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음, 영광의 구원


영광의 복음, 영광의 구원/벧전1:8-12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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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들은 만져지고 보여지는 것에만 가치를 부여합니다.
신앙은 그래서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사죄함을 얻은 성도들은 유물론자들처럼 만져보고 믿고자하지 않습니다.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고 믿으며 만족해하고 즐거워하며 영광스러워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을 금에 비교하고자 했습니다.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의 서신을 받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아멘!” 하는 분위기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서신을 대하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믿음은 금보다 더 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지금 시대에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쩌면 금을 믿음에다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이 되어집니다.
내 마음에 금을 굳게 쥐고 믿음이란 걸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쥐고 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금을 쥐고 믿음을 생각하려 하니까 믿음의 가치가 다가오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광의 금, 영광의 유물(唯物)이 아닌, 영광의 복음, 영광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복음의 증거들(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영광을 얻고 누린 사람입니다.
그가 사도라는 것은, 제자로 직접 부름을 받았고 3년 동안을 예수님의 곁에서 바라보며 함께 생활한 복을 누렸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에게 핍박가운데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또 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갑바도기아, 갈라디아. 비두니아와 본도 그리고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믿음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과 다른 것은 사는 지역이 다르다는 것 외에, 자신처럼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부러워할 만큼 칭찬하고 싶고 인정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보지 못함이 주는 특별한 어떤 것들」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보지 못한 자의 사랑, 보지 못한 자의 믿음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보지 아니한 자가 소유한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알고 보고 믿고있는 베드로에게 마저 특별해 보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들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되어집니다.

언젠가 한 신실한 그리스도인 자매의 이런 고백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2천년 전 예수님이 사신 팔레스틴 한 지역에 태어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현장인 벳세다들녁에 있지 않은것도, 병자들을 친히 고쳐주는 길가와 골고다의 십자가의 자리에 있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가지게 된 고백이었으리라 믿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배반의 사람들로 돌변하기도 했는데 예수님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 믿고 영광스러운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요한복음 20:29에 나오는 도마와 예수님사이에 오간 대화를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하시니라”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더욱 분명히 믿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의 비밀과 신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믿음을 통해 보여질 때 그 실상은 직접 눈으로 본 것 보다 더 신비스럽고 또 그 대상이 인격이라할 때에는 사랑은 더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그 느낌은 더욱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요즈음 7080시대의 노래들이 다시 유행입니다.
4,50대나이에 속한 저희 세대들이 즐겨부른 노래들입니다.
가사의 내용이 요즘 젊은세대들의 것과 다릅니다.
늘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그래서 그리움으로 나누어야 했던 사랑의 언어들과,
항상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지금시대의 언어와 감정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세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없는 66권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묵상을 하고 깊이 기도하는 자만이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복음의 증거들은,
보지못한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일이요 보지못한 예수그리스도의구속의 사실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하는 일인 것입니다.


복음의 결과 (9절)

영광스러운 복음의 선물은 구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신 이 사실은 믿음에 있어 절정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보면 거기엔 클라이막스가 있습니다.
극도로 관심을 끌어올려 깊은 몰입을 통해 감정을 극대화시켜주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느껴지면 감동이 있어서 만족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혼구원의 그 지점은 지식과 종교적 습관을 뛰어넘게 하는 너무도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클라이막스가 존재하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됩니다.
성경의 많은 지식을 알고 그것을 동의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든지 많은 세월을 종교생활로 살아와서 습관에만 젖어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에 구원은 받을 것이고 그때에 기쁨이야 누리겠지만 지금 현재적 삶 속에서 오늘 이 수신자들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믿으며 넘치는 기쁨과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에서는 구원의 이 순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왜 성경은 장차 얻을 영원한 구원을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본문에서도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는 표현을 할까요?
그것은 실제로 받은 현재적인 것이 너무도 크고 많기 때문입니다.
순간, 구원의 약속을 받는 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신분이 되는 것이고 그의 보호하심을 받게 되며 또 의의 공동체의 멤버가 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적 동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감정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의지를 동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아왔지만 구원받은 기쁨과 하나님의 자녀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한 자의 삶에 변화가 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비밀과 신비(10-12)

구원에 대한 연구와 묵상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한 일을 보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했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집요한 관심은 구원에 대한 묵상과 연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그들의 연구와 살핌이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경들을 연구하고 살피며 이야기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자기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보고 느끼면서 그 감동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이야기함을 보십시오

오직 그들은 믿음의 렌즈를 통해 본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선지자들이 본 것을 마태복음 13:1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본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을 다 알고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렌즈를 통해 본 것은 조각과도 같은 작은 편린들일 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알게 하기 위하여 알려준 정보들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이 그렇고,
이사야 7:14의 동정녀탄생에 대한 예언이 그러합니다.
미가선지는 5:2에서 그 탄생지가 베들레헴이 될 것을 말씀하며
스가랴 선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알려 줍니다(9:9)
그들의 이런 섬김들은 모두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본문 10절과 12절에서는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각과도 같은 예언들을 우리에게 깊은 묵상과 깨달음을 통하여 남겨주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일을 보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셋째, 선지자들의 묵상의 초점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었음에 유의해 보십시오.

좀더 정확히 본다면 부활이후의 영광보다 섬김을 위한 고난과 수고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고난과 수난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신비입니다.
신비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을 들추고 찾는 자만이 보고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것인지 다시 정리해서 알려주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2절 하반절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성령을 힘입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며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묵상가운데 주어진 것이며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감추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구원의 비밀들이 많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정리는 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묵상했던 그 부지런함과 살핌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케 하시는 은혜를 의존하지 않은 어리석은 구원관과 종말관에 현혹되어서도 안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17) 고 말씀합니다.

말씀안에 담긴 구원의 깊이와 은혜가 그런 간절함을 가진 여러분의 아름다운 습관들을 통해 영광스러운 구원과 감격으로 안겨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