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들의 모습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마20:1-16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
마20:1-16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이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을 가지 못하고 주일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과, 고향에 다니러 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항상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 한 해가 하나님 안에서 더욱 성숙하고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저는 기독교에 아주 적대감을 가진 일간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민망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신문 가운데도 우리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적대감을 가진 신문이 있습니다. 글을 그런 방향으로 계속 쓰고 기사를 내 보내는 일간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굉장히 수긍을 했습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비난을 할 수 있는 그런 기사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는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라고 넘길 수 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말입니다.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넘길 수 없는 그런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닌 기독교 큰 행사를 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그 행태가 너무 위선적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행진을 할 때 예수님께 지신 그런 십자가를 지고 행진을 하면 괜찮은데 합판으로 십자가 형태를 만들고 속은 텅 비운 상태에서 페인트를 바르고 그리고 바퀴도 달고 한 십자가를 지고 행진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 힘들이지 않고 십자가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서로 지고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졌다고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행진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카톨릭 교회 전통 속에서 생겨 났습니다. 카톨릭 교회 역사 속에서 유행했습니다. 중세를 거쳐서 근세에 이르러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 이런 유행이 아주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십자가 행진은 카톨릭 교회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나 개신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다같이 행하고 있지만 특히 카톨릭을 믿는 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필리핀이나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는 마을 단위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행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손에 못도 박히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 들어와서 변질되면서 십자가를 지는 어깨 부분에 스폰지도 달고, 합판으로 속을 텅비게 만들어 가볍게 하고 밑에는 바퀴를 달아 십자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메고 예수님께서 걸어 가신 고난의 길을 한 번 걸어가고 싶다면 진짜 그만큼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불신자들의 눈으로 보면 위선에 가득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실제 십자가는 60-70kg이나 되고 발목에는 30kg의 쇠사슬을 채웠습니다. 브라질 필리핀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는 그 마을에서 특별히 뽑힌 청년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 행진을 무사히 마친 청년은 그 마을에서 인기를 얻어서 결혼할 처녀들이 줄을 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2040년까지 십자가를 질 사람이 이미 예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십자가 행진 행사를 하면서 유명한 목사님들이 서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고 사진에 나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런 쇼는 이제 그만 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본질이 빈약하다 보면, 즉 속이 빌수록 외적으로 자꾸만 자꾸만 나아가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은 관계일수록 겉으로 경건한척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 죽으러 가시는 길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가셨지만 이번에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 길을 이제 가시는 것입니다. 그 예언을 하고 계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죽이기로 결안하고. 19절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20장에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세 번째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6장과 17장에서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귀에는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한지 첫 번째 해에 예루살렘에 두 번 올라 가셨습니다. 유월절 때 부림절 때입니다. 두 번째 해에도 두 번 올라 가셨습니다. 유월절과 부림절 때입니다. 제 3년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올라 가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영원한 희생의 제사를 드려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누구처럼 관광하러 예루살렘에 간 것도 아닙니다. 정말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3번이나 아주 심각하게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고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심각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 담아 두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 속에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3년 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기심에 의하여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적인 철이 아직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옛 말에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같이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도 꿈을 따로 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제자들,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고 있는 생각과 제자들이 하고 있는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나는 죽는다,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나는 죽어야만 한다고 했지만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우리 선생님께서 이제 왕이 되신다라고 착각했습니다. 우리의 앞날은 확 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욕심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2. 착각하는 사람들
이런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고 있을 때, 2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세베대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청탁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살로메입니다.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 하나는 총리에 하나는 부총리에 앉혀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마태복음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함께 청탁을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사청탁이라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기까지는 어떤 자리를 두고 인사청탁을 계속될 것입니다. 약간의 연줄만 있어도 이리걸고 저리걸고 해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이 살로메는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의 자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는 이모가 됩니다. 주님, 당신의 이종사촌 동생인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우의정에 하나는 좌의정에, 하나는 총리에 하나는 부총리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청탁을 안방에서 하는 것이 보통인데 말입니다. 아주 공개적인 청탁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는 그 앞에서 청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속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의 관계, 이런 관계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똑 같이 3년을 따라 다녔는데 우리는 도대체 뭐냐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긴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심정이나 아버지의 심정이나 똑같다고 하지만 자식 사랑에 있어서는 남자들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어머니들은 극성입니다. 창피스러운 것도 모릅니다. 남들 눈치도 안보고 우리 자식만 잘된다고 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마바람을 가져오는 근본원인이 됩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훨씬 앞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19장을 보시겠습니다.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19장 2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제자들이나 이 살로메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바로 이런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고 12제자도 열 두 보좌에 앉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살로메의 마음은 급했습니다. 내가 부탁도 드리기 전에 순서가 어떻게 뒤바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아들을 위하여 청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그냥 직설적으로 부탁을 합니다. 아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그 다음에 나머지 열은 어떻게 되든지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22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구할 때도 많지 않습니까? 살로메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앞에 잘 못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 말은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내가 죽게 되는데 너희도 죽을 수 있느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대답하기를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야고보와 요한과 살로메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 대권을 잡으시고 이제 축제가 벌어지고 너희도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 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가장 먼저 순교당했습니다. 피를 말로 흘리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묻자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서 그래서 마신 것입니다.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기를 바랐겠습니까? 여러분, 책임지지 못할 말은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르면서 알겠다하고 뒤에는 책임지지 않고 꽁무니 빼고 달아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영적인 무식쟁이들이 하는 이런 행태를 이 사람들은 보였다는 것입니다.

3. 분노하며 질투하는 사람들
이 세 사람만 그렇게 했습니까? 그 다음 24절을 보시겠습니다.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에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마태가 이때 다른 사도들을 잘 관찰했던 것 같습니다. 24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쯤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면 영적으로 수준이 좀 올라갔을 법도 한데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 같이 똑 같습니다. 열 제자가 아니고 넷이나 다섯 제자가라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했으면 괜찮은데 나머지 전부가 다 분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열 명도 똑같은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잘 믿는 것 같지만 취하는 행동을 보면 유치한 행동을 하는 목회자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집사였을까? 어떻게 저 사람이 장로였을까? 어떻게 저 사람이 권사였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열 제자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분노하고 질투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투와 시기와 분냄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할 수 있는, 질이 낮은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도, 이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도, 모든 사람도 시기와 질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자만 질투하는 줄 아십니까? 진짜 질투는 남자들이 더 심합니다. 순간적으로 또 즉흥적인 질투를 여자들이 해서 질투하면 여자가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남자들의 질투가 훨씬 굉장합니다. 실제 치사하고 더럽게 질투하는 사람은 남자들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입니다. 남자들의 치사하고 더러운 질투가 역사를 얼마나 비극으로 몰고 갔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오스카 와일드가 쓴 질투라는 글의 예화 가운데 아주 재밌는 예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많이 각색 되어서 독일에 있는 어느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원조는 오스카 와일드입니다. 리비아 사막에서 한 수도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리비아 한 사막에서 자기는 성자가 되기 위하여 수도하는 한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너무 너무 경건하고 너무 너무 유명하고 너무 너무 신앙의 수준이 높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졸개들이 이 수도승에게 가서 시험에 빠뜨리기 위하여 수 만 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온갖 유혹을 다했습니다.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성의 쾌락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마귀의 졸개들은 자기들의 대장인 마귀에게로 가서 탄원했습니다. 총수님, 우리가 이 수도사를 아무리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총 우두머리 마귀가 몸소 나섰습니다. 씽긋이 웃으면서 자, 나 따라와 봐라고 하면서 앞서 갔습니다.

이 마귀가 수도승에게 가서 귀속 말로 뭐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수도사가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수도하던 것을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성자가 뭐고 다 팽개치고 옛날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졸개들이 대장에게 물었습니다. 대장님, 우리는 아무리 해도 안됐는데 대장님은 무슨 말을 하셨길래 이렇게 한 마디로 끝냈습니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라고 마귀가 대답했습니다. \\\"자네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에서 방금 대 주교가 되었다네.\\\"라는 한마디였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카톨릭 역사에서 수도원장은 주교와 같은 계급입니다. 수도원장이었던 자기보다 자기 동생이 주교보다 높은 대 주교가 되었다는 말에 그만 모든 것을 팽개칠 만큼 시기와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이 예화는 어떻게 각색되었느냐하면 수도사 동기생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수도원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도를 깨쳤다는 말을 듣고 한 수도승이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로 각색되었습니다.

인간의 시기와 질투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자리에서 이탈되게 한다는 애기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투심, 시기심, 이것은 때때로 매우 어리석은 비신앙적인 행동과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합니다. 때때로 교회 안에서 교회를 소란하게 만들고 또 자기 자신은 그로 인하여 넘어지고 자빠지고 합니다.

여러분, 희랍 신화에 아주 재밌는 헤라클레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라클레스에게 아주 큰 괴물이 자기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아주 대단한 장사답게 그 괴물을 두들겨 패서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고 있는데 아니 이게 웬 일입니까? 이 괴물이 더 커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두들겨 패서 쓰러뜨리고 갑니다. 그런데 이 괴물이 몇 배가 더 커져서 자기에게 나타났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크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자 헤라클레스는 아테네 여신을 찾아가서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느냐 하니까 아테네 여신의 대답입니다. 이 괴물은 시기와 질투라고 이름하는 괴물인데 이 괴물은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지만 이 괴물이 아무리 무섭고 얼굴이 험상궂다 해도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면 그 괴물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말에 쩰로스(ζηλο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쩰로스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기 질투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열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 단어 jealous(질투하는)와 zeolous(열심있는)가 그것입니다. 질투라는 뿌리는 천사적인 사랑과 열심 으로 발전되기도 하지만 악마적인 미움과 파괴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욕심과 이기심에 노예가 되면 쩰로스는 질투가 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신실한 자세로 섬기고 봉사할 땐 이 쩰로스는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야고보와 요한과 그 어미의 말을 듣고 그 마음 속에 숨겨 놓았던 그 시기심과 질투심이 그대로 노출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들의 모습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제자의 진정한 모습으로 3년을 따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26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서로 군림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세기의 프랑스의 유명한 비평가요 문학가요 철학가였던 테느(Hippolyte Taine)는 그의 작품 중 <그렌조르제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작품 속에서 \\\'세상에는 4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자가 있고, 두 번째는 기회주의 자가 있고, 세 번째는 방관자가 있고, 네 번째는 바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넷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같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바보같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남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지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땅에 오심과 이 땅에서의 죽으심은 예수님의 섬김의 생활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로 행하는 여러분의 작은 섬김도 작은 봉사도 작은 헌신도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할 때 그 한 직분, 한 직분이 다 귀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자꾸 비교하면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향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섬기고 봉사할 때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남 앞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봉사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봉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봉사가 사람들의 인정은 받지 못하지만 주님께는 인정받는다는 것을 알고 이런 분들일수록 더욱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인 대학교수가 이런 하소연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교회가기가 너무 너무 싫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만 가면 궂은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집이 가난하고 자기 아버지가 교회에 안다니고 또 어머니가 성가대를 할 만큼 악보를 볼 수도 없고 주일학교를 가르칠 만한 능력도 없고 밥하는 일에 충실하다 보니까 궂은 일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했으면 자기가 자랑스러워서 교회 생활을 잘 했을텐데 자기는 부끄러워서 교회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자기가 철이 들고 나니까 그 헌신과 봉사가 형제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서 귀하게 쓰임받도록 축복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알고 그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