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삼일절과 에스더의 부림절 에9:31
오늘 주일은 삼일절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삼일절을 조국을 구국하기 위한 애국심의 발로로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치하에서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을 규탄하고 탄압과 고문, 수탈을 자행하는 자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애국하는 마음에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조국을 생각하기 이전에 지구촌의 한 공동체 인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일절과 부림절은 애국 하는 마음과 인류의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의 삼일절과 에스더의 부림절”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부림절의 어원은 제비뽑기라는 히브리어 “부르”라는 말에서 유래됩니다. 즉 아각사람 하만이 “부르”를 통해 유대인을 멸살하는 날을 히브리어 달력으로 아달월 12월13일로 정했으나 그날의 유대인들이 하만의 일당들을 멸하게 되었던 사실을 기념하면서부터 부림절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역으로 마지막 달인 아달월 14, 15일에 기념된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이달은 서력으로는 2-3월에 해당됩니다. 부림절이 오늘의 3월에 해당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1919년의 3월은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릅니다. 이 달은 서력으로는 2,3월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절기의 역사를 보면 아각사람 하만(삼상15:8. 32)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수석장관이었고 유대인의 불구대천의 원수였습니다. 왕후 와스디가 폐위된 후 모르드개의 양녀인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후가 되었습니다. 하만은 왕국내의 모든 유대인을 멸절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는 미신적인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음모를 거행할 최적의 때를 정하고자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 결과 아달월 13일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좌절시킴으로써 왕에 대한 모르드개의 충성과 그의 민족을 위한 지혜와 에스더의 용기와 유대인들의 금식과 기도를 통하여 하만의 극악무도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스라엘은 구원되었습니다. 하만과 그의 아들 10명은 교수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왕의 새칙령은 유대인을 멸종시키기로 결정되었던 그날에, 유대인들에게 적들에 대한 그들 자신을 방어할 것을 허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음날 14일에 왕도 수산에서 그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구원으로 인하여 모르드개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아달월 14, 15일을 기념일로 지키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본서의 기록 목적은 부림절의 내력과 그 기원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백성이 이국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활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매장하기 위해 어떤 이방인들이 함정을 판다할지라도 오히려 그 함정에 이방인 스스로가 빠지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건져 주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믿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한 자에게는 가차 없이 보복한다는 믿음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자 모르드개를 해치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말살하려는 하만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임을 증명하고자 함입니다. 유대인의 끈질긴 보복성 신앙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사실과 신약 성경에 본서가 한번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달리 복수심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윤리적 공격을 받는다는 점에 주시하게 됩니다. 지난 2001년 9월 11일에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의 비행기 테러는 팔레스타인지역 분쟁의 불똥이 미국의 심장부로 인화되었음을 생생히 드러냈습니다. 아랍 테러리스트에 의해 세계 금융 거래에의 총본산이 강타당해 도괴된 광경을 미국 연방 정부의 수도 워싱턴에서 목격하면서 유대인과 아랍권의 문제는 팔레스타인지역 분쟁을 벗어나 인류 문명의 내일을 판가름하는 새로운 차원의 대결장으로 그 무대가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왜? 뉴욕의 맨하탄입니까? 오늘의 유대인은 어제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의 좁은 지역에 있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 본산의 심장부인 뉴욕의 증권가 곧 이 금융 자본 시장의 복판에 있습니다. 세계 금융 시장의 큰손들이 유대인에 의해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유대 민족의 심장부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 아니라 세계 금융 투자 회사의 총집결지인 뉴욕 맨하탄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있음을 정확히 내다본 것입니다. 그래서 뉴욕이 새로운 유대 민족과 아랍권의 대결장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결과 세계 자본주의 수출국인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아랍 권과 대결의 당사자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이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전 세계가 목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금융 시장에 핵심부가 어이 없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이런 대결과 갈등 그리고 비극을 온몸으로 수없이 겪고 되풀이 해온 민족입니다. 그런 타격 후에는 반드시 그 손실을 넘어서는 반사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게토(Ghetto)의 담장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전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사실상 실세이며 저 강대국인 미국의 정치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테러리스트에 굴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월드트레이드센터를 그 자리에 다시 세울 것이다”라고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폐허로 변해 버린 트레이드센터를 보고 선언했습니다. 바로 직후에 이 선언은 앞으로 되풀이될 아랍 권과의 기한 없는 지루한 대리전쟁을 치르겠다는 미국의 의지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이라고 부시 미국 대통령이 명명한 이 전쟁의 뒷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대결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란 이름으로 처음 불린 팔레스타인 땅에서 주변 민족들과 수천 년 전부터 생존을 건 싸움을 벌여온 유대인들이 이웃 민족들과 벌었던 갈등과 분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민족들은 시대에 따라 바벨론이 되기도 했고 페르시아나 희랍계가 되기도 했으며 기원 원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로마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이슬람 계를 신봉하는 범아랍권이 형성되었습니다. 대상도 달라졌지만 그 대결의 무대도 수천 년 분쟁의 이끼가 낀 예루살렘을 끼고 도는 이 팔레스타인에서 미국의 심장부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옮아간 것에 불과합니다. 새 시대를 사는 유대인의 주요 무대가 그것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무대는 달라졌지만 분쟁의 본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부시 대통령이 말하는“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의 저변에 깔린 뿌리는 유대인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명권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정신이 부활된 이슬람교의 범아랍 민족권 문명과의 대결 형식으로 바꾸어간 것입니다.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앞으로 세계사의 향방은 이 양대 세력의 움직임에 좌우될 것이 분명합니다. 분쟁의 몸통인 유대 민족의 세계사 등장은 기록으로 보아 기원전 2000년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인류 문명의 여명기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장자인 이스마엘은 아내인 사라의 이집트 출신 몸종 하갈이란 여인이 낳았고, 두 번째 아들인 이삭은 정실인 사라가 뒤에 낳았습니다. 자연히 아브람의 전통을 잇는 과정에서 대립이 일어납니다. 두 아들이 모두 아브라함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라가 낳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직자로 유산을 잇게 되고 곁가지로 처지게 된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쫓겨납니다. 흔히 이스라엘이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가 원수가 되어 인류 역사의 마지막까지 끝없는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대립의 와중에서 문명사회가 끝없이 휘말려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유대 민족과 아랍권과의 대립에 세계가 휘말려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움을 오늘의 세계는 겪고 있습니다. 삼일절과 부림절을 보면서 민족의 애국심과 예수님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에스더가 “바사”라는 페르시아 왕후로 있으면서 자기 민족인 유대 민족들을 구하는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행위는 민족애(民族愛)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민족애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자기들의 민족애를 선민의식과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민족애는 여러 신앙의 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정열을 가진 지도자였으며, 또한 여러 선지자들도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민족애는 그들이 단일 민족 국가였고 같은 신앙을 가진 공동체였기에 애국심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애국심은 신앙에 바탕을 둔 소속 집단에의 충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지구상에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각 나라들의 이해가 상충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이익만을 위하여 싸울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애국심에 대한 성경적인 고찰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관이 정립되어야 할 절실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를 통한 성경적인 애국심에 깊은 사려를 갖습니다. 먼저 기독교인들은 조국을 생각하기 이전에 인류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며 권위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롬13:1,7).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조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부정과 불의를 다른 나라에 자행하는 일에는 협력할 수 없으며 협력해서도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인류애는 아가페적인 것으로써 인간적인 동정이 아닌 신앙적 차원의 사랑입니다. 지구촌의 국가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불쌍한 자와 억울한 자들을 돌보며 힘으로 약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을 제어하고 부의 평등한 분배를 이루어 사회에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의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애국을 보았습니다. 3.1운동 때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조국의 운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설명이 됩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실제로 무력 항쟁에 나서기도 하고 학교를 세워 신앙의 인격을 가진 민족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제 치하의 한국 교인들이 무조건 침략국 일본을 규탄하고 저항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즉 일본은 당시 온건한 정복자가 아니라 침략자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하여 한반도에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강탈했으며 무자비한 탄압과 고문 수탈을 자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만주에 주둔하였던 일본군 731부대(일명 이사이 부대) 같은 곳에서는 생체 실험까지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의 눈으로 볼 때 이러한 만행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행들이었기에 당연히 그러한 악행을 저지하기 위하여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일반인들은 애국심으로 표현했으며 기독교인들도 당시의 당면 과제가 압제자인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기에 역시 조국을 위해 애국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 역사는 애국으로 표현된 역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국수주의(國粹主義)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애국을 생각하고 공동체의 사랑을 생각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소속된 국가의 존속과 번영, 정의 실현 등을 위한 시대의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에스더 9:5에 보면 부림절은 유대인들이 칼로 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자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복수를 의미합니다. 에스더서는 이와 같이 전체가 보복과 진멸의 사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교훈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은 악을 대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악은 하나님의 대적이 아니라 사람의 대적일 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그의 동산 안에 함께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악이 결코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체 대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함께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악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자기의 생명과 바꿈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악에 대한 증오나 악에 대한 보복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으로 악을 심판하신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악을 삼키신 분입니다. 사랑으로 악을 물리치신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악을 껴안은 분이었습니다. 삼일절과 부림절은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 지구촌의 사랑 공동체 실현을 위한 교훈이 될 것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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