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마6:9-13.마18:23-35
오늘은 주기도의 다섯 번째 기원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입니다. 원래 마태복음 원문에는 죄가 `빚\\\\\\\'으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죄\\\\\\\'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기원의 주된 내용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며 그 다음 조건문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입니다. 두 문장의 세 가지 주제는 죄·고백·용서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잘 아는 청년이 우리 나라에서 이름 있는 기업체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맡은 분야가 해외 무역이었습니다. 몇 개월 후에 그 청년을 다시 만나서 직장에 잘 적응해 가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직장을 사임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연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입사해서 해외 무역 관계를 맡게 되어 자기도 큰 기대를 가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외국에서 중고 중장비를 사들여 약간 손질해서 국내 시장에 파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데는 너무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할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고 했습니다.
주기도의 다섯 번째 기원은 일용할 양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속여서 팔기도 해야 하고, 얻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와 같은 현실에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플러스 알파가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도 양심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죄책감 때문에 갈등과 고민으로 시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의 목표 가운데 중요한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 수 있을까? 입니다. 그러한 문제에 골몰하다 보면 자연히 소극적이 되고, 현실을 기피하거나, 현실을 악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육체적 요구\\\\\\\'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영적 요구\\\\\\\'를 거의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이 시대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의식이 매우 희박해져 가는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에서는 `죄\\\\\\\'라는 용어를 점점 기피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자연히 `회개\\\\\\\'라는 용어도 점점 사라져 갑니다. 요즈음 서구 사회에서는 죄, 회개라는 말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으로까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죄책감을 매우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희생양\\\\\\\' (scapegoats)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어려움의 현실을 자신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가급적이면 희생양을 만들어 내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다 물으려고 합니다. 올바른 사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좌절과 실망은 바로 그러한 잘못된 집단의식으로 이 사회가 이끌려 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우리가 깨끗하다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어느 사회에서나 그 안에서 쌓아 가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문명의 피라밋의 형성 과정에는 온갖 죄악들이 다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사람이면 다 거기에 연류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네오막시즘\\\\\\\'(Neo-marxism)에서는 지식인들에게 수치심을 불어넣습니다. \\\\\\\"당신들은 불쌍한 민중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게 해서 사회 혁명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역시 착취·거짓·불의·인간의 존엄성 파괴라는 더 큰 악이 내재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죄는 어둠의 현실에서 몸을 도사리며 착하게 살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보다 적극적 면으로 책임(responsibility)과 관련됩니다. 만약 우리가 죄의 문제를 얼마큼 착하게 살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항상 이 현실을 적대시하고 이 현실을 도피해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삶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죄의 고백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이 됩니다.
그러나 이 주기도의 기원에 나타나 있는 죄의 문제는 그러한 의미와는 다릅니다. 여기에 기록된 죄의 문제는 사회와의 고립된 가운데서가 아닌 사회와의 관계 가운데서 책임과 관련됩니다. 이 사회라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책임을 다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죄의 고백은 자신의 부인이 아닙니다. 자신을 받아 드리는 것이며,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책임과 실수를 인정할 줄 알게 됩니다.
에덴의 비극은 이 책임성의 회피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는 자유인임을 부인했습니다. 에덴에서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남자는 여자에게 책임을 지웠습니다. 거기에는 책임을 갖고 사는 자유인이 없었습니다. 죄책감과 고백은 자유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성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죄의 고백은 도피가 아니며, 다시 한 번 더 참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종에게는 책임감도 없고 그것과 결부된 죄책감도 없습니다. 오직 자유 하는 주인에게 책임, 그것과 관련된 죄책감이 가능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신앙적으로 성숙되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지면서 자유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유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해 질수록 자기 시대에서 애통하는 자로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에서 예언자로서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에서 누구보다 흠없이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적 상황에서 자기 백성들로 인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흘릴 눈물이 없어 하나님께 자기의 머리가 눈물이 가득차 있는 샘물이 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 현실을 도피해서 자기만을 위해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더 큰 위로와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현실에서 우리의 책임을 다 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의가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빚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빚은 `어떤 것\\\\\\\'(something)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양적으로 많고 적음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 킬 바르(Karl Balth)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빚졌다. 우리는 그의 선하심에 의해 양육되고 떠받쳐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심각성과 그것의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에게 그 어떤 부분적인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핵심이 죄의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의 이 기원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 영원한 운명 안에서 깊은 요구로부터 나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현재·미래·영원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희망이 없습니다. 매우 암담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원은 우리 인간 실존에서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 양자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 간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용서는 우리들의 삶의 관계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사회적 반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기원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는 자를 용서한 것같이\\\\\\\"라는 조건문 형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 우리편에서 먼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교제는 채권자들끼리의 교제가 아니고 채무자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 비유에서 그것을 말씀합니다. 왕에게 엄청난 빚을 진 종이 그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 받은 종은 그의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는 행위로 탕감 받은 자의 반응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그것을 거절하므로 왕의 탕감 자체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새로운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새로운 삶이 우리의 삶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반대인 낡은 삶은 어떤 것입니까? 분열·미움·적대감·비방·닫혀짐입니다. 새로운 삶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방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없던 일로 한다든지, 잊어버린다든지, 원상태로 돌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손해가 있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상대방을 그 실수, 그 아픔, 그 원한에, 묶어놓지않고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한 감정, 우리의 아픔, 우리의 선입견에 상대방을 묶어 놓습니다. 우리 자신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담을 쌓습니다. 결국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용서한 그를 우리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이웃을 소외시키고 따돌립니다. 용서는 그 소외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용서는 악의 확산을 방지하고, 진정시킵니다. 구약 시대 모세는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에서 악의 확산을 막기 위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무서운 율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용서로 그것을 흡수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 곳곳에서 종족간에 용서와 화해가 없기 때문에 수백년 동안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문화적 유산으로 가득찬 도시들이 전부 초토화되어 가고, 죄없는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창조를 만들어 내지만 미움과 적대는 파멸뿐입니다. 용서는 어느 개인이나 어느 특정 종족이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새 생명의 흐름입니다.
주기도의 다섯 번째 기원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조건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분열증\\\\\\\'과 대항해서 싸워가는 우리의 결의이며, 다짐입니다. 죄의 탕감의 필요성과 요구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가시적인 행위는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용서를 거절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용서 받은 자인 그리스도인은 우리 이웃의 채무 탕감 요구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이웃이 나에게 많은 빚을 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나는 매우 곤고한 가운데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거절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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