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은 곧 피다 레17:10-14 교회는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고 사람의 생명 존귀성을 신뢰하고 그러한 선교적 차원에서 사회에 확신시켜 나가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 생명의 존귀성을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배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흔들리는 사회는 혼돈과 붕괴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 모든 보존할 가치가 우선하는 사회는 비록 일시적으로는 심각한 병리적 현상에 시달려도 시간이 흐르면 그것을 극복하고 생동감 넘치는 공동체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선교2세기를 맞이한 오늘의 교회가 물질적인 풍요 이전에 인간성이 존중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자면 인명 경시적인 제도와 현실을 파헤치는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고문을 자행하고 옹호하는 공권력을 질타하고 인명을 구조적으로 파괴하는 열악한 근로조건과 사업장 환경의 개선을 위해 눈을 떠야 한다. 인명경시의 풍조는 우리 사회의 오염된 환경위기 만큼이나 수위가 높다. 레위기 저자가 밝히는 피에 대한 금령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우선 존재론적이다. 피를 생명의 보금자리로 규정함으로서 또한 생명자체로 단언함으로서 피란 인간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음식 따위가 아님을 선언하려 한다. 피는 존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피를 먹지 않는다는 다짐은 생명을 경외한다는 신념의 실천조항이라 말할 수 있다. 구약 본문이 밝히는 \"생명은 그 피에 있다\", \"피는 그 생명에 있다\", \"생명은 곧 그 피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피를 마시는 것은 생명을 경멸하는 것이다\". 피와 생명을 하나로 봄으로써 그리고 피를 먹거나 마시거나 헛되이 소모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서 레위기의 저자는 생명의 존엄성을 분명하게 말한다 . 또한 레위기 17장의 금령이 특이한 것은 피를 먹는 대신 그 피를 야훼 하나님의 제단 안에 뿌리거나 땅에 덮으라고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한다. 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레위기 저자가 이 피를 생명으로 간주함으로써 또는 \"생명의 자리\"로 선포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동물을 도살 할 때마다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생명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이다. 모든 생명은 야훼 하나님의 것이다. 곧 모든 피는 야훼 하나님의 것이다. 레위기의 명령은 생명은 창조주의 것이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명경외\"의 신앙으로 보호받아야 마땅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숨쉬듯 동물도 숨쉬기에 모든 생명 현상은 정당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신약의 본문은 이를 뒷받침한다. 창세기 2:18~19에 \"아담이 각 숨쉬는 생명을 일컫는 대로 그의 이름이 되었다\"는 이 말씀은 사람만 \"숨쉬는 생명\"이 아니라 동물들도 사람과 똑같은 숨쉬는 생명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본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동반자로 지어졌다. 남자와 여자 사이만 서로 동반자가 아니다. 사람과 식물, 사람과 짐승도 삶의 동반자이다. 하나님은 이 동반자들로 더불어 살게 하셨다. 사람과 생물이 함께 어우러져 생명의 공간을 창조함으로 대지는 에덴 동산이 된다. 창조의 첫 순간 이루어지는 \"숨쉬는 것들\"의 보금자리를 히브리어로 \'에덴\'(기쁨, 희열이라는 뜻)이라고 부르는데서 대지도 생명을 얻게 된다. 열매를 맺고 주기적으로 쉬어야 하며 사거나 팔 수도 없다. 생명은 상품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이 대지를 소유하신다. 프로테스탄트 권내에서 \'자연신학(Theology of Nature)\'을 포기해 온 전통은 서구의 개발과 발전이라는 사상을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삼위일체 중심의 \'계시신학\', \'말씀의 신학\'을 그 나름대로 취하는 정당성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 일에는 제약성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신학은 인간만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전체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로운 \'창조, 자연, 환경, 생태신학\'을 발전으로 가야 할 당위 앞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21세기의 과학-기술 문명과도 대화하며 방향제시할 역할을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환경위기는 자연과 및 발전사상의 보급이 가져 온 결과라는 점을 착안하여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는 생명문화의 창달에 기여해야 한다. 물적 성장과 발전만을 우위에 세우고 생명과 환경을 경시해 온 문화의 방향을 바꾸는데 기여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인명경시풍조는 폭력, 마약, 성범죄, 유괴범, 시도 때도 없는 부녀자 납치, 인신매매 등 흉악 범죄의 소굴에서 산 듯하다. 사회범죄의 만연현상은 범죄발생의 증가와 범죄 수단의 횡포화, 집단화, 대형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그 예방과 범인검거의 저조현상은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인명경시 풍조의 또 하나의 예는 교통사고 사망률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제일의 교통사고 왕국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사형제도의 존치와 빈번히 일어나는 사형집행에서 알 수 있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273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다. 생명을 경시하고 파괴하는 사형제도를 두고 계속적 반복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면서도 생명법익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는 혼란이요, 자기 모순일 뿐이다. 결국 사형집행을 통해 인명 중시의 풍조가 정착되거나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명경시 풍조만 만연시킬 따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고질화된 가장 심각한 인명경시 현상인데도 보통사람들은 그것이 죄가 되는지조차 모르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저지른 악행이 있다. 그것이 낙태이다 . 합법적인 인공유산의 제도가 마련된 나라에서는 합법적인 낙태라는 이름아래 매년 놀랄만한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 1970년에 경제정책과 더불어 입안된 모자보건법이 낙태의 합법적인 출구를 열어주고 공권력이 낙태에 관해 동기 유발을 조장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연 85만 건의 공식적인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 태아를 신체의 일부만도 못한 물건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오늘날 만연된 성개방과 자유화된 성풍속 및 가정과 전통윤리의 붕괴로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미국의 그것과 능가할 정도로 높아졌다. 모자보건법의 제정으로 성풍속과 성개방적인 생활태도 및 가정의 붕괴가 더욱 심화되어 낙태의 양산을 가능하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존재 중 가장 약한 자가 태아이다. 이 차제에 부득이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것이라면 3개월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낙태시술의사를 제외한 의사, 법률가, 사회사업가, 성직자 등으로 구성되는 심의 기구의 심의를 거친 뒤 허용하도록 하는 기구제도를 제의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해 있고, 성윤리가 극도로 타락해 있어 온갖 폭력과 범죄 살인이 발생하는 가운데인간의 가치를 경시하는 비도덕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풍토 속에서 태아의 생명을 중절시키는 것이 무감각해지고 있고, 낙태가 상업화되고 있고 임산부들은 \'도덕 분열증\'에 걸려있다. 이것은 가치와 실제적인 행동사이의 모순에서 생기는 현상으로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의 여성이 실제로는 낙태를 행하는 데서 오는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낙태는 형법상의 죄로 법률상 규정(헌법 제27장)이 되어 있지만 모든 경우의 낙태가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1973년에 통과된 모자보건법 제8조에 따르면 인공임신 중절의 한계는 이렇게 씌어 있다 . \'1. 본인 또는 배우자에게 위생학적 또는 유전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이다. 2. 본인 또는 배우자에게 특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이다. 3. 강간 또는 준 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이다. 4. 법률상 혼인 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이다. 5. 임신의 지속이 보건 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이다.\' 이런 모든 경우에 임신 28주 이내에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중절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실태조사에 의하면 다른 이유로 낙태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 예로서 주로 혼전임신, 남아선호, 자녀제한, 생활의 어려움, 터울조절 등이 있다 . 여기서 분명하게 기억하고 넘어갈 것은 태아 성감별로 인하여 여아 낙태가 성행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유발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 시대착오적인 남아선호사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성차별을 이사회에서 추방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부딪치는 문제는 임신 초기부터 태아가 인간이라는 전통적 주장을 묵인해 둔 체 임신중절이 살인이라고 규명하기 전에 태아가 인간임을 주장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다니엘 칼라한\'(Daniel Callahan = Law, Choice and Morality)은 세 가지 학설로 구별한다. 첫째, 유전학파는 인간의 유전 인자가 형성되는 순간을 인간으로 규정한다. 수정되는 바로 그 순간에 유전자형이 결정되며 성장하는 태아는 임신시초에 이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발달학파는 인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에 최소한 발달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견해는 태아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주변환경과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비로소 충분히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발달학파에서는 인간이 형성되는 기간이 일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로 임신 후 6~8주경 신체의 기관이 기초적으로 형성될 때 또는 태아가 생존력을 가질 수 있을 때 또는 태아의 두뇌가 어느 정도 발달했을 때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 사회 결과 학파는 생물학적 근거보다도 사회, 도덕적 정책에 관한 사회의 요구의 관점에서 태아가 인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따라서 이런 결정은 사회 도덕 정책이 요구하는 기준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어떤 종류의 태아를 인간으로 정의한 경우 많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러한 태아를 인간으로 규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규명하고 싶은 것은 발달학파의 견해가 인간의 생명의 시초를 규명하는데 적합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유전학의 견해에 따라 수정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인간이라면 약 58%의 수정된 난자가 수태 전에 그리고 12%가 수태 후에 자연 유산이 되는 것에 설득력이 없게 된다. 또한 자의가 아닌 타의나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 하나님이 그런 생명을 모체 안에서 창조한다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발달학파의 견해는 유전학파와 같이 생물학적 증거와 자료를 신중히 받아들이면서 사회 결과 학파의 도덕적 정책의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한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만도 아니고 사회가 인간이라고 결정한다고 해서 인간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경시하는 무분별한 낙태와 여성을 비인간화시키는 상황에서도 태아의 생명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낙태를 절대 반대하는 두 모순의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한 규정의 모호성과 가치의 심각한 갈등을 솔직히 인정하고 생명을 관계성의 맥락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발달학파를 수용하는 가운데 태아의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모체의 인격과 선택의 권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신앙의 결단이 요구된다. 태아를 인격화하고 인간화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관계적 접근에서 태아를 이해해야 한다. 태아는 홀로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관계 더 나아가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인격성이 인정된다. 태아와 모체의 관계를 떠나서 태아 생명의 도덕적 가치관을 강조하여 태아의 인간성을 증명하려는 입장은 태아를 의학 연구의 대상인 환자로 임신모는 이 환자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취급하게 되어 실제적으로 태아와 임신모 둘을 다 비인간화시키게 된다. 모성의 의식은 육체적인 본능이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이어야 한다. 계획 없이 무책임하게 임신해서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태어나서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태아가 생명의 권리가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권리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태아의 생물학적 과정 뿐 아니라 사랑의 계약적 관계로써 생명체를 인격체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관리하는 대리자로서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귀하다 그리고 신성하다. 이 생명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각 사람의 고유한 몫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거룩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참사랑과 참 하나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될 수 없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시금 인간이 존귀하게 대접받는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자면 모든 법질서와 윤리질서 및 사회질서가 인간의 생명을 불가침, 불가양도적인 권리와 승인하고 이를 신성시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살상이 난무하고 죄가 되는 줄도 모른 체 대량의 살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살육의 도성에서 교회는 저 무감각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와 용서를 비는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의 황폐된 병든 심령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님의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사랑하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확산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한 극악한 범죄인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이라는 사실만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의식을 헤치고 바로 심어 주어야 한다. 생명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뿐이시며 그래서 생명은 신성하고 존귀하다는 의식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지은 희곡에 \"베니스의 상인\"(Merchant of Venice) 전5막으로 된 희곡이 있다. 베니스의 청년 바사니오는 아름답고 총명한 포오샤를 얻지마는 바사니오 때문에 돈을 차용한 친구 안토니오는 유대인 샤일로크에게 법정에서 그 대상으로 1파운드의 살을 베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나 포오샤의 현명한 판단의 재치로 구원된다. 인육재판의 장면으로 특히 유명하다. 피를 내는 일은 인간의 몫이 아님을 메시지로 남기는 훌륭한 희곡이다. 셰익스피어가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풍조를 일컬어 생명을 상품화하는 인간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더욱 깨닫게 한다. 생명은 곧 피다. 피는 그 생명에 있다. 그러므로 피는 물보다 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