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살과 피 막14:22-26 유교는 깊이 들어가면 완고해지고, 불교는 깊이 들어가면 허무해지고, 기독교는 깊이 들어가면 기뻐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잔치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밥이 되어 그 식탁에 우리를 초청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월 첫째 주일에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자주 하다 보니까, 성찬의 중요성과 참의미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오늘은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성만찬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찬 예식은 세례 의식과 함께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2대 성례식 입니다. 그 중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성찬 예식의 기원이 나타납니다. 즉 이 예식은 유월절 만찬 도중 십자가 죽음을 몇 시간 앞에 둔 시점에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며 이를 영원토록 가슴 깊이 기억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만찬 도중, 성찬 예식이 제정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인 구원의 기원이 되었다면 성찬 예식은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는 상징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유월절의 희생 양은 십자가를 지시고 유월절 어린 양으로 대속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성찬 예식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사랑을 피부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의 의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1세기 전후의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무릇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일평생 반복해서 지켜야 할 유일한 단 하나의 예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찬 예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 저녁에 이루어진 제자들과 주님의 최후의 만찬은 주님에게 있어서 매우 엄숙하고 비장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막 14:18)고 자신이 제자의 손에 팔릴 것을 예언하신 예수님은, 배반자 가룟 유다와 그리고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허풍을 떠는 연약한 베드로, 아무 영문도 몰라서 어리둥절하며 근심하는 그밖의 다른 제자들을 바라볼 때,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진리를 배웠지만 깨달음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만 놔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또 그런 믿음 없는 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놀라운 명령을 내리신 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목자 잃은 양들처럼 여기 저기 흩어져 도망쳐 버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떡은 분명 그 자체로 \\\"떡\\\"이지만, 주님께서 그 떡에 손을 대고 취하는 순간 그것은 떡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변했습니다. 떡을 먹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먹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 안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생명의 떡\\\"이요, \\\"영생의 떡\\\"이며, \\\"능력의 떡\\\"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 앞에 육신으로서의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몸을 그들이 먹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늘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보이시며, 능력을 주셔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함께 받아 먹음으로, 예수 안에서 한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종의 도\\\"를 실천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교회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성만찬에서 역시 생명과 영생의 떡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십니다. 그 떡이 예수님의 몸이고, 포도주는 주님의 언약의 피라는 사실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임재 하십니다. 우리가 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따라 우리 역시 죽음 이후의 부활에 미리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몸을 취함으로 우리에게 역시 의무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체들이 됨으로써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지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유월절 잔치의 절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의식은 가장이 집전하는 데, 그는 먼저 \\\'거룩케 하다, 성별하다\\\'의 뜻을 가진 \\\'키두쉬\\\'의 잔을 들고 기도한 후 다같이 마십니다. 2) 잔치를 주관하는 이만 손을 세 번 씻습니다. 3) 파슬레(양식에 곁들이는 파란 풀)나 쓴 생치를 소금물에 찍어 먹습니다. 파슬레는 애굽에서 문지방에 피를 바르던 우슬초를 대신합니다. 쓴 상치는 노예생활의 쓴 경험을, 그리고 소금물은 애굽에서 흘린 눈물과 홍해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4) 가장은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우리에게 필요한 떡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라고 축사하고 상 가운데 놓인 떡 한 조각을 뜯으며,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초 당한 떡이니 주린 자는 와서 먹으라\\\"하고, 그 조각을 먹습니다. 5) 가장은 다음으로 출애굽의 이야기를 하므로, 유월절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기억하는 날임을 언급합니다. 6) 시 113편과 114편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으로 \\\'할렐\\\'이라고 부르는데, 유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미 다 외우고 있습니다. 7) \\\'해석 선언\\\'이란 뜻의 두 번째 잔인 \\\'학가다\\\' 잔을 마십니다. 8) 손을 다 씻어 먹을 준비를 합니다. 9) 식사 기도후, 무교병을 조금씩 떼어 돌립니다. 10) 쓴 나물은 무교병 사이에 넣어서 \\\'카로셋\\\'(과일 반죽)에 찍어 먹습니다. 이것을 \\\'솝\\\'이라고 하는 데 애굽에서 벽돌 굽던 것을 기념함입니다. 11) 애굽 땅에 죽음의 재앙이 왔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건너 가심\\\'을 회상하게 유월절 양고기는 다 먹게 됩니다. 만약 남으면 없애 버리고, 다음날에는 먹지 못합니다. 12) 손을 씻고 남은 무교병은 다 먹게 됩니다. 13) 감사 기도와 함께 메시야의 선구자 엘리야 보내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때 세 번째 잔인 \\\'감사의 잔\\\'을 마십니다. 14) 할렐 제2부인 시 115-118편을 부릅니다. 15) 네 번째 잔을 마시고 \\\'큰 할렐\\\'인 시 136편을 부릅니다. 16) 기도를 드린 후 유월절 잔치는 끝이 납니다. 이렇게 지루하게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하는 모습을 살펴본 것은,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절차에 따라서 유월절 잔치를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떡을 떼실 때 보통 침묵하는 유월절 잔치와는 다르게 \\\"보라, 이 떡을 부숨같이 내 몸도 너희를 위해 죽인다. 이 붉은 포도주와 같이 너희를 위해 내가 피를 흘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떡은 그것이 곧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떡이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의 힘이 되고 유지시키는 요소가 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떡이란 배부른 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배고픈 자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떡이 수많은 곡식을 빻아서 한 덩이로 되듯이, 다수인 우리가 합하여 하나의 떡과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다 하나의 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곡식이 낫으로 베어지고 타작 마당에서 도리깨질로 탈곡된 후 방앗간에서 껍질이 벗겨지고 체에 쳐져서 지독히 뜨거운 열로써 떡으로 구워지듯이, 그리스도의 몸 역시 찢기고 상하여졌습니다. 떼신 떡을 나누어 받아 먹게 함으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가 확실히 그들과 함께 할 것을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적인 임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밥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밥은 생명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의 영이 죽게 되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밥으로 먹는 생명운동이며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구원 행위인 것입니다. 음식은 먹음으로 내 것이 됩니다. 음식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은 먹는 것이 임자입니다. 내 속에 소화된만큼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식탁은 먹음으로 생명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는 생명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밥을 먹으면 생명이 되고 힘이 되지만 결국은 체질이 먹는 양식대로 형성이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이 찌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사는 향방이 다르고, 삶의 행복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이는 밥이 되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사람에게 먹을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미음이 있는 곳에는 사랑의 밥으로, 갈등이 있는 곳에는 평화의 힘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물질의 밥으로, 복음이 없이 죽어가는 자에게는 생명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은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살맛나게 하는 초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밥으로 먹고 살맛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밥이 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죽어야 나누어지게 됩니다. 나누어 먹으면 밥맛이 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살맛을 내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나누는 시간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 생명의 잔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최후로 남긴 유산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축제였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이면 축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받는 자는 이제 감사가 넘쳐서 모든 환경에서 우리의 삶을 축제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2,000여 년 전 예루살렘의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행해진 성찬 예식이 오늘날 이 땅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1. 성찬 예식은 구속의 은총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예식입니다(22-24절). 성찬 예식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먼저 주님은 \\\"떡\\\"을 떼시며 그것이 당신의 몸, 즉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찢기시는 당신의 존귀하신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만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시며 신령한 하늘 만나가 되심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를 먹었어도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잠시 잠간 후면 썩어 없어지게 될 육신의 양식으로는 결코 우리의 갈급하고 답답한 영혼을 배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의 몸을 함께 나누며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한 몸을 이룰 때만이 성도는 참 생명을 얻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포도주 잔을 가리키며,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구약 당시 제물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죄의 효력을 가졌듯이, 신약 시대에는 주님의 속죄의 보혈만이 모든 죄인의 죄를 사하는 유일한 효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위해 흘리는 주님의 보혈을 가리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진실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피 공로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보배로운 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 맺은 사실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하여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거듭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 예식은 우리 죄인을 위해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고귀한 피를 흘려주신 주님의 사랑이 구석구석 배여 있는 사랑과 은총의 성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찬 예식은 장차 있게 될 어린양 혼인 잔치를 예표하는 축복의 예식입니다(25절). 주님은 성찬 예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주님의 지상 성찬 예식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날 천국에서는 다시 큰 축복의 성찬식 즉 천국 혼인 잔치가 있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거행하는 성찬 예식은 곧 장차 천국에서 있게 될 천국 혼인 잔치의 예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금은 성찬 예식을 통해 영적으로 주님과 교제하지만, 장차는 신랑되신 주님 앞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의 자격으로 성대한 혼인 잔치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잔치 자리는 지상 교회에서 천상 교회로 바뀌고, 우리 성도 역시 거룩하고 신령한 몸을 덧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성찬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장차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서 예수님과 갖게 될 완전한 교제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생명을 걸고 귀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비록 우리가 죄된 욕심을 입고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성찬 예식은 천국 혼인 잔치의 그림자임을 기억 하셔서, 천국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사람 답게 신령하고 거룩한 변화된 심령으로 주의 성찬에 참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침례교 목사인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성찬은 그 예식에 참여한 모든 성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의 몸을 분별할 수 있는 참 성도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성도의 올바른 신앙 자세를 교훈한 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찬 예식에 참예하는 자의 올바른 신앙 자세를 가르쳐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즉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실지니라\\\"(고전 11:2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피고 죄에서 돌이켜 준비된 신앙 자세로 성찬에 참예하는 자에게는 성찬 예식만큼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에게 있어 성찬 예식은 자칫 주님의 거룩한 몸과 피를 더럽히는 엄청난 범죄의 자리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히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실상이라는 말은 아래로부터 바쳐준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아래서부터 바쳐주는 기초와 같아서 폭풍이 불어와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IMF 이후 경제가 조금은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굉장한 불황입니다. 장사하고 사업하시는 분들의 이야기가 현상만 유지해도, 밑지지만 않아도 사업을 잘 하는 거라고 그럽니다. 하루 하루 넘기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황이 깊다 보니 대졸자들의 취업에도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거의 채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황의 때에도 전혀 취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예쁘게 생긴 여학생들입니다. 직장에 취직하는 문제며, 결혼을 하는 문제들이 오히려 다 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쁜 여학생들에게는 불황이 그렇게 문제가 될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격 못된 것과 과거는 용서가 되는데 못 생긴 것은 용서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불황이라고 하지만 미모가 그들의 삶을 아래로부터 바쳐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이나 돈이나 명예나 빽이 그들의 삶을 아래로부터 바쳐주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모도 지식도 돈도 명예도 빽도 없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삶을 아래로부터 바쳐주는 근거가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하시고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신 우리의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시 102:25-27에,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뀌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또 사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물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 자임이라.\\\" 이렇게 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고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면서 이는 내 몸이니 먹으라고 하셨습니다.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니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에 유대의 지도자 급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것을 못 알아듣고서 우리가 식인종인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요 6:51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에 집집마다 식구의 수를 따라서 양을 잡게 해 주셨습니다. 그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그 집 문설주와 인방에 다 바르게 했습니다. 문설주는 중방과 문지방 사이, 문의 양편에 세운 기둥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양을 구워서 먹게 했습니다. 그 양을 먹을 때에 쓴나물과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같이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먹지 아니한 사람들은 출애굽을 했어도 애굽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애굽을 그리워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체질을 가지고 삽니다. 그렇게 애굽을 그리워하며 사니까 사건을 만날 때마다 불평이요 원망이요 불만 투성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왜 주시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사건은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무슨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마귀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 놓으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왜 주십니까? 홍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셔야 됩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을 드릴 때 먼저 어린 양을 잡아 칼로 각을 뜹니다. 각을 뜰 때 그 흘힌 피가 우리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도 발라져야 됩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렇게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지면 애굽의 재앙과 환난과 불행이 물러가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대로 그리스도 예수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죽음의 사자들이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어린 양의 피는 누가 받을 수가 있습니까? 아무나 받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만이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씨, 그리스도의 종자, 그리스도의 백성이 아니고서는 이 언약의 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어도 그리스도의 피를 받지 못해 자살한 가룟 유다가 있는가 하면, 죽기 직전까지 강도 짓만 하다가 죽게 된 강도는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낙원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볼 때에 그리스도의 피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은혜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제한을 두고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제한된 수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엡 1:4-5의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엡 1:4-5)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받는 것으로만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로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라놓아 애굽의 화는 피했다고 하지만 애굽에서 뛰쳐나올 힘을 얻기 위해서 어린 양의 고기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 양의 고기, 예수 그리스도의 살은 교훈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을 말합니다. 어린 양의 고기를 먹지 아니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린 양의 고기를 먹지 아니하면 구속함을 받고 애굽에서의 재앙은 면했지만 출애굽할 힘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출애굽할 힘을 얻기 위해서 어린 양의 고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먹되 남기지 말아야 됩니다. 남기지 말고 그 고기를 다 먹어야 출애굽할 힘이 생기게 됩니다. 요새 예수 믿는 사람들이 힘이 없습니다. 저 자신부터 그런 것 같습니다. 구원도 받고 재앙도 피했습니다. 그런데 힘이 없습니다. 새벽 기도회 나올 힘이 없습니다. 주일 지킬 힘이 없습니다. 십일조 할 힘이 없습니다. 진리로 인하여 승리할 힘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를 먹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은혜만 받았지 예수의 살을 먹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세상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자기를 이길 만한 힘이 없습니다. 죄악을 이길 만한 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 양의 살을 먹지 아니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새벽마다, 주일마다, 주일 오후, 수요일 저녁, 속회 때 마다 양의 고기를 자꾸 먹어야 됩니다. 이렇게 양의 고기를 먹는 사람은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능력을 받아 영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배워서 학력을 얻게 됩니다. 운동을 해서 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심으로 나아가서 재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잘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팔뚝이 근육질이 되어야 하고, 발도 굵고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은 자꾸 먹고, 먹어야 할 것들은 먹지도 않으면 그게 무슨 예수쟁이 꼴이 되겠습니까? 남 고쳐주려고 하기 전에 먼저 먹을 것 먹어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남 고쳐주려고 하다가 그만 자기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자가 된다고 하면 그게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 바로 잡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심사해야 됩니다. 어린 양의 고기,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운동들이 얼마나 불행하고 그릇되고 잘못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는 받았지만 애굽에서 나올 힘이 없어 가지고, \\\'아! 나는 그냥 애굽에 머물렀더라면 좋았을걸.\\\' 애굽에서 먹든 배추 생각이 나고, 마늘 생각, 파 생각, 부추 생각, 고기 생각이 나서 \\\'아이구 그거 먹었었을 때에는 힘이 났었는데\\\' 이렇게 사망의 힘이 생기는 것을 그리워합니다. 음행의 힘, 폭력의 힘, 도둑질하던 힘이 생겼던 것들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어야 주님 뜻대로 사는 힘이 생기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살을 먹지 아니하니까 순종할 만한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사는 힘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어야 주님의 뜻대로 살 힘이 있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합니까? 왜 끊을 것을 끊지 못합니까? 왜 미지근 합니까? 왜 예수쟁이처럼 못 삽니까? 믿는지 안 믿는지 왜 그러고 있습니까? 해방도 됐습니다. 자유도 얻었습니다. 구속함도 받았지만, 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양의 고기를 먹어야 애굽에서 떠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고, 인정과 사정과 물정을 떠나고, 주관과 자율과 능동에서 떠날 수가 있습니다. 고기를 먹지 못하니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의 고기를 먹었더라도 토해버리면 그런 사람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탈수 현상까지 나타나서 완전히 기력을 잃고 말게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순종할 만한 힘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양의 고기, 그리스도 예수의 살을 먹은 사람만이 거룩해집니다. 양의 고기를 먹은 만큼 변화를 얻습니다. 양의 고기를 먹은 만큼 성장 합니다. 양의 고기를 먹은 만큼 힘을 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교훈과 진리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에 힘을 써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