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경제 질서

성경적 경제 질서
창3:17/마6:31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1)

1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이 말해주듯이 성서는 우리들에게 이 문제에 관해 일관된 메시지를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우리들에게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먹고살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의 나눔에 대해서는 누누이 강조하셨지만, 어떻게 그 부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나 공중 나는 새를 가리키며 걱정 말라고만 하셨지 어찌해야 가난한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현실세계에서 보면, 나눔을 강조하는 사회는 예외 없이 나눌 것이 없습니다. 예정된 최후 심판의 날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인간사회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생산하느냐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경제체제 혹은 경제질서라고 부르는 것이 이 문제를 결정하는 시스템을 지칭합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생산하고 누구를 위해 생산하느냐의 문제는 인간들만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사는 개미나 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본능에 의해 이 경제조직의 근본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원시사회에서는 인간들도 동물적 본능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가졌을 것으로 봅니다. 봉건사회에서는 관습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이었습니다.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독점할 때 이를 명령경제라 하고, 시장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를 시장경제라 부릅니다. 20세기, 특히 그 후반 냉전시대는 이 경제체제의 선택을 둘러싼 이념대결의 시기였습니다. 지금 냉전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의견차이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경제질서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쓰여질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늘의 경제질서에 대한 평가에 도움이 될만한 단서를 그 성서에서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이 문제에 대해 명시적으로 해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추론이 불가피해 집니다. 우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추론 과정에서 인간들의 상식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이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매우 평범한 경고입니다.

구성의 오류 (fallacy of composition)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리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이기 때문에 경제학 교과서에도 등장합니다. 부분에 대해 참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체에 대해서도 참이라고 단정할 때 범하는 오류입니다. 개인에 대해 참인 것이 사회에 대해서는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농민 개개인에게는 수확이 적은 것보다는 많을 때 소득이 많다는 것은 항상 참입니다. 그러나 전체 농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농민 개인으로는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부가 풍작이면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기술진보와 고용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산업혁명 당시 Luddite Movement 라고 기계파괴운동이 있었습니다. 기계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사용에 반대한 것입니다. 이 경우도 분명 미시적으로 단위기업에서 보면 기계도입이 일자리 없앤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확대 해석하는 “그러므로 기계도입은 경제의 고용수준을 낮춘다“는 결론은 오류입니다. 기계사용으로 제품의 가격이 떨어져 수요가 늘어나고, 생산성 증대로 늘어난 이윤이 재투자되고, 또 기계를 만드는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는 등 새로이 창출되는 일자리가 없어지는 일자리보다 더 많았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금 미국경제의 장기호황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말이 경쟁사회의 냉혹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이 표현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에서는 약자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그르므로 인간 사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담겨있습니다. 이 비유의 문제는, 인간의 상식대로라면 아마존 정글에는 맹수와 공룡 같은 구렁이 아나꼰다 만 남고 작은 동물은 다 없어졌어야 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하나님의 섭리에 그대로 따르고 있는 아마존에는 다른 어디에 보다도 작은 동물이 많습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성공적 삶의 기준이 되는 종의 번식으로 보면 개미가 가장 성공적입니다. 각 동물의 무게 총량 랭킹에서 경쟁상대가 없는 부동의 1위의 자리를 개미가 차지한답니다(부연설명). 인간들의 경쟁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룡 같은 대기업의 자본력 앞에서 중소기업은 다 도태되고 재벌만이 영원하리라는 판단은 오류입니다. 기업의 생존은 효율성의 문제이지 크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룡이 지구상에서 멸종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흥망성쇠를 보아도 그렇고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부침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는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니겠습니까?

2

성서가 경제질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지만 성서의 정신에 비추어 어떤 것이 성서적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인지, 즉 하나님이 주신 경제질서라면 최소한 이런 조건은 충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은 어떤 것 일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첫째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선악과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위임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담긴 경제질서라면, 아마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개인의 선택권이 보장된 질서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로는, 때로는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다수가 기아에서 굶주리게 하는 시스템은 그의 뜻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사유재산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경제질서로 상정해 봅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다른 조건은 찾기가 어려울 듯 싶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균등한 분배라는 조건도 마땅히 충족되어야지 하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서의 나눔의 의미나 구약의 희년의 의미를 새기어 보면 그 나눔은 경제행위로서의 범주를 벗어난 다른 차원의 행위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는 제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라는 의미는 경제행위로서의 나눔이 아닙니다. 경제행위를 통해 축적한 부를 경제논리가 아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희년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초에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땅을 나누어 갖고 경제활동을 시작해도 일정기간이 지나는 동안 돈을 벌어 남의 땅을 사서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고, 망해서 빚을 지고 이웃의 도움이 없으면 연명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도 생기는데, 희년을 맞아 한 번씩 동등한 조건에서의 새 출발 기회를 만들라는 것이지 그것이 경제활동의 방식은 아닙니다. 토지는 아주 팔지 못한다는 율법도 희년제도에서 파생되는 제약으로 희년의 한계 내에서는 매매가 가능했기 때문에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조건을 찾지 못한 것이 제가 믿음이 부족하고 편견에 눈이 어두워 그런 것이라면 용서하십시오. 하여튼 나름대로 노력은 했으나 우선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사실 성서에는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인용할 수 있는 구절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편리한대로 해석하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우려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달란트의 비유 (마 25:14-30; 눅 19:11-27)가 글자 그대로 해석되어 생산성으로 보상받는 경제제도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을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까지에는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예화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에는 생산, 고용, 계약, 재산권과 같은 중요한 경제 이슈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군이나, 제3시, 6시, 9시, 아니 11시부터 일한 품군 모두 한 데나리온 씩을 받는다는 내용은 천국은 생산성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배분되는 세상이라는 말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는 13절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는 16절의 말씀은 계약이 존중되고 재산권이 보장되는 세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게 해 줍니다. 두 부분 중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 편견일 수 있습니다. 또 달란트 비유의 주인과 이 포도원 주인의 일에 대한 보상의 차이는 어떤 경제적 해석이 가능할까요?

이런 문제는 성서 해석상의 초보적인 문제인데 뭐 새삼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고, 신학체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보편적 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요. 그런 조직신학적 접근을 통해 기독교적 경제관을 연구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연구들에서 가장 널리 수용되는 견해가 곧 청지기 경제관일 것입니다. 청지기 경제관을 100% 수용하더라도 문제는 그대로 남습니다. 좋은 청지기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좋은 청지기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어왔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제4의 종이 있어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할 때,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이와 비슷한 상황이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않은 종(마 23:45-51, 눅 12:41-48)의 비유에 나옵니다만, 이 비유에서 신실하지 않은 종은 자신의 술친구와 먹고 마신 것이어서 앞의 질문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청지기 경제관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대리 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적이 있다는 점입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요한복음10:12-13)

3

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경제질서라고 믿고 있는 시장경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고 성서적 경제질서의 조건은 어느 정도 충족하는지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제질서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상형으로서의 경제질서와 현실에서의 그것입니다. 이상으로서의 경제질서는 이상적 모형 혹은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 모형은 때로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현실이 추구해야할 이상형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현대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정리가 현실이 추구해야할 이상적 모형에 관한 것입니다. 즉, 완전경쟁시장의 균형은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경쟁이란 모든 경제주체들이 가격 순응자 (price taker)인 상태라고 정의됩니다. 이는 그 누구도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에 사고 팔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시장에는 가격을 좌지우지할 만큼 큰 자가 없고 전부 작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시장경제하면 코카콜라를 연상하게 되는 현실에서 이 말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미국정부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분할하려고 애쓰는지를 보면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경쟁시장에서는 경제주체들은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한다고 가정합니다. 즉,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됨을 의미합니다. 현실에는 물론 완전경쟁시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가장 근접한 시장이 주식시장, 외환시장입니다만 여기서도 때때로 큰손의 영향을 받는 것을 봅니다. 또 오늘날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라고 말하지만 경쟁적 시장경제로 분류될 수 있는 경제는 선진공업국들 뿐이고, 홍콩, 싱가폴, 미국 경제가 이론적 모형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경제라 하겠습니다.

이제 시장경제의 이상형을 성서적 경제질서의 조건에 비추어보면, 최소한의 조건인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합니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재산은 기본가정이고, 효율성은 논리적 귀결로서 경제학의 연구결과가 입증한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경제주체들이 시장에서 원자적 작은 존재라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부합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시장경제에 대해 많은 비판들을 합니다. 저에게는 그 비판들이 마치 기독교라는 종교를 십자군 전쟁, 신대륙에서 원주민 학살, 종교재판 혹은 우리 사회에서 보는 교회들의 잘못된 행태를 가리키면서 형편없는 종교로 매도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일 기독교가 그런 종교라면 우리는 여기 모여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기독교는 예수 복음의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에도 이상형이 있고 현실이 따로 있듯이, 시장경제도 이상형과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이상형으로서의 시장경제는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경제질서라고 믿습니다. 최소한 지금까지 인류가 알고 있는 경제질서 중에는 그보다 나은 대안이 없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