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이 주는 교훈

삼일절이 주는 교훈/레19:13-14

삼일절이 주는 교훈
레19:13-14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놓고 얘기했습니다. \\\"6·25때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밥이 없어서 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 했단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습니다. \\\"밥이 없었으면 빵을 먹지 왜 굶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밥도 없는데 어떻게 빵이 있었겠느냐\\\". 그러자 아이는 또 \\\"그러면 라면 먹으면 되지 않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시절의 배고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이 3·1절 85돌입니다. 3·1절은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려져 가고, 우리의 관심 속에서도 지워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들은 ‘3·1절이 무슨 날이냐’고 아이들이 물으면 \\\"일제 때 우리 조상들이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부른 날이다\\\" 라고 대답 해 주는 게 전부입니다. 특별한 관심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3.1절은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또 잊어서는 안 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사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두 날이 있습니다. 하나는 3·1절이고 또 하나는 8·15 해방 기념일입니다. 이 두 날은 우리 신앙인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 깊이 개입하여 역사하신 날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련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두 날은 우리 기독교가 꼭 되새기고 교훈을 받고 넘어가야 할 날입니다.
3·1절이나, 8·15는 모두 자유와 평등과 관계가 있는 날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입니다.
약자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성경말씀의 정신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들을 기록한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여기 보면 \\\"부약사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약한 자를 도우라’는 정신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 사상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강자에게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약자에게는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삯을 떼먹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이 \\\"부약사상\\\"입니다. 이를테면 \\\"약자 보호사상\\\"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고 핍박하면 내가 심판하겠다\\\"는 경고 입니다.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아주 가혹하게 압제했고 지배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성과 이름 그리고 언어와 이 땅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약한 나라라고 얕잡아보고 통째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부약사상을 깡그리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 일본이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왕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고종황제를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개를 옆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에게 음식을 먹여서 별 이상이 없으면 그제야 안심하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위협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한일합병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명성황후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냥 밀어붙이면 뜻대로 될 줄 알았는데 똑똑한 여인 하나 때문에 길이 가로막혔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모의를 하고 군인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군화발로 밟고 칼로 찌르고 시해했습니다. 그리고는 시체를 녹지원으로 끌고 나와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기름을 붓고 불태웠다고 합니다.
일본이 이렇게 잔학하게 우리를 압제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무시했습니다. 인권이고 주권이고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 부약사상을 송두리째 무시해버린 그들을 하나님이 심판해서 그 나라가 원자탄 세례를 받고 잿더미로 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요즘 초, 중, 고등학교에서 약자를 구타하고, 왕따 시키는 일이 위험수위를 넘어선지 오래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자기가 봉직하는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뜨자 그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이를 개탄하며 자살한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문제를 하나님은 용서치 않으십니다.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습니다. 민족자본가 계급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실시된 회사령(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조상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흘러들어 자유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등으로 극악한 환경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처럼 식민통치 10년 동안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직접적· 구체적으로 입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더욱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 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 같은 압제를 받다가 견디지 못하고 들고 일어난 것이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기미독립운동), 3·1 운동입니다.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202만3,089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1만5,961명, 피검자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습니다. (일본측 발표).
[의의]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끝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상해의 임시정부 탄생하여 해외 무장독립운동이 촉진되었고,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배영운동인 제1차<사타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 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지금 그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3·1절이라는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 \\\"고난은 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을 거치면 사람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전도서 7:14절을 보면 \\\"너희는 곤고하거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은 사람은 생각이 성숙해집니다. 어른스러워집니다. 고난을 겪고나면 상상도 못했던 생각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고난이 지혜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립선언문을 보면 참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그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다듬어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그 글 속에 절절한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외침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세광이가 군에 입대한 후 보내온 편지에 보면 아이가 어른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집에 있을 때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 음식의 소중 함,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구구절절이 철든 편지를 썼습니다. 철없던 아이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조금 맛보더니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삶에서 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우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을 말합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베드포드셔의 두메 마을에서 땜장이 아들로 태어나,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평신도 설교가 및 저작가로 활동하다가 목사 임직을 받았다. 그러나, 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차례 감금을 당했습니다. 「천로역정」은 옥중에서 집필한 것이다.
이 작품들도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이 암흑과 같은 인생의 고통스런 터널(tunnel)을 지나가면서 쓴 책들입니다. 한 사람은 감옥의 고난을 겪으면서, 또 한 사람은 노년에 시력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의 산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흑인영가를 들어보면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인들에게 탁월한 음악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아픔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면서 그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고백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곤혹을 치렀습니까?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아픔을 당하면서 겪은 것의 발로입니다. 유순했던 민족성으로 보아 우리 선조들이 어지간하면 봉기를 일으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무 압제를 당하니까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고난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3·1 운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3·1 운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날입니다. 평등, 자유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최남선의 글을 보면 \\\"평등, 자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는 그 말을 기독교에서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최남선이 살아가던 그 시대는 평등, 자유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그 개념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그 말과 개념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입니다. 평등이 없고 자유가 없는 것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세계입니다. 짐승의 세계에는 힘만 있을 뿐 자유가 없습니다. 죄인들의 세계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평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탈합니다. 짐승, 노예, 죄인은 이렇게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자유를 뺏고 억압하면 그 억압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독재자는 그 권세가 하나같이 길지 못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의 말로를 보면 하나 같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먹은 자를 조롱하지 말라. 소경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모두 부약사상, 즉 약한 자를 억압하거나 어려움을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거나 억압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당장은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일군의 품삯을 떼어먹으면 당장은 돈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먼 인생길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몇 배로 심판하십니다.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면 하나님이 대신 그 억울함을 갚으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상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짓밟았습니다. 우리 민족을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밟으면 아무 소리 못하고 밟힐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용렬하고 무지해도 밟으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들풀도 밟으면 죽지 않고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정신이고 생명력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쉽게 꺾이고 죽겠습니까? 그래서 억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억압당하는 자에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 억압자는 심판하고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억압당하고 살던 우리 선조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모두 흥분하니까 삽을 들고, 곡괭이를 들고, 작대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이 깜짝 놀랐습니다. 참 무서운 민족입니다. 우습게 여겼는데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주 무섭게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3·1운동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 3·1운동을 알아줍니다.
그래서 지난 역사를 조용히 되돌아 보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생각해 보면 3·1운동은 우리 선조들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3.1절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약자가 압제 당하면 대신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19:40에 \\\"이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아니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소리 질러야 할 사람을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소리 지른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압제하고 억압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소리 질러 돕게 만드십니다. 내가 소리 지르지 못할 상황이면 누군가가 대신 소리를 질러 준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소리 질렀습니까. 그러면 일본은 쫓아다니며 소리 지르지 못하게 감시하고 욱박질렀습니다. 그래서 세상 누구도 우리의 아픔을 몰랐습니다. 모두 소리 지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낙심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던 스코필드(Schofield Frank W. 영국 의사, 선교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민족의 참상들을 사진에 담아 외국통신에 전해주었습니다.
(한국 이름 석호필.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세균학 교수로 내한한 후, 3 ·1 운동이 일어나자(1919) 교직을 포기하고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면서 일제의 포악상을 외국에 알렸다. 1920년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할 때도 총독에게 청하여 옥고를 겪고 있는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 독립지사를 일일이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귀국 후에는 캐나다(Canada)에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195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0주년 경축식전에 초빙되었으며, 1969년 한국에 영주하여 여생을 마쳤다.
우리에게 언로가 막히고 길이 막히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들어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또 우리들이 소리 지를 기운도 없을 때 대신 소리질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 12. 28 미국 버지니아 스톤턴~1924. 2. 3 워싱턴 D. C) 대통령입니다. 그는 세계 만국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서 소리를 질러 준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세계 여러 나라가 비로소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용기를 얻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약자들이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재벌들이 꿈쩍도 안 합니다. 권력자들이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신 소리 질러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민 단체들입니다. 약자들이 권력자나 재벌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호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까 시민 단체들이 나서서 벌떼같이 소리를 질러줍니다. 그들이 들고일어나니까 재벌들도 권세를 가진 정치가들도 무시 못 하고 들어주지 않습니까.

3·1운동은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시민운동 입니다. 몇 사람 안 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는데도 세계에 메아리쳐 되돌아온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3·1절, 8·15 만 되면 괜히 흥분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 날들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잠시는 이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당장은 수지맞는 것 같지만 멀리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니다. 더구나 약자, 가난한 자의 돈 을 떼먹으면 그 심판은 더 커집니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면 그것도 심판 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그 아픔과 참상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약자가 보호되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시고 약한 자들에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먹은 자를 무시하지 말라,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은 이렇게 약한 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86년 전에 일어났던 3·1운동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오늘 초, 중, 고등학교에서 약자를 왕따 시키는 일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리하여 며칠 전에도 고등학교 교장 한 사람이 자살을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약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남을 왕따 시키는 것은 죄악이요, 심판을 부르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고 삼가 조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