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언약의 피 막14:1-26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4).\\\" 1-11절까지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희생과 헌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2-26절까지는 예수님의 피 흘림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희생과 헌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언약의 피가 무엇이며, 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피는 화목의 피요, 죄 용서함의 피요, 생명의 피요, 능력의 피입니다. 이 시간에 새 언약의 피를 영접하여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향유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1-1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한 날로, 유대의 명절 중 가장 큰 명절입니다. 무교절은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애굽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날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궤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되 백성들의 폭동을 염려하여 유월절은 피하고자 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드는 인도 지방이나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라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추출되는 매우 비싼 향유입니다. 사람들은 이 향유를 옥합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오면 손님의 머리에 한 두 방울 떨어뜨렸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시신에 이 향유를 발라 악취가 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향유 한 옥합은 300데나리온으로, 약 3000만원이나 되는 거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옥합을 깨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향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향유는 예수님의 머리에서부터 흘러서 발까지 적셨습니다. 발 냄새로 가득하던 방안이 갑자기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옥합은 여인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이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당시 옥합은 여인들의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과외 아르바이트, 자판기 아르바이트, baby-sitter 등을 하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인도에서 직수입한 향유를 한 방울 두 방울 사서 옥합에 담았습니다. 이 여인이 모은 향유 속에는 여인의 꿈과 사랑과 진심과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향유 속에는 이 여인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귀한 옥합을 감격적으로, 아낌 없이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녀는 조금도 계산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향유에 대한 미련을 조금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옥합을 깨지 않고 반정도만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다시 고이 간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옥합을 깨어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예수님께 다 쏟아 부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며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까지 하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7:39절을 보면 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내면에는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가장 귀한 옥합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분을 내며 말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킹제임스 성경에는 투덜거렸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한 자가 가룟 유다라 했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위를 보고 향유를 허비했다, 쓸 데 없는 일에 사용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향유 방울들이 돈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사람들의 생각이 옳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이 예수님의 몸에 붓는 것보다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사랑과 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물질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끔찍히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관심은 돈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요12:6).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헌신한 여인을 비난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의 이 말은 진심을 다 드린 여인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비난으로부터 여인을 보호하여 주시고 좋은 일을 했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여인의 정열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머리에 살짝 바르면 향기가 은은히 풍겨 좋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었으니 온몸이 끈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중에 향유를 머리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향유가 드시던 밥그릇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여인을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의 진심은 다 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혜가 없고 time sense가 없냐? 절제를 배우지 못했냐?\\\"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좋은 일로 평가하셨습니다. \\\'좋은 일(beautiful thing)\\\' 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 또는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영원히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행동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리면 쓸 데 없는 데 허비한다고 생각하여 \\\'정신이 나갔다, 미쳤다\\\' 고 비난하며 점잖게 말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적당히 향유 몇 방울 떨어뜨리듯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은 거야!\\\' 그러나 신앙 생활이란 전폭적으로 드리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드리는 모든 진심을 아름다운 일로 받아 주십니다. 학생 목자님들이 힘써 양들을 fishing하고 1:1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받아 주십니다. 또 사모님들이 아이를 맡기고 1:1전투를 감당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받아 주십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주님은 그 진심을 보시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십니다. 그러면 여인이 한 일이 어떤 점에서 아름다운 일이 됩니까? 첫째로 예수님께 진심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단순히 옥합만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귀하게 여기고 기뻐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드린다고 하여도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드릴 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도 다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시간, 젊음, 물질, 이상, 장래 계획, 결혼의 꿈들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다른 것은 다 드려도 전공만은 못드리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장래 꿈을, 결혼에 대한 꿈을 못드리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힘을 다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여인은 향유 몇 방울 예수님의 머리에 떨어뜨리고 예수님을 섬겼다고 광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향유를 깨어 드리기까지 힘을 다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요, 몸을 던져 섬기는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진이 빠지고 기절하기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김미사 목자님은 무슨 일을 하여도 마음을 다합니다. 정현정 목자는 진심을 드립니다. 요즈음 이수경 목자도 진심을 다 쏟아 섬깁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 분들의 삶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역사를 섬기며, 힘을 다하여 1:1하고, 힘을 다하여 제자 양성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인이 힘을 다하여 향유를 부은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여인은 다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헌신의 행위를 하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여인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때를 잘 붙들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제를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늘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가난한 자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 1회적인 사건입니다. 기회를 잃어 버리면 다시 섬길 수 없습니다. 여인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3:1절을 보면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9:4절을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회를 잘 붙들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열심히 인생을 즐기다가 나이를 먹은 후 주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생의 낮인 청년의 때 힘써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인생의 밤은 눈깜짝할 새 찾아옵니다. 이제 풍성한 결실을 맺는 가을 학기가 되었습니다. 가을 학기 우리는 힘을 다하여 1:1을 감당코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가을만 기회냐,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는데 하며 안일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희생적으로 주님을 섬겨야할 때입니다. 이 때를 놓치면 주님을 섬길 기회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옥합을 깨어 1:1 500팀을 이루고, 500명의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어 인하대가 목자의 캠퍼스요, 한국이 목자의 나라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예수님은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될 것과 이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하여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이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의 예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전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은히 풍겨 나는 이 여인의 헌신의 향기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인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시에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경배와 찬양과 헌신과 진심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요, 만왕의 왕이요, 우리를 대속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의 표현이요, 신앙 고백과 결단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둘째, 최후의 만찬(12-26). 12절을 보십시오. 드디어 무교절의 첫 날 유월절 양 잡는 날이 왔습니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아 유월절 식사를 했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가 어디인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 집에 들어가 유월절을 예비하도록 했습니다. 이 곳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소를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마치 첩보원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장소에 대한 보안을 유지한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12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괴로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놓고도 조금도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슬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시고 제자들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만찬을 갖자고 하셨습니다(16).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월절의 완성이요, 유월절의 완성은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유월절은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최고의 축제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때가 저물매 열 둘을 데리시고 유월절 만찬이 베풀어질 다락방에 가셨습니다. 드디어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쓴 나물과 어린 양이 준비됩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만찬을 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잠시 소리 없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얼마 후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먼저 물었습니다. \\\'예수님 접니까?\\\'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물었습니다. \\\'내니이까(Surely not I?)?\\\' 그들의 말은 \\\'나는 아니지요, 저기 제?\\\' 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큰 소리 잘 치던 베드로도 이 때만은 \\\'나는 아닙니다\\\' 확신 있게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볼 때 제자들 가운데 모두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3년 반 동안 사랑으로 섬긴 제자들이 잠시 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갈 것도 다 아셨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유다가 배신자다\\\" 하시며 제자의 자격을 박탈하고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유다의 배반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대로 죽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돌아가시는 의미를 제자들에게 심으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고린도전서 11:24절은 말씀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살이 찢기시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신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5절을 보면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은 우리에게 힘과 생명을 공급하여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영접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의 의미를 생각할 때 힘이 생기고, 마음의 참된 평화와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언약의 피라 하셨고(마26:28), 누가복음에서는 새 언약의 피라 하셨습니다(눅22:20).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언약이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맺은 변개할 수 없는 약속, 계약을 말합니다. 그런데 언약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옛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언약으로 행위에 기초한 언약입니다(출24:1-81, 9:5,6).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따라 파기될 수 있는 조건부 언약입니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 주신 언약과 같습니다. 이 언약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지만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파기되었습니다. 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거역하여 파기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을 보면 새 언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새 언약은 모세에게 세운 언약과 달리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고 하셨습니다. 또 옛 언약은 항상 죄를 기억하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 인간 조건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새 언약의 피,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사야서 1:18절은 새 언약에서 이루어질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리고 히브리서 9:15절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언약에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합니까? 이는 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죄는 지독하여 생명, 곧 피를 요구합니다. 피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피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줍니다. 피가 부족한 사람은 빈혈로 쓰러지게 되고, 피가 깨끗하지 못하면 동맥경화증으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피가 통하지 않으면 세포가 썩게 됩니다. 피는 병균과 싸워 이기는 방패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 피는 골수에서 만드는 것으로 인공적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습니다. 이처럼 피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죄는 바로 이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일시적으로 정결케 할 뿐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예수님의 피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 할지라도 이 예수님의 피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롬3:25).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셔서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입은 마음을 다 치료하여 주시며 소생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공급하여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피요, 생명의 피요, 은총의 피요, 능력의 피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내 심장에서 박동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있을 때 세상의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의 은혜가 사라질 때 spirit을 잃고 비실거리게 됩니다. 피의 은혜가 희미해질 때 죄의 유혹에 넘어져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을 영접할 때,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생명을 드리기까지 헌신적으로 주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세계 선교보고 대회에서 아프리카 선교사님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의 모습을 들었습니다. 아프리카는 환경이 열악합니다. AIDS의 발생지요, 에이즈의 천국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예근성과 거지 근성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아프리카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우리 선교사님들로 하여금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 무엇이 이런 아프리카 양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헌신케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아프리카 대학생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도 내면에 피의 은혜가 충만할 때 주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을 학기에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의 내면에 충만하여 전폭적으로 자신을 드려 1:1 500팀 전투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절까지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희생과 헌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2-26절까지는 예수님의 피 흘림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희생과 헌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언약의 피가 무엇이며, 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피는 화목의 피요, 죄 용서함의 피요, 생명의 피요, 능력의 피입니다. 이 시간에 새 언약의 피를 영접하여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향유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1-1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한 날로, 유대의 명절 중 가장 큰 명절입니다. 무교절은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애굽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날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궤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되 백성들의 폭동을 염려하여 유월절은 피하고자 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드는 인도 지방이나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라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추출되는 매우 비싼 향유입니다. 사람들은 이 향유를 옥합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오면 손님의 머리에 한 두 방울 떨어뜨렸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시신에 이 향유를 발라 악취가 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향유 한 옥합은 300데나리온으로, 약 3000만원이나 되는 거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옥합을 깨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향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향유는 예수님의 머리에서부터 흘러서 발까지 적셨습니다. 발 냄새로 가득하던 방안이 갑자기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옥합은 여인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이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당시 옥합은 여인들의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과외 아르바이트, 자판기 아르바이트, baby-sitter 등을 하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인도에서 직수입한 향유를 한 방울 두 방울 사서 옥합에 담았습니다. 이 여인이 모은 향유 속에는 여인의 꿈과 사랑과 진심과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향유 속에는 이 여인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귀한 옥합을 감격적으로, 아낌 없이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녀는 조금도 계산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향유에 대한 미련을 조금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옥합을 깨지 않고 반정도만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다시 고이 간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옥합을 깨어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예수님께 다 쏟아 부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며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까지 하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7:39절을 보면 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내면에는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가장 귀한 옥합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분을 내며 말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킹제임스 성경에는 투덜거렸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한 자가 가룟 유다라 했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위를 보고 향유를 허비했다, 쓸 데 없는 일에 사용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향유 방울들이 돈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사람들의 생각이 옳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이 예수님의 몸에 붓는 것보다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사랑과 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물질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끔찍히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관심은 돈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요12:6).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헌신한 여인을 비난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의 이 말은 진심을 다 드린 여인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비난으로부터 여인을 보호하여 주시고 좋은 일을 했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여인의 정열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머리에 살짝 바르면 향기가 은은히 풍겨 좋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었으니 온몸이 끈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중에 향유를 머리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향유가 드시던 밥그릇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여인을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의 진심은 다 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혜가 없고 time sense가 없냐? 절제를 배우지 못했냐?\\\"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좋은 일로 평가하셨습니다. \\\'좋은 일(beautiful thing)\\\' 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 또는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영원히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행동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리면 쓸 데 없는 데 허비한다고 생각하여 \\\'정신이 나갔다, 미쳤다\\\' 고 비난하며 점잖게 말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적당히 향유 몇 방울 떨어뜨리듯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은 거야!\\\' 그러나 신앙 생활이란 전폭적으로 드리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드리는 모든 진심을 아름다운 일로 받아 주십니다. 학생 목자님들이 힘써 양들을 fishing하고 1:1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받아 주십니다. 또 사모님들이 아이를 맡기고 1:1전투를 감당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받아 주십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주님은 그 진심을 보시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십니다. 그러면 여인이 한 일이 어떤 점에서 아름다운 일이 됩니까? 첫째로 예수님께 진심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단순히 옥합만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귀하게 여기고 기뻐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드린다고 하여도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드릴 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도 다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시간, 젊음, 물질, 이상, 장래 계획, 결혼의 꿈들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다른 것은 다 드려도 전공만은 못드리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장래 꿈을, 결혼에 대한 꿈을 못드리겠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힘을 다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여인은 향유 몇 방울 예수님의 머리에 떨어뜨리고 예수님을 섬겼다고 광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향유를 깨어 드리기까지 힘을 다해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요, 몸을 던져 섬기는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진이 빠지고 기절하기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김미사 목자님은 무슨 일을 하여도 마음을 다합니다. 정현정 목자는 진심을 드립니다. 요즈음 이수경 목자도 진심을 다 쏟아 섬깁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 분들의 삶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역사를 섬기며, 힘을 다하여 1:1하고, 힘을 다하여 제자 양성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인이 힘을 다하여 향유를 부은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여인은 다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헌신의 행위를 하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여인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때를 잘 붙들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제를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늘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가난한 자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 1회적인 사건입니다. 기회를 잃어 버리면 다시 섬길 수 없습니다. 여인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3:1절을 보면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9:4절을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회를 잘 붙들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열심히 인생을 즐기다가 나이를 먹은 후 주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생의 낮인 청년의 때 힘써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인생의 밤은 눈깜짝할 새 찾아옵니다. 이제 풍성한 결실을 맺는 가을 학기가 되었습니다. 가을 학기 우리는 힘을 다하여 1:1을 감당코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가을만 기회냐,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는데 하며 안일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희생적으로 주님을 섬겨야할 때입니다. 이 때를 놓치면 주님을 섬길 기회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옥합을 깨어 1:1 500팀을 이루고, 500명의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어 인하대가 목자의 캠퍼스요, 한국이 목자의 나라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예수님은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될 것과 이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하여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이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의 예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전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은히 풍겨 나는 이 여인의 헌신의 향기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인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시에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경배와 찬양과 헌신과 진심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요, 만왕의 왕이요, 우리를 대속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의 표현이요, 신앙 고백과 결단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둘째, 최후의 만찬(12-26). 12절을 보십시오. 드디어 무교절의 첫 날 유월절 양 잡는 날이 왔습니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아 유월절 식사를 했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가 어디인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 집에 들어가 유월절을 예비하도록 했습니다. 이 곳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소를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마치 첩보원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장소에 대한 보안을 유지한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아니하고 12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괴로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놓고도 조금도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슬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시고 제자들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만찬을 갖자고 하셨습니다(16).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월절의 완성이요, 유월절의 완성은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유월절은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최고의 축제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때가 저물매 열 둘을 데리시고 유월절 만찬이 베풀어질 다락방에 가셨습니다. 드디어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쓴 나물과 어린 양이 준비됩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만찬을 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잠시 소리 없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얼마 후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먼저 물었습니다. \\\'예수님 접니까?\\\'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물었습니다. \\\'내니이까(Surely not I?)?\\\' 그들의 말은 \\\'나는 아니지요, 저기 제?\\\' 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큰 소리 잘 치던 베드로도 이 때만은 \\\'나는 아닙니다\\\' 확신 있게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볼 때 제자들 가운데 모두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라.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3년 반 동안 사랑으로 섬긴 제자들이 잠시 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갈 것도 다 아셨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유다가 배신자다\\\" 하시며 제자의 자격을 박탈하고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유다의 배반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대로 죽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돌아가시는 의미를 제자들에게 심으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고린도전서 11:24절은 말씀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살이 찢기시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신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5절을 보면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양식은 우리에게 힘과 생명을 공급하여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영접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의 의미를 생각할 때 힘이 생기고, 마음의 참된 평화와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언약의 피라 하셨고(마26:28), 누가복음에서는 새 언약의 피라 하셨습니다(눅22:20).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언약이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맺은 변개할 수 없는 약속, 계약을 말합니다. 그런데 언약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옛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언약으로 행위에 기초한 언약입니다(출24:1-81, 9:5,6).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따라 파기될 수 있는 조건부 언약입니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 주신 언약과 같습니다. 이 언약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지만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파기되었습니다. 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거역하여 파기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을 보면 새 언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새 언약은 모세에게 세운 언약과 달리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고 하셨습니다. 또 옛 언약은 항상 죄를 기억하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 인간 조건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새 언약의 피,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사야서 1:18절은 새 언약에서 이루어질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리고 히브리서 9:15절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언약에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합니까? 이는 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죄는 지독하여 생명, 곧 피를 요구합니다. 피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피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줍니다. 피가 부족한 사람은 빈혈로 쓰러지게 되고, 피가 깨끗하지 못하면 동맥경화증으로 죽게 됩니다. 그리고 피가 통하지 않으면 세포가 썩게 됩니다. 피는 병균과 싸워 이기는 방패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 피는 골수에서 만드는 것으로 인공적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습니다. 이처럼 피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죄는 바로 이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일시적으로 정결케 할 뿐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예수님의 피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 할지라도 이 예수님의 피를 마음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롬3:25).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셔서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입은 마음을 다 치료하여 주시며 소생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공급하여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피요, 생명의 피요, 은총의 피요, 능력의 피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내 심장에서 박동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있을 때 세상의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의 은혜가 사라질 때 spirit을 잃고 비실거리게 됩니다. 피의 은혜가 희미해질 때 죄의 유혹에 넘어져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을 영접할 때,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생명을 드리기까지 헌신적으로 주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세계 선교보고 대회에서 아프리카 선교사님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의 모습을 들었습니다. 아프리카는 환경이 열악합니다. AIDS의 발생지요, 에이즈의 천국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예근성과 거지 근성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아프리카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우리 선교사님들로 하여금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 무엇이 이런 아프리카 양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헌신케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아프리카 대학생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도 내면에 피의 은혜가 충만할 때 주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을 학기에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의 내면에 충만하여 전폭적으로 자신을 드려 1:1 500팀 전투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