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혼자 할수 없으리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출18:13-27
‘소통’이라는 말이 지난 광우병 파동 이후 계속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疏通’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1.막히지 않고서 통함.(차량의 소통이 원활하다.)
2.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동물들은 특유한 몸짓이나 소리로써 의사를 소통한다.)
생각이나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풀이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소통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써왔던 ‘流通’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느낌이 아니라 정확한 뜻을 살피기 위해 사전을 찾으니 유통이란 말은 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풀고 있습니다.
1.공기나 액체 따위가 거침없이 흘러 통함.(공기의 유통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하다)
2.화폐나 수표 등이 세상에 널리 통용됨.(화폐의 유통)
3.상품이 생산자, 상인, 소비자 사이에 거래됨.(수입 상품의 유통 과정?/시중에 널리 유통되는 외국산 농산물/유통 단계에서 변질되다.)
정확한 이해일지는 모르겠지만, 유통이란 말이 공기나 액체, 화폐나 수표, 물건이나 상품 등이 서로 통하고 통용되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라면, 소통은 무엇보다도 마음이나 생각이 서로 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통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가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쌓인 오해는 서로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것이고, 마침내는 단절을 가져오고야 말 것입니다.』(기독교사상 2008년 7월호, ‘짧은 두레박’)
『우리나라의 예는 아니지만 얼마 전에 월간 잡지 ‘리더드 다이제스트’ 독일어 판이 독일 국민들을 상대로 실시한 직업관 조사에 따르면 독일인들이 가장 신뢰를 보이는 직업은 소방관이었습니다. 무려 94%의 신뢰를 보였으니 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셈입니다. 목숨을 건 구조활동이 그토록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고 보여집니다. 그 외에도 높은 신뢰를 받고 있는 직업으로는 비행조종사(93%), 병원 간호사(91%), 약사(86%), 병원 의사(73%) 등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직업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학교 교사가 60%, 법관이 59%, 기상예보관이 57%, 신부와 목사가 55%, 변호사가 50%로 절반 가량의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뢰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언론인이 27%, 세무회계사가 20%, 노동조합 간부가 17%, 자동차 판매원이 11%, 마침내 신뢰도는 한 자리로 떨어지는데, 바로 정치인이었습니다. 6%였는데 해마다 하는 조사에서 늘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기독교사상 2007년 7월호, ‘짧은 두레박) 이 조사가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 정치인이 신뢰도에서 꼴찌라는 것은 독일이나 우리나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스승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경제를 풍족히 하고, 안보를 튼튼히 하며,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 정치일세.”
스승의 대답을 들은 자공은 다시 물었습니다.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셋 중에서 무엇을 먼저 버리는 것이 좋습니까?
공자의 대답이 궁금한데, 셋 중에서 부득이 무엇을 버려야 한다면 안보를 버려야 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안보를 버리면 나라를 잃게 될 터, 그럼에도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안보를 버려야 한다고 함으로써 안보가 백성들의 먹을 것을 챙기는 것과 신뢰를 잃는 일에 앞설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공은 다시 묻기를 남은 둘 중에서 하나를 또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앞세워야 하겠는가를 물었습니다. 결국 자공은 정치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경제를 버려야지.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지만, 백성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고는 나라가 지탱할 수 없는 것이지.”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군대나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말이, 백성들의 믿음이 안보와 경제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 소중한 말로 다가옵니다. 백성들의 신뢰, 그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기독교사상 2007년 7월호, ‘짧은 두레박)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가 필요하며, 반대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서로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야 할 것이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정쩡한 변명이 아니라 서로의 정직한 소통, 진솔한 대면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소통의 정치입니다. 소통에 귀 막은 정치는 사실상 독재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통이 막혀지면 흐르는 물이 고여 썩는 것과 같이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출 18:13 이하는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가히 이스라엘의 민주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무소부재의 왕 파라오의 노예로 신음했던 이스라엘이 노예로부터 벗어나 주인이 되는 과정에 있는 광야 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혼자서 백성들에 대한 재판을 하루 종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말합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여기 ‘옳지 못하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모세의 장인은 모세가 혼자 하는 것에 단지 효율성이 떨어지기에 옳지 않다고 했을까요? 여기 ‘옳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하루 창조를 끝내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좋았더라’라는 말과 같은 히브리어인 ‘토브’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한 창 2:9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선’이라는 말도 역시 같은 말입니다. 즉 모세가 혼자 하는 것이 선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장인이 ‘옳지 못하도다’고 말한 것은 모세가 혼자 하는 것이 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악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집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칫 독재로 갈 수 있습니다. 일인 독재 파라오로부터 벗어나 다시 독재자가 모세로만 바뀐 노예의 굴레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본문 18절에서 말합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혼자서 재판하는 모세나 그 재판을 하루 종일 기다리는 백성 모두가 기력이 쇠할 것이며 그리고 혼자서 하는 그 일이 모세 자신에게도 무겁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 혼자서 하는 것이 모세에게만 힘든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장인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모세에게 본문 19절 이하에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백성의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가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판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율례와 법도를 백성에게 가르쳐 그들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켜야 할 법과 도리를 백성들로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로 누구의 지시를 무조건 받아서 움직이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법을 지켜 살아가는 주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모세의 장인은 본문 21절 이하에서 천 명, 백 명, 열 명을 단위로 다스릴 중간 지도자들, 이른 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양성하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하며 유능한 사람들로 세우라고 합니다. 혼자서 모든 백성과 소통할 수 없기에 백성의 사건들을 잘 듣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중간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로 말하자면 풀뿌리 민주주의입니다. 밑에 있는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소통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은 노예로부터 벗어나 더불어 함께 공동체에 주인의식을 갖는 민주화요, 이것은 정치적 해방이기도 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더불어 함께 나누며 섬기는 곳입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 일 혼자서 해보셨습니까? 물론 혼자서 해야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일을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혼자 하려고 욕심을 낸 적은 없습니까? 혹 다른 사람들에게 혼자 칭찬 받기 위해서 혼자 하지는 않았나요? 혹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아 원망하면서 봉사를 한 적은 없나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서로 기쁘게 봉사를 한 경험이 있습니까?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영을 베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누구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는 민주적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여러 가지 회의와 조직들이 있습니다. 서로의 의견을 모으고 또 서로 일을 나누어 맡는 것입니다.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마음 상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고 함께 일을 나누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주인의식이 아니라 주인 노릇을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주인은 책임을 갖고 새로운 식구들이 교회에 잘 적응하도록 팔을 걷어 부치고 대접합니다. 물론 교회의 직분은 모세의 장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사람이 맡아야 하는 소중한 직분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함께 교회를 이끌어 갈 때 교회는 건강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좀 무거운 보이는 바위를 들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들어 보려고 했으나 잘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도저히 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아, 최선을 다해서 들어 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다시 힘을 내어 바위를 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무거워 들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들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말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들어 보았느냐?” 그러자 아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들어 보았어요.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같이 들어 달라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은 나만의 최선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개인으로 보자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로 보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최선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일도 같이 해야 되지만 교인은 놀아도 같이 놀아야 합니다. “네가 혼자서 할 수 없느니라”라는 모세의 장인의 이 말씀은 건강한 공동체를 위한 소중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3.1 운동 90주년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1 운동은 일제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우리의 출애굽 운동이었습니다. 『3.1운동은 국권을 강탈당한 지 9년 만에 자주독립, 공화주의, 국민통합, 비폭력의 가치를 추구하며 맨주먹으로 일어선 세계사적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외 무장독립운동을 촉진하고 국내적으로 민중의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진흥, 신문예운동, 산업운동이 일어나고, 납세거부운동, 물산장려운동, 국산품 애용등 경제적 자립운동이 전개 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반영자주운동, 이집트와 터키의 독립운동 등 피압박 민족해방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헌법 전문에서 3.1 운동 정신을 잇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다고 천명한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며 국민적 합의였습니다. 이후 아홉 차례의 개헌 과정에서도 이 내용은 헌법 정신의 불변치가 되고 대한민국 정통성의 탯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3·1운동과 임시정부와 헌법 정신이 도전받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시대를 찬양하는 근대화론자들이 정권의 중심에 있으면서 교과서를 왜곡하고 정부수립일을 건국일(절)로 기념하고 임시정부를 영토와 주권을 갖지 못한 명분상의 존재라고 폄하했습니다. 심지어 몰지각한 부류는 미군정이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라고 참람한 ‘학설’을 내놓습니다. 이들에게 3·1운동→임시정부→독립운동→통일운동→민주화운동은 폄훼·말살의 대상입니다. 김구 선생님은 테러리스트가 되고, 임시정부는 가정부, 4월 혁명은 시위데모,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은 폭동, 촛불집회는 철부지들의 난동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이 추구했던 공화제의 가치는 ‘민간 파시즘’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입법·사법·행정·지자체·감사원을 한 묶음으로 엮고 국정원·검경·족벌신문을 정권의 홍위병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파문이 보여주듯 외세에 대한 분별없는 추종과 동포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와 적대를 낳고 있으며 남북관계도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비폭력 정신은 실종되어 용산에서 6명을 불태워 죽이고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힘없는 서민들만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지난 90년 동안 올해처럼 3·1운동이 폄하되고 왜곡된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건국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합니다.』 (한겨레신문, 2009년 2월 28일 시론 ‘3.1운동은 휴화산이 아니다’, 김삼웅)
『지난 해 12월 17일 황우여 한나라당 의원 등 국회의원 10명이 제출한 ‘건국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보면 포상 대상으로 좌익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을 자행한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과 대한민주청년동맹과 같은 독재자 이승만 전대통령의 지계조직과, 서북단체처럼 ‘백색 테러’로 악명 높았던 극우단체조직원등 4,000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복회 조세현 이사는 “역대 어느 정부와도 지금처럼 대립각을 세운 적은 없었다.”며 “대통령은 이제라도 원로들의 충언에 귀를 열고 뉴라이트가 아닌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벙커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한겨레신문, 2009년 2월 26일 이명박 정부 1년 평가)
사실 3.1운동 때 기독교는 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민족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백성의 아픔이 무엇인지, 이 나라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울부짖는 이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일어난 것입니다. 3.1 운동에 기독교는 16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의 통로가 되었으며 종교인으로는 가장 많은 수가 참여하였고 그 이후에 계속된 독립만세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 교회는 소름끼칠 정도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근대화, 성공 신화에 젖어 있습니다. 하긴 그 경제 공약도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아모스 호세아 등 구약의 예언자들의 음성은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달콤한 이야기만 들려올 뿐입니다. 더 이상 이 민족의 분단, 형제의 배고픔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건강하고 진지한 소통은 없습니다. CEO가 명령을 내리면 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되는 회사와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한 돌을 맞았는데, 공식 기자회견 하나 없습니다. 저 혼자 떠드는 일방적인 라디오 방송뿐입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취임 한 돌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건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국민과의 소통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국민 앞에 서면 자신이 없고, 일방적으로 거짓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청와대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라디오 연설의 원조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재임 중 무려 1023 번이나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소통하는 대통령과 불통하는 대통령과의 차이입니다.』(한겨레신문 2009년 2월 27일, 유레카)
“네가 혼자 할 수 없느니라”는 깊은 연륜이 베어나는 모세의 장인의 가르침을 모세는 받아들였습니다. 모세는 소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상식을 못 받아들이는 대통령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입니다. 그만큼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책임을 모릅니다. 우리는 아직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무엇이든 저당 잡혀도 좋은 아직 우리는 3.1 운동의 고귀한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갈 때, 배고프고 목마를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이집트 노예시절의 고기 가마 시절이 좋았다고, 노예로 있었지만 밥은 굶는 일은 없었다고 아우성치며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3.1 운동은 상식의 운동입니다.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사람답게 살자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경제 근대화를 넘어서 인간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를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백성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3.1절 90 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이웃의 신음소리, 이 민족의 신음소리를 듣는 소통의 역사를 이루는 우리 하늘샘 교회, 교우들 서로의 아픔을 듣고 함께 그 아픔을 나누는 우리 하늘샘 교회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