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1) 피뿌림

성전(1)/피 뿌림/벧전1:1-2

성전Ⅰ : 피 뿌림/벧전1:1-2
2003-02-24 10:17:48 read : 101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신다. 예전에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했다. 그렇게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특정한 곳에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서 인간과 교제를 하셨다(창 2:15-3:8). 그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인하여 그런 교제가 끊어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곳으로부터 쫓아내시고 에덴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 3:24). 인간은 더 이상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확고한 회복의 의지를 가지시고(창 3:15), 먼저 인간에게 찾아오셨다.

언젠가 나의 아이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자꾸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미 거짓말임을 알고 있는데, 아이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아이로 하여금 한밤중에 집을 나가도록 했다(이런 행동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밤에 아이를 혼자 밖에 나가게 한 후, 나는 혹시 아이가 너무나 놀라거나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여 몰래 따라나가서 뒤를 지키며 확인하던 적이 있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누구도 자기 자녀를 이기지 못한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늘 뒤에서 돌본다.
이처럼 인간의 잘못으로 교제가 끊겼지만, 하나님은 다시 그런 인간을 만나기 위하여 뒤따라오셨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께서는 족장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주셨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에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셨다. 그러면 성막은 무엇 때문에 만들게 하셨는가?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셨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였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도 이동 가능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성막(聖幕)을 만들도록 명하셨다. 하나님의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늘 함께 했다. 성막을 중앙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진을 쳤으며, 성막이 옮겨지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옮겼고, 성막이 설치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긴 여정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성막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성막과 같은 의미의 건물인 성전(聖殿)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전 역시 성막과 같은 의미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면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기는 하였지만 함부로 하나님과 접촉할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성소에는 일년에 오직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대제사장마저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통하여 비로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레 16:13). 이렇게 하나님은 거룩하신(구별되신) 분이시기에 죄인인 인간은 누구도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셨다. 이렇듯 성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한 방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제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제한적인 교제를 완전하게 이룰 방법이 필요했다. 그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빌 2:6)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막(성전)의 기능이 예수님으로 대치되었다.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성전의 본체(本體)가 되신다. 성전이 그림자라면 예수님은 실체(實體)이시다. 요한복음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건물로써의 성전은 필요 없고, 또 필요로 해서도 안 된다. 더 이상 지을 수도 없고, 지어져서도 안 된다. 만일 누군가 건물로써의 성전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유대인들이나 제자들 모두 성전의 현상만을 보았지 그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에서 비록 성막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통로로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누구나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극히 제한적이어서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년에 오직 한 차례씩만 들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대제사장은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만 했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한다(레 17:14; 신 12:23).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피 뿌림이 없이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제의 방법을 인간을 위하여 정해 주셨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방법으로만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잃어버린 에덴이 회복될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교제는 완전한 것이 못 되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오직 일년에 한번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제한적인 것을 폐지하시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시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이 찢어졌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히 9장). 예수님의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엡 2:14)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런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제는 우리가 지성소 안에 살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이런 예수님의 피의 속죄 사역의 일회성과 영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한국일보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적 진리의 동일성\'에 대하여 조사를 했는데, 불교인은 \'종교적 진리의 동일성\'에 87.9%, 무종교인의 구원에 80.7%가 찬성했고, 로마 카톨릭은 각각 86.2, 72.4%가 찬성했다. 반면 개신교는 62.8%와 33.6%에 머물렀다. 이렇듯 아직도 많은 교인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사역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구원을 말하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아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깨끗한 정치\'를 말로 하는 것과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다르듯이, 하나님의 구원은 말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저 \'은혜\'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어릴 때의 일이다. 한번은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뒷동산에 불을 낸 적이 있었다. 막 타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함께 놀던 우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고 말았다. 조금 후에 \"불이야!\"라는 소리와 함께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불길이 잡히고 완전히 꺼졌다. 나는 두려워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혼날 게 뻔한 이이었다.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해라.\" 그러면 나는 못이기는 척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라. 이제 들어와서 그만 자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기에 언제나 용서해 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냥 잘못만 인정하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미리 용서하시고 쉬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분은 말씀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죽을 죄인임을 고백케 하신다. 그러면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신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하늘나라 안에서 쉬게 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갚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자식하고 싸워서 이길 부모가 어디 있으며, 또 자식을 이겨서 뭐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이란 미리 아시고 택하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란 사실을 안다.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엇을 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나? 나는 평생 가도 갚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효자임에 틀림없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 그런 자세를 갖는 자는 성숙한 자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은 늘 죄인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부모에게 못한 게 뭐가 있어. 이 정도면 되지!\" 그들은 항상 자신의 업적을 내세울 수 밖에 없다.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산물이지, 결코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생명을 주심)에 의하여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 때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