골 골짜기 마른 뼈들처럼 심령이 살아납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천국의 삶이 누려집니다. 심령이 낙원으로 변합니다. 마음의 옥토가 되어 온갖 열매를 맺습니다.

5. 죽으면 참된 쉼이 있습니다.

계14:13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그동안 온갖 죄악된 일에 간섭하고 염려하던 피곤한 심령이 맡기기 때문에 안식이 옵니다. 죽어짐의 큰 소득이 안식입니다.

6. 죽은 자에게 주님이 임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히9:28에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했습니다. 여기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가리킵니다. 즉 죽어야 주의 재림을 맞을 준비가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의의 흰옷입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고 또 힘써야 할 말씀이 이것입니다.

항상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고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입니다. 성경 롬8:30은 말씀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안에서 보면 이 주님 안에서 이미 죽고 부활과 승천과 영광 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복음에 설 뿐 아니라 우리 몸을 항상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입니다. 롬6:19에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거룩함에 이르는 또 다른 한 면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죽으면 산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사심 안에서 우리를 죽이시고 살리셨습니다.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죽어야 영광 가운데 거합니다. 죽어야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 모두 말씀과 기도로 옛사람은 죽고 온전히 새 사람으로 살아 주님이 귀히 보시는 백만 불짜리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