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경제 생활
성도의 경제생활
왕하4:1-7
우리 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열심히 신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하루는 이런 음성을 깊은 마음속에 듣게 되었습니다. \"내 종아! 너는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느뇨?\" \"저는 신학공부를 합니다.\" \"신학이 무엇이냐?\" \"하나님 \"神\" 배울 \"學\",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신학을 배우느뇨?\" \"신학교수에게 배웁니다.\" \"신학을 하나님께 배워야지 어떻게 교수에게 배우느냐?\" \"하나님! 신학을 어떻게 하나님께 배웁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보이는 하나님께 배우라.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 기독론이요? 기독론은 너무 방대합니다. 그 중에 어느 부분을 전공해야합니까?\" \"그분이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를 바로 알아야 하느니라. 그것이 참된 신학이니라.\" 그 후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추구하는 목회자가 되었고 신학의 모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한 목회자가 되었답니다.
십자가란 그리스도교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역사이래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잔혹한 사형도구가 십자가입니다. 왜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오늘날 이렇게 명예로운 것이 되었습니까? 반지, 목걸이, 귀걸이에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달고 다닙니다. 또한 서양의 경우에는 왕관에도 십자가를 새기고 나라의 국기에도 십자가를 그려 넣습니다. 가장 부끄럽고 저주스런 십자가가 가장 영광의 상징으로 변한 거기에 기독교의 역설이 있고 신비가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깊이를 이해하는 만큼 그는 성숙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만 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십자가를 생각하고 깊이 연구를 합니다. 그래서 얀 로호만은 \"예수 이후 모든 인류는 십자가를 의식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역사의 중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에 그의 딸이 \"아빠! 아빠는 이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좋아하세요?\" 묻자 그는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가장 존경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란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인간을 사랑해서 신들만 소유하게 되어 있는 불을 인간에게 훔쳐다 준 이가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인간은 그에게 불을 받아서 과학을 발달시키고 다른 피조물을 정복해 갑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이 강해져서 신들에게까지 도전하게 되자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인간에게 이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큰 벌을 내립니다. 코카서스 산맥에 그를 묶어 놓고 독수리들로 하여금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영원히 파먹도록 저주를 내립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자기가 인간을 위하여 일한 것을 후회하지도 않고, 잘못을 빌지도 않고 자기 가슴이 파이는 고통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마르크스는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는 인류의 프로메테우스다. 인류를 위한 희생자요, 자유를 꿈꾸는 혁명가요, 헛된 신에 대항하는 인류의 궁극적 모습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나약해지지 말고 예수처럼 프로메테우스적 시도를 감행해야 된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십자가의 이해입니다.
많은 혁명가들, 소위 좀더 이 세상을 개혁시켜 나가겠다고 하는 모든 개혁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의 십자가는 무엇이냐? 예수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기존 질서에 대항했고 그러나 실패한 혁명가이며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예수를 실패한 혁명가로 인식하는 것을 가리켜 신학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이해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란 무엇인지 오늘 본문 말씀 8절에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란 혁명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는 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시키면서까지 내가 이만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건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위로부터의 이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실패한 혁명가의 각도에서 보면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만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다 이루었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보여주고 싶은 \"사랑의 총체적 진실\"을 보여 주는데 있어서 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우리들의 감상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구체적인 사건이 있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으로 그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죄인에게 의를 허락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키면서 주의 놀라운 옛 언약을 성취시켜 주시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왜 그렇게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야 됩니까? 그냥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시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희생에 있습니다. 희생의 극치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물이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명한 사랑의 이야기 뒤에는 질병과 죽음과 전쟁이 배경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의심 많은 죄인들을 향하여,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무뎌진 인생들을 향하여,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완악한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강력한 사건으로 폭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너희를 희생하며 사랑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비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죄와 용서의 크기를 대변합니다. 어떤 여자가 남편 몰래 불륜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살았으나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남편 앞에 가책이 심해졌습니다. 이 가책을 이겨보려고 전보다 열심히 남편을 섬기고 가정을 위해 희생했지만 마음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10년을 참다가 마침내 결심을 합니다, 남편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받기로. 그래서 하루는 심각하게 남편 앞에 이실직고 했습니다. \"여보, 내가 10년 전에 우연히 큰 실수를 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이 말을 듣던 남편은 \"그래? 알았어. 용서할께.\"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남편을 이 부인은 갑자기 증오의 눈으로 쳐다보다가 \"나는 당신과 이혼하겠어요.\"하고는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남편이 쫓아 나가서 하는 말이 \"왜 그래? 내가 다 용서한다고 했잖아?\" 그때 이 여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용서는 구토가 나요. 그러한 값싼 용서는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이야기입니다.
용서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 고통 없이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 속에는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용서는 참 용서가 아닙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해도 말로 하는 용서는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 문제를 가지고 10년 동안이나 고민을 해왔습니다. 이 고민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아내의 그런 고백을 들었을 때 \"뭐야? 당신이 정말 그랬어?\" 이렇게 화를 내고 집을 뛰쳐나가서 몇 일을 방황을 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와 자기의 집 문에서 아내와 마주쳤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소.\" 그리고 안아줘야 그럴 듯 한 것 아닙니까? 적어도 용서 전에는 몸부림이라는 댓가가 필요한 겁니다. 아무런 대가 지불 없는 남편의 용서는 그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그 비참한 죽음이란 사랑의 고백인 동시에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미 사랑을 받고 말았습니다. 언제 우리가 사랑을 받았냐구요? 6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연약할 때에...\" 이것은 지식의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죄인 되었다는 사실도 모를 때에 그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질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 앞에 원수처럼 죄지었을 때에, 그 때에도 사랑을 받았단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못된 짓 많이 했지.\" 그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을 걸어갈 때 그 때에 빛이 비치면서 그는 고꾸라지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스데반을 돌로 때려죽이고 범죄했을 때, 그 때에도 자기는 사랑 받은 자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깨달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전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자격이 있다 없다 자꾸 변론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보려고, 틈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기의 의에 대한 변증이 일어나게 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나\"하고 묻도록 유혹합니다. 그렇게 하므로써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럼 성령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5절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성령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은 널 사랑하셔. 희망을 가져라. 원수 되었을 때에 너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아니냐? 오늘 네가 부족하고 실수가 많다고 한들 하나님이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아니하시겠느냐?\" 이것이 성령의 말씀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자격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끔 안 믿는 남편 때문에 고민하는 여집사님들이 계시는데 집에 가셔서 남편들에게 이렇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남편이 물을 겁니다. \"하나님이 왜 날 사랑 하냐?\" 그렇게 물을 때에 이렇게 대답하세요. \"나도 잘 몰라요. 그러나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런 은혜의 말을 들을 때에 지친 영혼은 끌려오게 됩니다.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같은 인간 누가 예뻐해? 미쳤다! 하나님이 사랑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냐?\" 이런 말은 마귀의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에 대하여 정죄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말을 함으로써 그 영혼을 어둡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을 너무도 많이 행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작은 의를 가지고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정죄하는 죄인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내게 의를 행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 그에게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평화, 더 나가서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달은 자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어려운 일을 해석하는 각도가 다 바뀌어 버립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옛날에는 저주였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깜깜해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내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 사건 속에도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더욱 나를 당신의 자녀답게 만들고 훈련하는 것이요, 나를 무장시키는 것이요, 이 길은 결국 축복으로 가는 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절과 4절의 고백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을 당합니다만 그 속에서 인내하게 하고, 이것을 통하여 연단시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죽음은 나를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한 평생의 모든 수고를 다 마치고 내 품에 와서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소망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으니 이제 너희는 화평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Let`s enjoy the peace,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울며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랑 받은 자로서 웃으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데 사사건건 반대하는 미운 사람이 있었답니다. 마음에 생각하기를 \"안되겠다. 내가 기도로써 저 사람을 고치든지, 아니면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저 사람 변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내보내 주세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얘야, 그 아무개가 사람 될 것 같냐? 그 사람 절대로 사람 안 된다. 그 사람 바꾸려다가는 네가 죽는다. 나도 그 사람 못 바꾼다\"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천당은 갈 수 있겠느냐?\" 그래서 \"천당은 가겠지요. 그래도 예수는 믿었잖아요.\"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 \"그래, 네 말이 맞다. 사람은 못 되었지만 내가 내 피로 씻어서 은혜로 엎고 천국에 데려가겠다. 내가 데리고 갈 사람인데 네가 그냥 두고 좀 봐 주면 안되겠냐?…. 참, 나는 아직 너도 못 바꾸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목사님이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흠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제 마음을 아시지요? 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냐?\" \"정말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뭐가 있을까?\"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우러러 볼 때마다 저는 듣습니다. \"보아라. 이게 너를 향한 내 마음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의 가치가 들어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사랑할 때, 그에게 죄와 이기는 있는 용기가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참 평화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그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취해 남은 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 많은 과거를 보게 해주시고 그사랑을 친히 확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그 깊고 깊은 사랑을 현재적으로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의 구원과 영광을 소망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까지 몰랐던 십자가의 의미가 날로 새로워지고 십자가를 더 깊이 알고 더 많이 사랑하게 해 주시며 십자가가 우리의 최고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