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보혈 히10:19-25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우리의 삶 속에 반듯이 있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 평안. 만족. 보람. 감격과 같은 것들이며 또한 그와 같은 것들에서 오는 삶의 여유와 그 삶의 여유에서 오는 너그러움과 온유함 그리고 사랑과 겸손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들의 삶은 그와 같?것보다는 불안과 초조. 채워도채워도 채워지지 아니하는 공허함과 불만스러움. 삶의 무의미에서 오는 권태와 그 권태에서 오는 짜증스러움으로 가득 차기가 쉽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채워져 있는 것은 전자에 속한 것들이십니까 아니면 후자에 속한 것들이십니까?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평안이 있으십니까? 사는 것이 기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생활과 삶에 대하여 여러분은 만족하십니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십니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삶의 여유가 여러분에게는 있으십니까? 그 삶의 여유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너그러움이 여러분에게는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기쁨과 평안 그리고 만족과 삶의 보람을 상실한 채 쪼들리고 피곤하며 짜증스러운 삶, 무겁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 것은 아니십니까? 만일 여러분의 삶이 그러하시다면, 꼭 그렇게까지 힘든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전자에 말한바와 같은 그런 복된 삶은 아니시라면 여러분 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그 이유가 가난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세상 적인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만나도 행복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혹 세상의 것들을 제대로 다 만나지 못했다고 하여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세상으로 풍요롭지 못하고 또 형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은 복된 삶을 누리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남보다 부유하기 때문도 아니고 남보다 높은 지위를 얻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저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사는 단 하나의 이유는 저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거듭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가 초막이든 궁궐이 든 높은 산에 거하든 거친들에 거하든 관계없이 언제나 저들의 삶의 자리 가 천국이라고 간증하고 노래합니다(찬495).
그리고 저들이 그와 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단 하나의 이유는 그의 마음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그 고백과 간증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들에게 담대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전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을 만난다 하실지라도 기쁨과 만족 그리고 행복이 없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교회생활을 하시는데도 마음과 삶 속에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만 다녔지 아직도 하나님을 자신의 온전한 하나님으로 만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이기는 하지만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교회생 활을 포함하지만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을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사모해야만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동거하는 삶을 꿈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우리는 만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요 근본적인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 만남에 우리의 삶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오늘 이 성경은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기초를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에덴이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패러다이스에 최초의 인간을 두셨습니다. 그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와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에덴이라는 낙원과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동행하는 것과를 별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 아니면 그곳은 진정한 낙원이 아닙니다. 우리 피조물에게 가장 큰 행복, 가장 근본적인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아직 죄가 없기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이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했습니다. 죄가 아담 속에 들어옴으로 동시에 사망이 그에게 이르렀다고 했습니다.(롬5:12) 이 사망의 본질은 생명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입니다. 마치 나뭇가지가 그 줄기로부터 꺾여지고 떨어져 나가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줄기에 붙어서 물과 양분 즉 생명을 빨아들여서 아름다운 꽃을 맺히던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죄를 범하자 아담은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거할 수 없고, 그와 교통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나가자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고통이 오고 육신의 질병과 늙음과 죽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그의 자녀, 자손들에게는 이것이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야말로 생로병사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야된다.’ 이것이 모든 철학, 문학, 역사와 삶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아가서 죽음 후에 인간은 그의 죄 값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우리는 낙원에서 쫓겨나 그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본능 속에는 잃어버리고 쫓겨난 낙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고향은 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하신 도성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고 영원한 안식이 있는 곳 그곳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낙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바 궁극적인 구원은 바로 여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가진 인간이 에덴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쫓겨난 것처럼, 범죄한 인간은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처소에 갈 수도 없고, 그 분을 뵙고 그 분과 함께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 큰 영광 중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백성들이 절대로 산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엄히 당부했습니다. 만일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려고 할 때는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그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죄 없는 거룩한 자가 가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남보다 조금 더 착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죄 없는 거룩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죄와 불의는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우리의 삶에서 쫓아내고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욕심을 따라 함부로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삶에 가득차 있는 온갖 죄악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휘장이요 담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야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문제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해 결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또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앞에 나아가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들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내용, 하나님의 경륜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범죄 하여 더러워져서 거룩한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을 다시 정결케 해서 그의 영광의 처소로 불러들이시는 구원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죄를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오실 그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서 영혼의 안식을 얻고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임시적인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사라는 제도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그리고 율법의 중심입니다. 아울러 이 제사는 먼 미래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서 하실 그 일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와서 드릴 진정한 제사를 나타내는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제사는 한마디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 제도, 방법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바로 인간의 죄를, 제물이 되는 소나 양에게 전가(Transfer)시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이 되는 짐승을 잡기 전에 그 머리에 안수합니다. 이 의식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전가시키고 그 짐승은 인간의 죄를 짊어짐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 피로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나 양이 죽어 그 피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순간, 인간의 죄가 용서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가장 중심이고 율법의 중심입니다. 이 제사의 의미를 안 사람은 구약의 중심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적인 제사에 불과 합니다. 이 임시 제사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온전히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1-4)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는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사실 인간이 지은 죄의 값으로 자신이 피를 흘려야하는데, 그 인간 대신 소나 양을 잡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 천 마리의 황소와 염소를 죽인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한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만한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그의 빚은 갚아지지 않았고, 그는 완전히 빚진 자 즉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임시적이고 무능한 제사가 아니라, 참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는 온전한 제사입니다.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말씀(Logos)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는 그리이스말인데, 바로 그가 기름부음을 받는 대제사장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12) 그 제물은 무엇입니까?
가치 없는 소나 양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해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 제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죄가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되어서 온 몸의 피를 흘리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다”고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이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12,13) 그가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는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온전히 사해졌습니까?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황소나 염소의 피와는 달리 그의 몸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니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가 바로 온 우주를 만드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집을 만든 주인과 그 집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온 인류의 죄 값을 치르기에 넉넉하고 충분합니다. 그는 자신의 보혈로 단번에 나의 죄 값을 지불하고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단번에 회복했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 이 거룩함은 구약의 제사와 같이 임시적이어서 매년 다시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지 않고, 단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 값을 다 지불하여 영원한 거룩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4)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강력히 증거하십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17)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고 죄의식을 가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와 불법에 대한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착한 자도 아니었고, 의로운 자도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허물과 실수를 반복하고 있으나,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의 거룩하신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자입니다.(19) 그곳은 착한 자가 아니라, 죄 없는 거룩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는 자는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그 기업 즉 유산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우리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이 영원한 처소로 영접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만일 오늘 이 히브리서가 주는 말씀을 깨닫고 아멘하고 그 말씀을 가슴에 담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분명 구원의 인침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당신 속에 17절의 말씀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특별한 교제의 장소, 만남의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처음 장소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두 번 째는 광야 가운데 있었던 장막, 성막 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를 지나오면서 세 번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특별한 만남과 교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천국에서 그 분은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실 것입니다. 에덴동산, 장막, 성전, 예수 그리스도, 천국, 하나님의 소망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시대 우리와 함께 만나시고 교제하시길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소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소는 곧 하늘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소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계시하는 모형입니다. 성소를 알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셔서 만들게 하신 세 가지 건축물이 있습니다. 노아 방주와 모세로 하여금 만들게 하신 성막과 솔로몬으로 하여금 짓게 하신 성전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신 것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상징성이 강하며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막은 바로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거룩한 성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겼던 성막과 그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지성소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성막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습니다.
성막은 크게 3부분으로 지어졌습니다. 성소 뜰, 성소, 그리고 성소안의 작은 방인 지성소입니다. 이 세 가지는 상징하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먼저 보기원하는 것은 바로 성소의 바깥의 뜰입니다. 이 뜰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예비하는 곳입니다. 그곳 뜰에서는 예배의 거룩함이나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막의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성소와 관련하여 세 종류의 신앙 인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이 뜰에 머물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그저 성전 뜰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막 뜰에 머무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신앙은 감격이 없으며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성막 뜰에 머무는 신앙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접촉해 보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한 단계 올라가야 합니다. 성소로 나아가야 하고 그리고 마침내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를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맛보아야 합니다.
성소까지 나아가는 믿음이 있습니다. 성소 안에는 떡상과 금 촛대와 향단이 있습니다. 떡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이 놓여 있는 상입니다. 하나님께 전 이스라엘을 바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은혜와 인도해 주신 사랑에 대해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감사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촛대는 성소 안을 밝히는 빛입니다. 정금으로 만들어져 7개의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사장은 날이 어두워갈 때 불을 켰다가 해가 뜨는 아침에 불을 껐습니다. 이는 아무리 어두움의 권세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빛은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향단은 향기로운 향이 계속 타오르는 곳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향취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입니다. 성소 신앙은 헌신과 감사의 신앙입니다. 빛과 소금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의 신앙입니다.
지성소는 신앙이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모셔져 있습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바로 예수 님이 계신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성막의 심장입니다. 성막 안의 모든 것은 지성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들어가서 전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 제사장의 제사를 받으시고 전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으며 20절에서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누구든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은 기적입니다. 또 사흘간을 사방의 권세에 계시다가 부활하신 것도 분명한 기적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기적이라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을 기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신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처럼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기적이 아닐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예사롭지 않은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 많이 일어나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져 두 쪽이 된 것입니다. 성전에는 다른 휘장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었던 이 휘장만 찢어진 것일까요? 그리고 왜 하필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휘장이 찢어진 것일까요? 이것은 분명 예수 님과 성전의 휘장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두 가지를 지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거룩하심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주었고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죄를 품고 있는 사람이 생명을 잃지 않도록 사람의 죄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한 장소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지성소 휘장의 이런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역할과 일치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리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으로 들어가 그 영광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은혜의 옷을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았던 휘장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천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상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던 지성소 휘장은 하나님의 손으로 찢으셨습니다. 마 27:50-51절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휘장이 찢어졌을 때 중요한 것은 ”찢어지는 방향”입니다. 성경은 ”위로부터 아래까지”라고 휘장이 찢어진 방향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기록해도 될 것을 굳이 그 찢어진 방향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찢어진 방향이 누가 찢었는지를 가늠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찢으면 아래로부터 찢어야지 위로부터 찌어질 수가 없습니다. 즉,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찢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로만 되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지성소 휘장을 사람이 찢을 수 없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휘장의 두께”입니다. 지성소 휘장을 가정에서 사용하는 한 두겹의 커튼이나 극장에서 무대를 가리는 막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300명의 제사장들이 정성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그런 휘장의 두께가 무려 15센티나 될 정도로 두터웠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손바닥 길이 만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72번이나 주름을 잡았습니다. 재료만 천일 뿐이지 벽돌만큼이나 튼튼했고 이름만 휘장일 뿐 벽만큼이나 두텁고 튼튼한 가로막이 지성소의 휘장인 것입니다. 랍비들은 ” 이 휘장이 너무도 튼튼하게 꿰매지고 직조되어서 두 마리의 황소가 양쪽에서 휘장을 잡아당긴다고 해도 절대로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휘장이 찢어진 것은 기적입니다. 인간의 손으로는 절대로 찢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찢어진 휘장은 다시 수선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휘장이 찢어진 것을 알고는 제사장들이 급히 달려들어 꿰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튼튼하게 꿰매 놓아도 휘장은 이내 다시 찢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휘장은 그분의 몸이었고, 죽어야만 찢어지는 휘장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과감히 자신의 몸을 찢으신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몸이 죽음으로 갈라지자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피 묻은 손을 잡고 하나님의 거룩한 궁전에 들어가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마음껏 먹고 마시고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지성소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고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이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성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님을 만나고, 용서함을 받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1.악한 죄를 깨닫고 더러운 양심으로부터 벗어납니다(22). 2.믿는 도리의 소망을 붙잡습니다(23). 한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완전히 밀폐를 시켜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 놓았더니 그 쥐가 3시간 안에 죽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소망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독에 쥐를 넣고 뚜껑을 닫을 때에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주었더니 이 쥐는 72시간이나 살아 있습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빛으로 인해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차이가 난 것입니다.
3.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22-23) 그의 보혈은 우리의 영혼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몸을 씻어주셨고, 우리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었던 우리 양심이 살아나니 우리는 죄를 보게 되고, 죄를 가슴 아파하고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를 한탄하고 돌아서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의 도리를 더 굳게 세우고 착한 양심으로 바르게 살도록 해야합니다. 4.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고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24-25) 2002 동계 올림픽에서 억울하게 금메달을 빼앗긴 한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쇼트 드렉 1000미터 경기에서 우리 나라의 김동성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는데도 미국 오노 선수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인하여 김동성 선수는 실격이 되고 억울하게 금메달을 빼앗긴 사건입니다.
1등의 기쁨으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트랙을 돌고 있는데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실격이 선언되자 김동성 선수는 허탈과 실의에 빠져 태극기를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온 국민이 보낸 아낌없는 성원과 격려는 쳐져있었던 한 청년의 어깨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인터넷에는 그를 격려하기 위한 글이 쇄도했고, 한 신문에는 공개적으로 그를 격려하기 위한 글이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반칙으로 따낸 금메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영웅입니다. 마음으로 당신에게 우리 민족의 마음이라는 메달을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그가 각 단체와 기업에서 받은 격려금과 위로금만 해도 수억원에 달하였고 국내에서 전달받은 금메달만 해도 8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한국사상 실격하고도 가장 위대한 국민적 영웅의 찬사를 받은 사람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는 국민들의 격려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정말정말 행복한 8관왕입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의 성원과 격려에 보답하기 위하여 은퇴를 뒤로 미루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으로 보답하겠다고 결의를 다졌고.... 결국 그는 진정한 승리자답게 모든 경기에서 우승을 휩쓰는 전관왕으로 보답했습니다.
경기도는 현재 의정부에 건립중인 쇼트트랙 전용 경기장의 이름을 ’김동성 빙상장’으로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격려의 위대한 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격려는 칭찬과는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칭찬이란, 잘했을 때... 성공을 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라면.... 격려는 오히려 실패해서 넘어졌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칭찬이 상대방에게 보상감을 심어주는 것이라면, 격려는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말이나 행동입니다. 칭찬이 ’행위나 일의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면, 격려는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칭찬은 언제나 ”더 잘해야지” 하는 강박관념을 심어줄 수 있지만, 격려란 있는 그대로 자신이 인정되어지고 있다는 신뢰와 믿음이 자리잡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현대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요인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격려하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는 날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에 급급하여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칫 영혼의 눈이 어두워지고, 이 소망의 기쁨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주 모여야 합니다. 성도들의 모임을 나의 시간표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으십시오. 그 속에서 우리들은 서로 깨어 있도록 격려하고 권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면 영국 여왕도 일어나 경의를 표하는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바로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 중 42번인 ’할렐루야’가 그 곡입니다. 헨델은 근세기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서 그가 만든 곡마다 사람들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그의 곡이 발표되는 공연장마다 깡패들을 동원하여 공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반신 불구가 되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던 어느 날... 그에게 이름 모를 한 시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와 버림받은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능의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계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이 한 통의 격려 편지가 헨델의 몸과 마음에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다시 힘을 얻은 헨델은 2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묵상에 몰두했습니다.
24일째 되는 날, 하인이 그의 방에 들어갔다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헨델을 보았습니다. 헨델은 잠시 후에 악보를 들고 ”내 앞에 하늘이 열렸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날 헨델은 영원불멸의 명작 ’메시야’를 작곡하였던 것입니다. 한 무명의 시인이 보낸 격려의 편지가 절망과 좌절로 죽어 가던 헨델을 일으켜 세워 영원불멸의 명작 메시아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격려는 헬라어로 ’파라 칼레오’란 단어를 씁니다. 이 뜻은 ’안위하다, 위로해 주다, 돕다, 용기를 불러일으키다’ 란 뜻이 있습니다. 남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도와 주는 것... 이것이 곧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십시오. 그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 온전케 해서 착한 자가 아니라, 온전히 거룩한 자만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 믿음의 도리에 굳게 서서 착한 양심으로 죄와 싸우면서 살아가고, 온 성도들이 모이기에 힘써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면서 소망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