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경제원리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8:10-15





21세기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20세기 한국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든지 미국에 있는 교회든지 거의 대부분이 모으는 교회(collecting church)였습니다. 한 교회만 살찌우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해서, 대형교회화함을 자랑합니다. 어느 교회의 숫자가 20,000명이라고 발표되면 이와 경쟁하는 위치에 있는 교회는 숫자를 좀 불려서라도 자기네 교회는 22,000명이라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어떤 신앙의 삶을 사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표된 교인의 숫자에 의해서 자신들이 할 일을 다한 줄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은 주안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랑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에 따라 허세를 자랑하는 헛된 자랑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현재 교회건물로도 충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경쟁교회보다 더 큰 대형교회건물을 짓는데 대부분의 헌금을 사용합니다. 물론, 교회재정 가운데 전도와 선교계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와 선교비는 말하자면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인데 어떻게 전도와 선교에 재정을 할당할 수 있습니까?\" 하여 이를 등한시 여기고 이 사명을 위해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설령 큰 교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교회는 나누는 교회(distributing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이신 5병2어의 기적은 \"하나님의 역사는 나눔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21세기 교회는 20세기의 모으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의 모습을 갖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도 교제를 위하여 뫃여있는 성도가 아니라 전도를 위하여 흩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여 한 곳에 모여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뫃일 때까지 흩어져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좀더 시간이 많으면,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이웃을 돌볼텐데\"; \"나에게 좀더 재물이 많으면 교회에 십일조도 하고 이웃을 구제할텐데\" 말합니다.

하지만, 현재 다소 부족한듯한 시간과 재물로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물하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재물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100불의 수입이 있을 때,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10불을 구분하지 못한 사람은, 10,000불의 수입이 있을 때 아까와서 1,000불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1,000불을 구분하는 일은 그가 변화된 삶을 살게됨으로서만 이루어집니다.



2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그의 주요서신인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모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생계유지(生計維持)를 위해서는 스스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구차(苟且)하게 손을 내밀지 아니한 그였지만, 예루살렘의 가난에 허덕이며 고통(苦痛)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고, 사람들을 보내며 모금(募金)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의 그의 동포들은 그를 배척하고 그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었지만 로마서 9-1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형제·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9-10절에서 그는, \'그와 바나바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지만 기도가운데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문제를 생각해왔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6:1-4에서 보니,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갈라디아교회에 연보를 떼어두게하고 이의 본을 받아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리하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다시 모금할 것을 권면함은,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의 당부대로 연보를 떼어두어 따로 모금할 필요가 없고, 그보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마게도냐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들은 그들의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적극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풍성하게 그들의 가진 것을 드림으로 모금을 완료하였는데,

고린도교회는 미적미적하고있으므로 이 모금의 일을 마무리짓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5:25-28에서 보니, 여차저차해서 드디어 모금이 완료되어 바울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갈 수있게됨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알리고, 그가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러서 그간의 그의 근황(近況)을 얘기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기간중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는데, 그의 제 3차 전도여행이 사도행전 18:23-21:17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세 번째 전도여행의 목적은 바로 그가 각 교회에 편지하고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하라고 하여 마련된 돈을 거두어 예루살렘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는 3년에 가까운 기간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두루 돌면서 돈을 모아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적인 부분을 완성시킨 대신학자이지만, 그의 신학은 탁상공론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를 실천한 철저한 그리스도인--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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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스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남은 생애동안 비천(卑賤)과 환난(患難)에 처하는 삶을 살았지만, \"부요한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후에 그가 가난과 역경과 핍박의 삶을 살았지만 부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부요한 자이었으나 가난하게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풍부(豊富)에 처하여도 비천(卑賤)에 처하여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르쳐주신 까닭입니다. 해서,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간증합니다.



3

1-5절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적인 구제의 참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을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서 되어진 것과 같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루살렘성도들을 구제함은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2절에서 보니,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도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자원하여 그가 가진 것을 주셨는데,

3절에 마게도냐 교회들도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들의 가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그 자신까지 아낌없이 주셨는데,

5절에 보니 마게도냐 교회들도 성도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고린도교회에서 모금을 시작한 것은 벌써 1년전부터인데, 늦게 참여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모금을 완료하였는데, 고린도교회에서는 예상했던 금액이 아직 거치지 않았을 뿐아니라 수준에 한참 미달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작정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대신에, 그들의 선한 것에 호소(呼訴)합니다.



7절에,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恩惠)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돈을 모으는 일인 모금을 말함에 있어, 바울은 돈이란 단어인 ?ργυριον이나 ?ργυρο?란 말은 한 번도 사용하지않고, 대신에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 것인지를 표현하는 은혜(χ?ρι?), 봉사 혹은 자비를 베품(δικον?α), 친교 혹은 나누어가짐 (κοινων?α), 풍성한 선물(ε?λογ?α, ?δρ?τη?), 구제를 위한 선물 혹은 은택(λειτουργ?α)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사랑이 진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9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시요, 이를 소유하신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되, 부유한 왕궁의 왕자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오실 때, 베들레헴의 한 여관 마굿간의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으로 점철(點綴)된 것이었는데, 그는 공생애기간중 마땅히 누울 아늑한 방 한칸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이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어떻게 우리로 부요케 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되, 만일 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로, 혹은 분봉왕 헤롯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쉽게 만날 수없고 가까이 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복음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에게 쉽게 들려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3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셨고, 누가복음 6:20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를 받아드리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심령이 매마르고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심려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요는 세상가운데 물질적인 축복과 부를 소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 같이 쉬없어지고 썩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 46



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동안, 우리의 처지와 형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따르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전에 걱정하던 세상 것으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한달 1,000불 수입으로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하여 가진 시간과 재물로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헌물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같은 1,000불의 수입이나 교회에서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물합니다.

전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였는데, 이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삽니다. 이제, 우리는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9절에서 \"예수님의 가난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라 말함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부요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눈에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을 확증함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눈에 보이는 헐벗고 지극히 작은 자를 돌봄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중에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보는 것입니다.



13-15절에서 바울은 평균(平均)의 경제원리(經濟原理)를 설명합니다. 평균의 원리는 우리의 풍요로운 것을--유여(裕餘)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입니다. 이리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부요(富饒)한 것으로 우리의 부족한 것을 보충(補充)하여줄 것입니다.

해서, 모든 믿는 사람들간에 균등화되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평균의 원리의 근거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실 때, 한 사람 몫으로 한 오멜씩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는데(출애굽기 16:15-18),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그들이 먹을 때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에게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도 바울의 평균화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칼빈은 \"물질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의 물질의 풍요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영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영의 풍요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리할 때, 믿는 자의 공동체가운데 영적으로·물질적으로 궁핍함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은 우리의 가진 것에 여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과 나눌 때에 이루어집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그들의 극한 상황가운데서도 그들의 것을 아끼지않고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스도안에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5병 2어로서 5,000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신 예수님의 기적도, 적은 것을 떼어서 나눌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떼어서 나눌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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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는 사람들이 혹은 교회가 혼자만 잘 살겠다고, 혼자만 구원받으면 족하다고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구원받았다고 입으로 말하나, 여전히 가난한 자요, 여전히 불쌍한 자입니다.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진 바--유여한 것이거나 또는 부족한 것중에 나누어줄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현재 형편가운데 부요한 자요, 주님의 축복안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